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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가족의 탄생] "우린 통일 가정"…남남북녀 커플 이영석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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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디지털 광장 시민마이크가 디지털 다큐멘터리 『新가족의 탄생: 당신의 가족은 누구입니까』를 연재합니다. 이 땅에서 가족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로 전합니다. 이번 이야기는 2011년 탈북 여성(35)과 가정을 꾸린 북한인권단체 나우 이영석(39) 사업총괄실장의 이야기입니다.
  시민마이크 특별취재팀=김현예·이유정 기자, 조민아 멀티미디어 담당, 정유정 인턴기자(고려대 미디어학부 3년) peoplemic@peoplemic.com

  1막, 가족의 탄생

  우연한 계기로 찾아온 삶의 전환점
  사실 저는 모범생 처럼 살진 않았어요. 개인 사업을 하며 소위 '건달 친구'들이 주변에 많았죠. 2001년 중국 연길에서 "북한을 탈출한 주민들을 한국으로 입국시키는 일이 있다"는 제안을 받게 됐습니다. 순전히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죠. 그곳에서 저는 탈북민들의 처절한 현실을 알게 됐습니다. 강에는 시신이 버려져 있고 곳곳에서 만난 탈북 어린이들은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더군요. 여성들은 인신매매로 팔려가고요. 2004년부터 북한 주민들을 구호하는 인권단체에 몸을 담게 됐습니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제 아내는 딸 부잣집의 둘째 딸로 착실하게 살아왔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어요. 그러던 2000년대 중반 가세가 기울면서 아내가 돈을 벌러 중국에 가야할 처지가 됐다고 해요. 가족 중 유일하게 중국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중국으로 넘어간 아내는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아이까지 낳게 됐습니다. 강제 북송의 두려움 속에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아내는 핏덩이를 들쳐 업고 한국 영사관으로 뛰어 들어 갔다고 해요. 이곳에서 2년을 보내고 2009년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2011년 5월 대구의 한 탈북민 정착지원 센터에서 만났어요. 탈북민들의 취업을 장려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담당자가 저였죠. 첫 눈에 반한다는 거, 그 전까지는 안 믿었는데 아내를 보는 순간 실감했어요. 누군가와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으니까요.

  견고했던 현실의 장벽…“아빠 해도 돼요” 한 마디에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충격으로 안면마비가 오셨어요. 아들이 결혼하겠다며 데리고 온 사람이 북한 출신의 아이가 있는 여성이었으니까요. 주변에선 “혹시 사고 쳤느냐” “탈북 여성과 결혼하면 주류 사회로 진입할 수 없다” “순진한 여성을 꾀어 탈북 정착금을 뜯어가려는 것 아니냐”는 반응들이 쏟아졌습니다.

  아내의 아이 역시 넘어야 할 산이었어요. 당시 여섯 살이었던 아이는 자기 엄마랑 제가 같이 밥을 먹는 것도 싫어하더라고요. 아이와 같이 축구도 하고 공부도 가르쳐 주고 갖은 노력을 했죠. 어느 날 커피숍을 데려 갔는데 "핫초코가 먹고 싶다"고 하더군요. 제가 전에 한번 핫초코를 사준 적이 있었거든요. 그 날 아이가 먼저 “아빠 해도 돼요”라고 하더군요. 아들의 한 마디에 큰 용기를 얻고 결혼 날짜를 잡았습니다. 결국 어렵사리 어머니까지 설득시킨 저는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 때의 난관을 생각하면 화목한 가족이 된 지금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랍니다.

  2막, 오늘

남북 문화 차이로 빚어진 갈등…해법은 대화
  결혼 후 얼마 안 가 둘째 딸이 태어났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가 농사를 지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 아내는 농사를 짓자는 말에 펄쩍 뛰며 반대했습니다. 북에 있을 때 경험한 농사는 일일이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밭을 일구는 강제 노역이었기 때문이지요. 부모님 댁에 가서 현대화 된 농기계를 보더니 정말 좋아하더군요. 저희 가족은 2013년 지방으로 귀농해 쌀·보리·귀리 등을 키우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인권단체 활동을 병행하면서 주말마다 집을 오가고 있어요.

  그런데 아내와 저희 부모님이 같이 지내게 되니 말로만 듣던 고부 갈등이 시작되더군요. 아내와 어머니의 갈등은 문화적인 차이가 컸어요. 아내가 영어식 외래어나 농업 용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 어머니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어요. 한 번은 둘째가 아픈데 아내가 북한식 민간요법으로 마늘 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줬다고 해요. 어머니는 "왜 병원에 가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이셨고요. 반면 아내는 북에 두고 온 자기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어머니가 이해해주시지 못한다며 서운해 했고요.

  사소한 오해들이 쌓여 고부 간의 갈등이 정점을 찍자 제가 다 같이 모여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아내와 어머니가 각자 서운한 걸 털어놓다 보니 막판엔 고성이 오갈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두 사람이 함께 바람을 쐬러 나가더군요. 그 이후로 서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됐어요. 비로소 한 가족이 된 거죠. 지금은 한 달에 한 번씩 일가 친척 대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한답니다. 아내 덕에 저도 부모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고요.

  저희 부부는 문화 차이로 인해 신혼 때 많이 싸웠어요. 저희가 찾은 해법은 "서로에게 솔직해지자"였어요. 우리는 다른 문화에서 자랐으니까 솔직하게 다른 부분을 이야기하자고. 지금은 닭살 커플이라고 할 만큼 사이가 좋답니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남북한 남녀가 결혼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다문화 가정과 유사한 점이 많죠. 남자 쪽에서 북한 여성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으로 접근했다가 생각과 다르면 실망하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무엇보다 결혼은 동등한 입장의 남녀가 만나는 것인데 '상대방을 도와준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거든요. 그러다보니 결혼을 하고 나면 "한국식으로 가야 한다" "여자 쪽에서 남한 문화를 따라와야 한다"고 요구하고요. 남북한의 문화 차이는 사회적인 것이고 두 사람 간의 문화는 서로 만들어 가야해요. 각자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랍니다.

  아내는 제 일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이기도 해요. 저는 북한의 국경 지역에서 탈북민을 구출해오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목숨을 위협 받을 때도 있어요. 아는 분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경우도 있고요. 어느 날 새벽엔가 도저히 잠이 안 와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눈물이 절로 나더군요. 이때 아내가 아무 말 없이 제 옆에 앉더니 맥주 캔을 하나 건네는 거예요. 그때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믿어주고 함께 할 사람은 이 사람 밖에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3막, 내일

  '통일 가족' 늘수록 간접 경험 쌓일 것
   저희 가족은 지금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자그마한 소망이 있다면 시골에 남북한 통일촌을 이루고 싶다는 것이에요. 이를 위해 북한 출신 분들하고 농업 회사를 세우는 것을 계획하고 있답니다. 아내는 항상 "우리 순수익의 40%는 무조건 기부하자"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꼭 북한 관련 기부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이 사회에서 받은 만큼 보답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요. 두 아이들에게도 기부하고 나누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큰 돈을 내야 기부가 아니다, 어려운 어르신들께 따뜻한 국 한 그릇, 배고픈 아이들에게 쌀 한 가마니 선물할 수 있는 마음이면 된다고요. 저희도 마찬가지지만 탈북민들은 자기 손으로 농사 지은 쌀이 북한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몸은 갈 수 없어도 자기 손으로 지은 쌀을 가족에게 전하고 싶다는 바람이겠죠.

  저는 곤경에 처한 북한 주민들을 왜 도와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냥 '제 옆에 있는 사람이어서' 돕고 있어요. 친구가 넘어졌을 때 단지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손을 잡아주는 정의가 한국 사회에 있다고 믿어요. 그 사람이 북한 사람이 아닌 어느 낯선 나라의 난민이었다고 해도 저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저와 제 아내는 언젠가는 통일이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곳은 우리 두 아이가 살아갈 공간이기도 해요. 저희와 비슷한 '통일 가족'이 많아질 수록 한국 사회에 그 날에 대비한 간접 경험이 풍부하게 쌓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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