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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칭기즈칸 선조(先祖) ‘황금항아리’는 발해(渤海) 대야발의 후손 대조선(大朝鮮) 보혈(寶血)이 서토(西土)의 강역을 휩쓸었나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몽골 기마병 부대가 평원지대를 힘차게 달리고 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족과 발해 제10대 군주 선왕(宣王)이 협력해 발해의 영토를 신라의 한주 지역까지 넓혔다고 주장한다. 더하여 몽고제국의 창업자 칭기즈칸의 선조(先祖)가 발해의 왕통(王統)에서 비롯됐다는 흥미로운 역사 이론(異論)을 제시한다. [사진·중앙포토]

몽골 기마병 부대가 평원지대를 힘차게 달리고 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족과 발해 제10대 군주 선왕(宣王)이 협력해 발해의 영토를 신라의 한주 지역까지 넓혔다고 주장한다. 더하여 몽고제국의 창업자 칭기즈칸의 선조(先祖)가 발해의 왕통(王統)에서 비롯됐다는 흥미로운 역사 이론(異論)을 제시한다. [사진·중앙포토]

문제의 인물 ‘금행(金幸)-황금항아리’는 용녀(龍女)와 삼지파(三支派)를 낳아 동아시아에 거문대족(巨門大族)을 번성케 했다. 위로는 고구려의 국혼(國魂)을 이은 대발해(大渤海)의 왕통(王統)을 승계하고, 아래로는 몽고제국의 시황(始皇) 칭기즈칸과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에게까지 혈맥(血脈)이 이어졌다. 필자는 <집사>와 <사국사>를 비롯해 동서고문헌을 넘나들며, 중원과 고토(古土)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파헤친다. 과연 그 옛날 세계제국 몽고의 비밀은 밝혀질 것인가? 허황한 대국론(大國論)이 횡행하고 동북공정의 마수(魔手)가 암약하는 오늘날, 북방비사(北方祕史)를 추적한 이론(異論) 속으로 역사기행을 떠나보자.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금행-황금항아리’의 외증손자 #몽골 역사서 <집사>와 <사국사> 및 여러 동서고문헌으로 추정

지난 6월호에서 우리는 <집사>와 <사국사>의 기록을 통해 칭기즈칸과 몽골족의 선조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러면서 최근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만난 자리에서, 북핵 제거문제와 관하여 중국 측의 협조를 요청하는 트럼프의 말에 불협화음을 내면서 시진핑이 한 말에 대해 논평했다.

당시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지나의 일부이므로 남북한 문제에서 손을 떼라’는 투의 발언을 하면서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be part of China)”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진핑의 말과 역사적 진실은 정반대다. 지금까지의 연재에서 살펴본 것처럼 청·명·원의 역사만 돌아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포함한 칭기즈칸 세계제국의 뿌리가 왜 우리 민족에 있는지 못 다한 이야기를 해보자.

<집사>와 <사국사>의 기록에 따르면 몽골의 일한(Il Han) 시대에 ‘몽골(몰골/말갈)과 타타르 종족 간의 대전쟁’이라 부르는 큰 전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던 몽골군이 참패하여 오직 ‘키얀(Kiyan)’과 ‘니쿠즈(Nikuz)’라는 남자 두 명과 그 둘의 아내, 시종 몇 명만이 살아남았다.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가나 쿤’이라는 골짜기로 숨어들어갔다. 이 둘의 후손이 불어나 후에 몽골족과 칭기즈칸의 선조가 되었다. 일한의 아들 키얀의 후손은 몽골족 키야트(乞)씨로서 칭기즈칸의 선조가 되었다. 니쿠즈의 후손은 보통 몽골 종족인 다를라킨(都利行)씨와 원래는 몽골 종족이 아니었던 우량카트(吾良哈) 종족이 되는 등 몇 지파로 나뉘었다고 한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왕건의 초상. 필자는 왕건이발해의 후손‘금행-황금항아리’외증손자라는 이색주장을 제기한다. [사진캡처·위키피디아]

고려를 개국한 태조왕건의 초상. 필자는 왕건이발해의 후손‘금행-황금항아리’외증손자라는 이색주장을 제기한다. [사진캡처·위키피디아]

키얀은 발해 반안군왕, 또는 진국왕 대야발의 차남 ‘일하’, 즉 일한의 아들인 ‘걸간’이었다. 키얀은 칭기즈칸의 직계선조다. 그들은 발해 제2대왕 무왕 대 무예 시절의 인물들이다. <집사>와 <사국사>가 전하는 그 전설적인 전쟁은, 당나라 현종이 새로이 태어난 제2의 고구려·발해를 와해시키기 위해 흑수말갈을 분리시키려는 획책을 한 것에 대한 대무예의 항의와, 그 항의에도 불구하고 현종이 발해가 소국이라고 얕본 결과 일어난 전쟁이었다. 마치 지난해 12월 천하이(陳海) 중국 외교부국장이 방한했을 때, 한국의 사드배치에 관련하여 중지를 요구하며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에 대항해서 되겠느냐”고 한 태도와 같다.

칭기즈칸은 발해 제2왕가 시조 ‘대야발의 후손(後孫)’ 

몽골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에 세워진 칭기즈칸의 대형 동상. 필자는 세계제국 몽고의 창업자가 발해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사진·중앙포토]

몽골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에 세워진 칭기즈칸의 대형 동상. 필자는 세계제국 몽고의 창업자가 발해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사진·중앙포토]

이런 역사 속에서 본 ‘일한’과 ‘키얀’, 그 일행인 ‘니쿠즈’의 후손인 다를리칸씨 등에 대해 부분적으로 기록한 <구당서>와 <대씨대동보>와 페르시아어로 집필된 <집사>와 <사국사> 그리고 중세 투르크어로 기록된 <투르크의 계보> 등에 완벽히 기록된 족보를 종합해보면 칭기즈칸은 발해 제2왕가의 시조인 대야발의 제19대손이다.

칭기즈칸이 태어나기 앞서 전설적 시조인 키얀과 니쿠즈가 들어갔다는 ‘아르가나쿤’은 발해의 서경인 <요사> 속의 압록군, 곧 ‘압록강나군’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발해 제2왕가의 시조인 대야발이 칭기즈칸의 시조라면, 칭기즈칸은 어째서 우리 땅에서 태어나지 않고 오늘날 몽고라 불리는 땅에서 태어나 몽골인으로 알려지게 됐을까?

7세기 인물인 대야발과 12~13세기 인물인 칭기즈칸의 탄생시기, 우리 땅과 동북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보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즉 칭기즈칸의 선조 계보에 속한 인물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겪은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칭기즈칸의 계보를 적은 <집사>와 <사국사>에 따르면, 몽골종족은 역사의 어느 시기에 ‘아르가나쿤’에서 빠져나왔다고 한다. 단 몽골 종족이 그곳을 나오기에 앞서, 우선 그들 중 한 지파인 ‘키얀’의 후손이자 칭기즈칸의 선조 종족인 ‘콩그라트(Qungrat) 종족’이 먼저 그곳을 뛰쳐나왔다고 전한다. 그 종족의 수령은 ‘황금항아리(Bastu-i-jarrin)’라 불리는 인물로, 그의 영도 아래 한 무리의 몽골 종족이 아르가나쿤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이…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사람들에 앞서서 상의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는데, 창졸간에 다른 종족들의 노지(爐地)를 발로 밟았다고 한다. (…) 다른 몽골인들은 (콩그라트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고 하여 분개했고 그들과 적대했다.”

<집사> 등에 등장하는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 시조인 ‘황금항아리’는 과연 누구일까? 그는 칭기즈칸의 직계선조인 ‘코르라스’ 지파를 포함하여 ‘콩그라트’와 ‘예기라스’ 등 3개 지파의 공동 선조다. <집사> 등에 따르면 ‘황금항아리’에게는 장남 ‘추를룩 메르겐’, 차남 ‘쿠바이 시레’, 삼남 ‘투스부다’가 있었다. 그리고 그 셋의 후손은 훗날 콩그라트 종족, 예키라스 종족, 코르라스 종족이 되었다. 칭기즈칸은 이 중 삼남 ‘투스부다’의 후손 가문인 코르라스 종족의 후손이다. 칭기즈칸의 아내인 부르테 우진(부여 대씨 부인)은 장남 추를룩 메르겐의 후손인 콩그라트 종족 출신이다. 차남 쿠바이 시레의 후손인 예키라스 종족은 훗날 ‘알탄칸(金王)’ 즉 금나라 왕가가 된다.

콩그라트 종족 3지파는 분명히 우리 종족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에서 예키라스 지파인 금나라 왕가의 완안(完顔) 아골타(阿骨打)의 가문을 ‘삼한(三韓)의 종족 야크라씨(役拏氏)’라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또한 청나라 황제의 칙명을 내려 쓴 <황조통지>에는 몽골 코르라스 종족을 ‘고려나씨(高麗那氏)’라 기록했기 때문이다. ‘고려(高麗)’가 오늘날 우리 코레아(Korea)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콩그라트씨는 우리 사서에 ‘환어라씨(驩於羅氏)’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황금항아리’, 곧 한자로 ‘금관(金罐)’, 이두로 ‘금 칸’이 되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집사>는 그를 ‘군주와 같은 존재’라고 기록했다. 그에 관해 타타르 종족 사서인 <칭기스의 서>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으로 적었다. 이 ‘황금의 칸’이 누구인지 동서방 사서와 우리 역사를 통해 추적해보면, 그는 놀랍게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금행(金幸)’, 곧 고려식 이두로 ‘황금의 칸’이다. 이 이름은 <칭기스의 서>에 기록된 ‘알툰 칸(Altun Han)’ 족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의 아들로 <금사>에 기록된 함보(函普)가 바로 후일 금(金)나라를 여는 아골타(阿骨打)의 조상이다. ‘금(金)’은 누구나 아는 ‘황금’이고, ‘행(幸)’은 전에 다루었던 도리행의 경우에서 살펴보았듯이 옛 한자음이 ‘캉’, 즉 ‘칸(汗=Khan, Qaan, 군주)’이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황금의 칸’의 계보다. 19세기 초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계 콩그라트 왕조의 역사책 <행운의 정원(Firdaus al lqbal)>은 ‘황금의 칸’, 곧 알툰 칸을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손자’로 기록한다. 즉 ‘금행’은 발해 대야발의 손자인 키얀의 손자인 셈이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6월호에서 본 그 가문의 계보를 참고해보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4세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황금항아리’의 자손인 ‘삼지파(三支派)’는 우리 종족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금행(今幸)’ 혹은 ‘금행(金幸)’이라고 기록된 인물에겐 3명의 아들이 있었다. <금사(金史)>의 ‘권일본기제일세기(卷一本紀第一世紀)’에 따르면 큰 형 아고래(阿古迺), 둘째 함보(函普), 그리고 막내 보활리(保活里) 이렇게 3형제다.

결국 <집사> 와 <사국사>가 페르시아어로 기록한 ‘황금의 칸’의 3아들 추를룩 메르겐, 쿠바이 시레, 투스부다는 <금사(金史)>의 아고래(阿古迺), 함보(函普), 보활리(保活里)라는 말이다. 얼핏 보면 두 사서에서 나오는 이 두 부류의 이름들은 서로 달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그룹의 이름 뜻을 생각해보면 아래의 도표와 같이 합치한다고 볼 수 있다.

한자 ‘阿古迺’는 ‘아고래’라고 읽는다. 그러나 원(元) 말 메르키드(말갈) 족 출신의 사편찬 총재 ‘탈탈(脫脫)’이 <금사(金史)>를 쓸 당시의 발음은 ‘카고라이’, 곧 오늘날의 ‘고구려’[지나어 ‘까오구리’, 일본어 ‘코고라이’]이다. 이는 표음 문자인 페르시아어 및 투르크어 사서 <집사> 등에서는 ‘콩그라-트’, 곧 ‘큰고려(고구려)-씨’ 지파 성씨로 적혔다. [원말 메르키드(말갈) 족은 곧 발해 제15대 마지막 왕 대인선의 가문이고, 그 집안 출신이었던 몽골식 이름 ‘탈탈(脫脫, 타타르=대대로)’의 우리 식 성명은 ‘대용(大用)’인데, 곧 그는 “대(大)씨 집안의 이름 용(用)”이다. 그런 점에서 <금사(金史)>는 “중국사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쓴 사서다.]

<투르크의 계보>에 따르면 아고래(阿古迺), 즉 ‘추를룩 메르겐’에게는 ‘콩그라트(큰고려=고구려)’라고 불리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의 이름을 따서 그 후손의 지파는 협의의 “콩그라트”씨라고 한 것이다.

몽골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에 세워진 칭기즈칸의 대형 동상. 필자는 세계제국 몽고의 창업자가 발해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사진·중앙포토]

몽골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에 세워진 칭기즈칸의 대형 동상. 필자는 세계제국 몽고의 창업자가 발해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사진·중앙포토]

아고래(阿古迺)의 후손이 고유한 의미에서는 독자적으로 ‘콩그라트(고구려씨)’로 불렸지만, 그의 두 아우인 함보(函普)와 보활리(保活里)의 후손 지파인 ‘예키라스(역라씨)’와 ‘코르라스(고려나씨)’도 넓은 의미에서 ‘콩그라-트’로 불렸다.

<집사>도 이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달리 말해 <고려사> ‘금행(金幸)’의 세 아들의 후손은 모두 합쳐서 “콩그라트” 씨고 좁은 의미에서는 그의 큰 아들 아고래(阿古迺)의 후손을 이 이름으로 불렀다. 다만 그 두 아우의 후손을 별도로 부를 경우 그 둘을 특히 ‘예키라스’와 ‘코르라스’ 씨라고도 나누어 부르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이중 ‘코르라스’ 가문이 칭기즈칸의 선조 가문이다.

또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따르면 함보(函普)가 갔다는 그 ‘완안부(完顏部) 복간수(僕幹水)’는 우리 땅 함북 ‘길주(吉州) 이북’이고, 보활리(保活里)가 갔다는 ‘야래(耶懶)’는 오늘날 함남 함흥이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의 직계 선조인 보활리(保活里) 형제는 태생으로도 분명히 우리 땅 사람이다.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집사>에 따르면, 키얀 일행이 ‘아르가나쿤’으로 들어간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자손들이 불어나 여러 지파가 생겼는데, 그 어느 때 그중의 한 지파인 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몽골종족 지파와 사전 상의도 없이 급작스레 그곳을 뛰쳐나와 대장정을 했다. 왜 아르가나쿤을 빠져나왔으며, 그것은 대체 무슨 일이었던가? 그 이유는 두 가지다.

그중 하나는 금행이 발해 제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와 족보에 따르면 8촌 형제, 또는 <구당서> 등에 따르면 9촌 조카 관계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금행이 자기 직계의 8촌 형제 또는 9촌 조카의 대 신라 남진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자신의 아들 3형제와 ‘발해서경 압록강나군’을 뛰쳐나와 “타타르와 몽골 종족의 대전쟁” 때 잃어버린 남쪽 주군들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新羅)를 쳤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금행의 가문과 그 일행은 북쪽의 압록강나군에서 남하하여 오늘날 황해도 평산인 평주(平州)와 개성, 한강 유역까지 되찾았다. 그 덕택에 발해 제10대왕이자 대야발 가문에서 첫 왕-곧 발해 제2왕조의 첫 임금이 된 선왕(宣王) 대인수의 발해는 <구당서> 및 그 외 사서들이 말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선왕(宣王)과 콩그라트족이 이룩한 ‘해동성국의 광영’

적군과 혈투를 벌이는 몽고 기병들. 몽고제국의 시황(始皇) 칭기즈칸은 당대 유라시아 대륙을 평정하며 세계를 제패했다. [사진캡처·위키피디아]

적군과 혈투를 벌이는 몽고 기병들. 몽고제국의 시황(始皇) 칭기즈칸은 당대 유라시아 대륙을 평정하며 세계를 제패했다. [사진캡처·위키피디아]

앞서 본 <집사>의 이야기는 콩그라트 종족이 선왕의 이러한 실지회복 작전을 밀지(密旨)로 통보받고 이에 적극 동조하여 “[도리행 종족 등] 다른 사람[말갈 종족]들에 앞서서 상의도 하지 않고 밖으로 창졸간에 [곧 급작스레] [전쟁준비를 위해] 다른 종족들의 노지(爐地)[곧 무기와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 땅]를 발로[짓] 밟[고] [여기 저기서 널린 무기를 거두어 전투 채비를 갖추고]”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다.

곧 그들은 <요사>에 기록된 ‘발해서경 압록군’, 곧 오늘날 평안북도와 함경북도를 중심으로 백두산을 끼고 길림골(길림성)을 포함하는 그 땅을 뛰쳐나와 그의 선조인 일하(壹夏,일 한)와 간(澗, 곧 키얀) 시대에 발해-당-신라 전쟁에서 잃어버린 발해의 남쪽 주군을 되찾기 위해 일어서서 그 일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외의 고구려 시대의 변경 마을이던 말갈칠부(靺鞨七部)도 회복하여, 마침내 해동성국이라는 이름을 얻게된 것이다.

금행은 ‘아르가나쿤’, 곧 발해 ‘압록강나군’에서 뛰쳐나와 신라에 대한 영토 수복에 성공했다. 이에 그는 <집사>에서 콩그라트 시조 ‘황금항아리’, 곧 <칭기스의 서> ‘황금의 칸’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는 왕건(王建)의 외증조부로서 ‘서해용왕(西海龍王)’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되찾은 땅의 중심인 평주(平州)를 다스렸다. 이는 곧 ‘발해-고려군왕(渤海-高麗郡王)’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집사>는 ‘황금항아리’, ‘금행(金幸)’을 두고 ‘군주(임금)와 같은 존재’라고 했던 것이다. 발해 다음 가는 지방군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쪽에서 바라본 압록강. ‘금행-황금항아리’는 발해의 ‘압록강나군’, 즉 ‘아르가나쿤’에서 뛰쳐나와 신라에 대한 실지 수복에 성공했다. [사진·중앙포토]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쪽에서 바라본 압록강. ‘금행-황금항아리’는 발해의 ‘압록강나군’, 즉 ‘아르가나쿤’에서 뛰쳐나와 신라에 대한 실지 수복에 성공했다. [사진·중앙포토]

바로 이 업적을 이룬 ‘금행(金幸)’, 즉 ‘황금의 칸’은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의 장인으로 ‘서해용왕[西海龍王]’으로 기록된 인물이다. 그 뜻은 곧 발해(渤海=서해)-고려(용=고렝이=高麗) 군왕(郡王)이다. 그의 딸인 용녀(龍女, 고렝이 기집=고려여인)가 왕건의 할머니다.

왕건을 기준으로 하면 ‘금행(金幸)’은 왕건의 외증조부다. ‘신라 개성호족’으로 잘못 알려진 왕건이 국호를 ‘고려(高麗)’로 택한 이유는 그가 바로 ‘발해-고려의 왕’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신라에 대한 영토 수복의 기쁨은 한 세대를 가지 못했다. ‘황금의 칸’, ‘금행(金幸)’, 곧 서해용왕(西海龍王)의 아들 3형제 시대에 발해는 안팎으로 어려움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금사>에 따르면 완안부(完顔部), 곧 조션(女眞) 시기(926~1115년) 이전의 발해(渤海) 시기(698~926년)의 반안군(盤安郡)에서는 두 종족 간에 다툼이 일어나 싸우는 일이 발생했고, ‘금행(金幸)’, 곧 서해용왕이 회복하여 그 아들 대까지 통치하였던 발해 남쪽 주군도 다시금 신라에게서 뺏고 빼앗기는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 ‘해동지도’에 나와 있는 압록강 상류의 사군 지도. 당시 세종은 ‘조종의 강역은 양보할 수 없다’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었다. 발해와 신라가 대치를 하던 이른바 &#39;남북국시대’에서도 압록강 일대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격전지였다. [사진·중앙포토]

조선 후기 ‘해동지도’에 나와 있는 압록강 상류의 사군 지도. 당시 세종은 ‘조종의 강역은 양보할 수 없다’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었다. 발해와 신라가 대치를 하던 이른바 &#39;남북국시대’에서도 압록강 일대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격전지였다. [사진·중앙포토]

이 사실은 우리 역사학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915년에 정식으로 선포되어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킨 요(遼)나라는 200 몇십 년간 대륙의 태반을 지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7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발해 반안군(盤安郡)’이라는 말은 1126년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백성과 땅을 접수한 금(金)나라 때에도 기록되지 못했으며, 14세기 원말 조션(女眞) 시기에 쓰던 지명을 적은 ‘완안군(完顔部)’이라는 형태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지명의 역사에서 다시 정치사로 돌아가자. 바로 그 ‘완안군(完顔部)’, 곧 사실은 ‘발해(渤海) 반안군(盤安郡)’에서 일어난 내분 때문에 앞서 인용한 <금사> <본기 세기>의 이야기처럼, ‘금행(金幸)’의 세 아들 중 장남 아고래(阿古迺)는 발해의 남쪽 땅인 평주(평산)에 남고, 그 아우 둘째 함보(函普), 그리고 막내 보활리(保活里) 2형제는 발해(渤海) 시대의 복간수(오늘날 함북 길주)와 야래(함남 함흥)로 그 두 종족간의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떠나갔다. 그 내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함보와 보활리는 각 지역의 지방장관이 되었다.

그 후 약 두 세대 간 북쪽의 발해, 남쪽의 신라가 대치하면서도 안정된 형세를 유지했다. 이른바 ‘남북국시대’다. 발해에서 내란이 수습된 지 2세대가 될 즈음, 이번에는 골품제도가 변질되고 과거 고구려와 백제 백성에 대해 차별을 일삼던 신라 내부에서 대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KBS 대하사극 <태조왕건>에서 왕건 역을 맡은 배우 최수종(왼쪽)과 궁예 역을 맡은 김영철 씨. ‘후(後)고구려정권’을 수립한 궁예는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폭군으로 변한다. 궁예의 학정을 타도하고자 왕건은 심복 신숭겸 등을 동원해 918년 궁정혁명을 일으키고 고려왕조를 개국했다. [사진·중앙포토]

KBS 대하사극 <태조왕건>에서 왕건 역을 맡은 배우 최수종(왼쪽)과 궁예 역을 맡은 김영철 씨. ‘후(後)고구려정권’을 수립한 궁예는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폭군으로 변한다. 궁예의 학정을 타도하고자 왕건은 심복 신숭겸 등을 동원해 918년 궁정혁명을 일으키고 고려왕조를 개국했다. [사진·중앙포토]

원래 고구려 보장왕(이름 ‘高藏’)의 아들로 신라에 귀부한 보덕국왕(報德國王) 안승(安勝)의 후손인 궁파(弓巴) 장보고(張保皐)의 딸 궁씨녀(弓氏女)에게서 아들로 태어난 궁예(弓裔)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대란이 일어났다.

그의 이러한 계보는 몽골어 사서 <알탄톱치(황금사강)>에 비밀코드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설명은 생략한다. 이러한 배경의 계보를 지닌 궁예의 모계 궁씨녀의 선조는 고구려 보장왕임에도 불구하고 궁예 자신은 남국 신라왕을 아버지로 둔 인물이었다.

그는 신라 조정이 자신을 포함한 고구려계 인사에 대한 차별 때문에 갓난아기 시절에 죽임을 당할 뻔하다 다행히 죽지는 않고 애꾸눈이 된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불만을 품고 신라에 대한 혁명을 일으킨다. 그는 자기 부왕의 나라를 ‘멸도(망할 놈의 나라)’라 부르고, 자기 부왕의 초상화를 칼로 자르고는 강원도 철원 땅에서 모계의 계보를 따라 나라 이름을 ‘[후(後)]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칭했다.

바로 이때였다. 앞서 반안군(=완안부) 복간수(함북 길주)로 떠났던 함보(函普)와 야래(함남 함흥)로 갔던 그의 아우 보활리(保活里) 각각의 손자인 ‘칼지다이’와 ‘바르가 바아타르’도 이 기회에 남하하여 [후(後)] 고구려의 왕, 궁예의 정권에 참여했다.

그들은 함보(函普)와 보활리(保活里)의 아버지인 ‘금행(金幸)’의 증손자들에 해당한다. 이 중 한 명은 우즈베키스탄 ‘콩그라트 왕조’ 공식 역사서인 <행운의 정원>에 ‘칼지다이 칸(Qaljiday Khan)’으로 기록되었고, <고려사(高麗史)>에는 아지태(阿之泰)로 기록되었다. 이 ‘아지태(阿之泰)’의 당시 소리는 ‘카지타이(커씨씨=乞氏씨족)’로 우리말로는 ‘칼지다이(클씨씨족=대씨씨족) 칸(족장)’과 같다.

태조왕건(太祖王建)은 ‘황금 칸-금행’의 외증손자

또 하나의 인물인 ‘금행(金幸)’의 아들 보활리(保活里)의 손자는 부랴트 구비역사서 <부랴트 역사의 글(Buryaaday Tuukhe besheguud) 제2권>에 ‘바르가 바아타르(Barga Baatar)’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말로 ‘발해 막하돌(莫賀咄)’, 곧 ‘발해 말갈 추장’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인물이고, <집사>에서는 ‘미샤르 울룩’-[보활리의 손자]이다. 바로 이 인물도 자기 집안의 종형제 ‘칼지다이(칸)’와 함께 궁예의 [후(後)] 고구려(高句麗) 정권에 참여하였다.

‘황금의 칸’ ‘금행(金幸)’의 증손들인 이 두 인물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또 하나의 인물이 있다. 바로 ‘금행(金幸)’ 외증손자 왕건(王建)이다. 왕건(王建)은 ‘금행(金幸)’의 외증손자이자, 자기 아버지인 용건(龍建)의 천거로 궁예의 정권에 참여하여 ‘칼지다이 칸(Qaljiday Khan)’, 즉 <고려사(高麗史)>의 아지태(阿之泰)와 종형제 ‘바르가 바아타르(Barga Baatar)’와 함께 궁예의 정권에 봉사하고 있었다.

외화(外畫) <징기즈칸>의 한 장면. 당대 세계의 대륙을 정복했던 몽고 기마군들이 위용과 기상을 자랑하며 진격 중이다. 필자는 지금껏 이민족의 역사로만 여겨졌던 몽고의 비사(秘史)에 우리 조상 대발해 왕가(王家)의 혈맥이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사진·중앙포토]

외화(外畫) <징기즈칸>의 한 장면. 당대 세계의 대륙을 정복했던 몽고 기마군들이 위용과 기상을 자랑하며 진격 중이다. 필자는 지금껏 이민족의 역사로만 여겨졌던 몽고의 비사(秘史)에 우리 조상 대발해 왕가(王家)의 혈맥이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사진·중앙포토]

단, 초기의 반(反)신라 혁명에 성공한 궁예는 십수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른바 학정을 하면서 국명도 마진(摩震)-태봉(泰封)으로 개칭하였다. 나아가 왕건의 외가 출신으로 궁예 자신의 정부인인 강씨 부인과 그녀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 청광과 신광도 죽였다. 그러자, 이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왕건은 주군 궁예를 제거하기 위해 심복 신숭겸 등을 동원하여 918년 궁예에 대해 궁정혁명을 일으키고 그를 죽였다. 그는 나아가 마진-태봉으로 바뀐 후(後) ‘고구려(高句麗)’의 이름을 원래의 고구려를 말하는 ‘고려(高麗)’로 되돌려 놓는다. 그가 “고려 태조 왕건”이다.

이때 자신의 주군인 궁예(弓裔) 편에 서서 싸운, 그러면서도 왕건에게는 외왕고종 형제들인 아지태 곧 <행운의 정원>에 기록된 [아고래의 손자] ‘칼지다이(Qaljiday)’와 [보활리의 손자] ‘바르가 바아타르’는 결국 왕건과는 반대편에서 싸
웠다.

그러나 궁예가 왕건의 휘하 신숭겸 등의 무리에 의해 쫓기다가 결국 백성에게 잡혀 죽자, 두 사람은 궁예의 시신을 안고 궁예가 신임했던 한 무리의 승려들 속에 끼어 북쪽 발해로 향했다. 당시의 발해 남경 용원부의 남쪽 고을인 등주(登州), 곧 오늘날 함남 안변에 궁예의 시신을 묻고 발해의 북쪽 지방으로 떠나간 것이다.

이 일행 중의 하나였던 발해 막하돌(莫賀咄), 곧 부랴트-몽골 방언으로 “바르가(발해) 바아타르(막하돌)”이라고 기록된 보활리의 손자에 관해 <부랴트 역사의 글(Buryaaday Tuukhe besheguud) 제2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르가 바아타르(Barga baatar)는 카라 호수(Khara dalay, *고려 바다=발해=서해)의 기슭에 있었다. 그곳에서 커다란 전쟁[*왕건과 궁예 사이의 궁정혁명]이 벌어졌다. 그 곳에 토고온 투메르(관칭 ‘서해용왕’, 실명 ‘두은점 각간’, 곧 왕건의 외증조부이자, 바르가 바아타르의 증조부) 카안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때 거기서 빠져 나왔다. 바르가 바아타르는 그 전쟁에서 자기의 세 아들을 데리고 아내와 딸과 함께 도망쳐 나왔다. 모든 물건, 가축도 그곳에 버려두고 빠져나왔다. 그곳에 정변이 나서 큰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이 원정에서 가고 있던 사람들은 토고온 투메르 카안의 황금자리를 카라 호숫가에 두고 떠났다고 한다.”

세계제국에 흐르는 대발해 왕가의 혈맥(血脈)

이 ‘토고온 투메르 카안’은 바로 <고려사(高麗史)>의 서문격인 <고려세계(高麗世系)>가 ‘발해-고려왕’이라는 뜻을 가진 직관 칭호인 “서해용왕(西海龍王)”이자 달리 “금행”의 실명 ‘두은점 각간(豆恩店 角干)’이다. 왕건의 외증조부인 것이다. 곧 <집사>의 ‘황금항아리’이자, <칭기스의 서>의 ‘알툰 칸(황금의 칸)’이다.

궁예와 왕건 사이의 이 전쟁 때문에 그 서해용왕(西海龍王) ‘두은점 각간’의 증손자 ‘바르가 바아타르(Barga baatar)’, 곧 우리말로 “발해(渤海) 막하돌(莫賀咄)”[발해-말갈군왕]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

“카안[궁예]의 막내아들 부르테-쇼노(Bu’rte-Shono)를 데리고 가서 여러 가람을 건너고 여러 산고개를 넘어서 마침내 바이갈(바이칼 호수, *곧 ‘부여-고려’호)이라는 호수 앞 들에 머물렀다. 거기에 처음부터 살던 베데(bede, 곧 한문사서의 발해-말갈인)라는 백성들과 만났다.”

이 ‘바르가 바아타르’는 <코리-부랴트 11선조의 뿌리에 관한 족보 이야기> 속에서는 ‘바르가 바아타르 타이상 노욘(Barga baatar Taisan noyon)’으로도 기록되었다. 이는 우리 발해(渤海)-(후) 고구려(高句麗) 관칭으로 ‘발해(渤海) 막하돌(莫賀咄) 대상랑(大相郞)’이라는 말의 부랴트-몽골어 음변이다.

‘바르가 바아타르’는 그곳에 살면서 그 후 ‘세 아들’을 낳았다. 이 세 아들은 각각 에히레드 부랴트(약라[고구려]씨 부려씨), 볼라가드 부랴트(부여[강원도 부양] 부여씨), 그리고 코리-부랴트(고려-부여씨)의 선조가 된다. 그 가운데 코리-부랴트(고려-부여씨)의 시조가 된 막내 ‘코리 메르겐(*고려-말갈)’은 1240년경 완성된 <몽골비사>에 따르면 그 지역의 군장인 바르구다이 메르겐(발해씨 말갈)의 딸 ‘바르가잔 고아(발해진 걸가)’와 혼인하였다. 이 여인에게서 난 외동딸이 ‘모든 몽골인의 전설적인 어머니’라는 ‘알란 고아(Alan-Goa)’다. 이 전설적인 ‘알란 고아’가 바로 칭기즈칸의 10대 조모다. <코리-부랴트 11선조의 뿌리에 관한 족보 이야기>는 바로 이 전설적인 여인의 10대 후손이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칭기즈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 세계정복자 몽골(몰골/말갈)인 ‘테무진(대무신)’, ‘칭기즈칸(진국왕)’은 분명히 우리 서울을 남북으로 가르는 한강(漢江) 이북, 곧 강북지방부터 시작되었던 고구려 영토를 이어 받은 발해의 왕족 출신이다. 이 땅을 떠난 이 가문은, 이 땅 밖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유라시아 대륙 및 아랍반도에 세계제국을 세웠다.

그렇다면 시진핑 주석이 말한 바 ‘코레아는 중국의 일부였다’는 주장과는 거꾸로, 이른바 ‘중국’이 사실은 세계제국을 건설한 우리 고구려·말갈·몽골제국 4칸국 중의 한 칸국이었던, 원나라의 식민지였다는 게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전원철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체첸전쟁 때 전장에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했다. 우리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세계정복자 칭기즈칸의 뿌리가 한민족에 있음을 밝힌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몽골 제국의 기원> 1, 2권을 출간했고,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다수의 역사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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