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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만에 은퇴하는 고리원전의 독백 “경제성장시대 애국자로 태어나 천덕꾸러기로 물러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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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원전 1호기 전경모습.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전 1호기 전경모습.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내 이름은 19일 0시면 전기 생산을 중단하는 고리원전 1호기입니다. 2년 전 시한부 인생 통보를 받고 임종을 준비해왔지만, 막상 안락사를 앞두니 지난 40년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갑니다.

오는 19일 0시 안락사 하는 고리원전 1호의 40년 인생기 #1970년대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한강의 기적 일궈 애국자로 등극 #2007년 10년 수명연장으로 제2인생…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천덕꾸러기 전락

 지금은 천덕꾸러기 취급 당하고 안락사를 앞둔 처지이지만 제가 처음에는 애지중지 사랑받았습니다. 경제성장을 이끌 미래 에너지원으로 각광받았죠.
 나는 정확히 1977년 6월 19일 오후 5시 40분 경남 양산(현재 부산 기장군)에서 태어났어요. 국내에서 유일했고 아시아에서 일본·파키스탄·인도 다음이었고, 세계적으로 21번째로 태어날 만큼 '신인류'였습니다.

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건 미국 에디슨전력회사 시슬러 사장이 할아버지(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우라늄 1g이 석탄 3t의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해준 덕분이죠. 할아버지는 1959년 대통령직속 원자력원이 발족하고 같은해 서울대에 원자핵공학과를 설립했죠.

그래도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큰 결단이 없었으면 나는 이 땅에 태어나지 못할 뻔 했어요. 1971년 착공 당시 대한민국의 총생산액(3조1200억원)의 5%에 달하는 1560억원을 투입해야했고, 지역 주민들의 반대도 심했거든요. 나 때문에 그린벨트로 묶여 개발이 제한되고 바닷물 온도 상승으로 물고기를 더 잡을 수 없게 됐다며 연일 반대 시위를 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산통을 겪은 셈이죠.

고리원전 1호기 설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가고 있다.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전 1호기 설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가고 있다.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세계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간 1973년 석유파동은 나에게 호재로 작용했습니다. 값싸게 전력을 생산하는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거든요.

그래서 외국에서 675억원을 빌리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수십 억원을 보상한 뒤에야 연간 58만7000kW의 전력을 생산하는 미래 에너지원이 됐습니다.

1978년 기준 전체 발전설비용량 659만kW의 9%를 나 혼자 감당했으니 말 그대로 우량아였죠.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난해 태어난 신고리 3호기 동생과 비교하면 나의 체구는 절반밖에 안 돼요. 당시 우리나라에 돈이 없어서 더 크게 키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제작된 고리원전 1호기를 하역하는 모습.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미국에서 제작된 고리원전 1호기를 하역하는 모습.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나의 국적은 대한민국이지만 사실 따져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제랍니다. 한국으로 귀화한 미국인인 셈이죠.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라는 원자로 제조 기업이 설계·부품구매·품질보증까지 맡았어요. 한국은 운전용 키만 전달받은 셈이죠.

나를 다룰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 거의 없어서 미국인 보모가 와서 나를 돌봤다고 하네요. 한국 상황과 잘 맞지 않아 어렸을 때 잔병치레가 잦았어요.

40년동안 131번 아팠는데 유년기 10년 동안 79번 아파서 일을 못했다고 합니다. 엎친데덮친격으로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에서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터지고,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로 붕괴 사고가 발생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걱정이 대단했어요. 저러다 나 뿐만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 다 죽는다며 환경단체 사람들이 나를 지목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놈”이라며 손가락질 했죠.

고리원전 1호기 준공 당시 주제어실 모습.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전 1호기 준공 당시 주제어실 모습.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그러나 나 없이 폭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1970년 중반 중화학공업이 부흥하면서 나의 가치는 오히려 더 올라갔죠. 1978년 당시 kw당 발전단가가 9.21원/kwh로 화력발전단가 16원보다 42% 저렴해 연간 210억원을 이득 봤거든요. 요즘 말로 가성비가 뛰어났어요. 내가 있어서 1979년 2차 오일쇼크를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자 나를 애국자라고 칭송했어요.

나 덕분에 국내 원전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습니다. 고리 2호기, 월성 2호기 동생들은 미국 기술로 태어났지만 1985년 완공한 고리 3호기부터는 국내 기술진이 8.5% 포함됐죠. 원전기술의 국산화가 이뤄지면서 2009년에는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기술을 수출하는 원전기술 보유국이 됐습니다.

내가 잔병치레를 자주해 치료 기술과 관리 능력이 날로 발전하면서 동생들은 고생을 덜 했죠. 내가 1년 동안 한번도 아프지 않고 일을 하는 ‘한주기 무고장 안전운전’ 기록을 태어난 지 19년만인 1996년에 달성했는데 반면 고리2호기는 태어난 지 7년만인 1990년에 달성했습니다.

내 수명은 당초 2007년 6월 19일 0시로 예정돼 있었어요. 30살을 1년 앞둔 2006년, 나는 수명연장의 꿈을 위해 장기이식을 감행했어요. 심장 격인 원자로건물과 피부 격인 외벽만 남겨두고 장기 일체를 이식 받았어요.

지난해 태어난 신고리 3호기와 똑같은 첨단 기술이 적용된 장기입니다. 이런 고생을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인정해줬고 2007년 7월 10년 더 살아보자는 기쁜 소식을 건네받았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부산 기장군 길천·월내마을과 인근 주민 3000여명에게 1610억원의 보상금도 지급했습니다.

제2의 인생이 시작된거죠. 몸관리를 더 철저히 했더니 지금까지 딱 6번밖에 아프지 않았어요. 미국에서는 나와 똑같은 친구들이 60년 살 수 있도록 나라가 허가해줘서 나도 잘만하면 환갑인 2037년까지 살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고리원전 1호기 현재 주제어실 모습.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전 1호기 현재 주제어실 모습.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그러나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나의 운명을 바꿔버렸습니다. 8.0으로 내진설계가 된 일본 원전이 쓰나미 위력에 무릎꿇고 방사능을 방출하자 6.5로 내진설계된 나를 보는 눈이 싸늘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체력 다지기에 나섰습니다.

400억원을 들여 해안방벽을 7.5m에서 10m로 높이고, 방수문을 설치하고, 정전이 되더라도 수소를 제거해 원자로가 폭발하지 않도록 하는 설비시설도 갖췄습니다. 하지만 허사였습니다. 원전부품 비리가 터지면서 저는 더이상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천덕꾸러기가 됐습니다.

나에게 10년의 수명연장이라는 꿈을 안겨준 원자력안전위원회는 2015년 7월 2년 뒤 안락사시키겠다고 최종 통보했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자 나와 40년 가까이 일해온 기술자들은 허탈감과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안락사를 당하는 나의 처지가 불쌍해 보였나 봅니다. 주변 주민들도 안락사 시킬 바에는 기부체납 해달라고 하는데 솔직히 실현 가능성은 없습니다. 지난해 경주 지진 사태로 나머지 24명의 원전 동생들도 수명 단축이 우려됩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장기기증’을 결심했습니다. 내 장기를 해체하다보면 폐로 기술의 국산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폐로 관련 기술 중 우리나라가 보유한 기술은 32개에 불과합니다. 2020년대 폐로에 들어가는 원전이 전세계적으로 183기에 이른다고 합니다. 폐로 1기당 1조원의 비용이 드니 폐로 산업은 200조원에 이릅니다. 폐로 기술 국산화에 성공한다면 나를 희생의 아이콘으로 기억해 줄까요. 여러분의 판단만 남았습니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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