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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대훈의 시시각각

소수의견은 죄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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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고대훈 논설위원

고대훈 논설위원

‘소수의견’은 다수의 주류에 밀려 쓸모없게 된 작은 목소리다. 7~8일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에서 소수의견은 그의 정체성을 묻는 키워드였다. 그는 “10~20년 뒤에 새 시대 상황에서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소수의견은 그에게 소신이자 신념이다.

논란 된 ‘김이수의 소신’ #생각의 다름은 존중해야

그의 소수의견은 어떤 모습인가. 김 후보자는 2014년과 2015년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사건, 전교조의 법외 노조 근거가 된 교원노조법 위헌 심판,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한 자’ 처벌)에 대한 위헌소원에서 재판관 9명 중 유일하게 소수의견을 냈다. 그 즈음 ‘Mr. 소수의견’ ‘8대 1 재판관’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정치적 편향성 논란도 여기서 비롯된다. 교원노조법과 국보법 사건에서 소수의견은 1쪽 분량에 불과해 성향을 파악하기엔 미흡하다. 반면 헌재 홈페이지에 실린 255쪽의 통진당 사건 결정문 중 127쪽에 달하는 장문의 소수의견에서 그의 법철학과 생각을 짚어볼 수 있다.

재판관 8명의 다수는 “통진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므로 해산의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이에 김 후보자는 통진당의 강령과 활동을 상세히 기술한 뒤 “바다는 작은 물줄기들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그 깊이를 더해 가는 법”이라며 포용성과 다양성을 강조한다. 이어 “이석기 일당의 발언 등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반되지만, 통진당의 강령은 그렇지 않다”며 기각을 주장한다. 통진당과 이석기를 동일시함으로써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다는 논리를 폈다.

이를 반박하는 안창호·조용호 재판관의 보충의견은 흥미롭다. 맹자의 피음사둔(詖淫邪遁, ‘번드르르한 말 속에서 본질을 간파한다’는 뜻)을 인용하며 “그들(통진당)의 가면과 참모습을 혼동하고 오도하는 광장의 중우(衆愚), 사이비 진보주의자, 인기영합 정치인 등과 같은, 레닌이 말하는 ‘쓸모 있는 바보들’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다수에 맞서는 소수, 이를 재반박하는 치열한 논쟁은 헌재가 왜 존재하고, 뭘 고민하는지 느끼게 한다. 김 후보자의 글을 읽어 보면 통진당에 우호적인 면은 있지만 불온한 ‘반(反)헌법적 소수주의자’라는 주장은 논리의 비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관점이 다를 뿐이다.

독선과 아집에 빠진 이단의 이미지도 허상에 가까울 수 있다. 2012년 9월 재판관에 임명된 그는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시킨 탄핵사건까지 4년 넘게 6000여 사건의 재판에 참여했다. 이 중 나홀로 소수의견을 낸 경우는 10건도 채 안 된다. ‘간통죄 위헌’ 등 대부분의 재판에서 다수의 편에 섰다.

소수의견의 전통은 미국이 원조다. 올리버 웬들 홈스(1841~1935)·윌리엄 더글러스(1898~1980) 연방대법관은 수백 건의 소수의견을 낸 인물로 유명하다. 홈스는 1919년 간첩법 사건에서 “사상의 자유로운 교환이 궁극의 선(善)에 도달하게 한다”며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고 유죄에 반대했다. 더글러스는 “반대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최대 강점”이라고 했다. 당시 소수이던 그들의 견해는 오늘날 미국 헌법 해석에 있어 주류가 됐고, ‘위대한 반대자(the great dissenter)’라고도 불린다.

박근혜 탄핵심판 때도 소수의견의 논란이 있었다. 헌재 관계자가 전한 말이다. “대통령의 파면에 한두 명은 내심 반대한 것으로 안다. 검찰의 수사기록을 보고 ‘이게 죄가 되느냐’고 반문한 재판관도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전원일치였다. 헌재가 한목소리를 냄으로써 그 결정과 권위에 힘을 실어 국론 분열을 끝내겠다는 정치적 판단이 컸다고 한다. 누군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라도 소수의 보수를 대변했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도덕적 결함이 있다면 헌재소장 임명을 재고함이 옳다. 그러나 생각의 다름을 문제 삼아 적격성 시비를 거는 데는 반대한다. 김 후보자가 문재인 정부에서도 소수의견을 내는 ‘위대한 반대자’의 가능성이 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돼야 한다.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