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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실세 위해 만든 자리가 '검사장들의 무덤'으로···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의 명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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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우병우 사단’으로 불렸던 검사장 4인이 사실상 '적폐 청산 인사'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윤갑근(52·사법연수원 19기) 대구고검장과 정점식(52·20기) 대검 공안부장, 김진모(51·19기) 서울남부지검장, 전현준(52·20기) 대구지검장이 지난 8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발령 나자 검찰은 당혹스러워했다.

검사장 4명 한꺼번에 연구위원 발령 전례 없어 #1986년 박철언 검사장 승진 위해 신설된 자리 #검찰총장 후보·예비 검사장들의 '정거장' 돼 #진경준 등 비위 연루된 검사장 조직 배제 용도로

지난 8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좌천 발령된 윤갑근 전 대구고검장. 그는 발령이 나자마자 사표를 냈다. [중앙포토]

지난 8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좌천 발령된 윤갑근 전 대구고검장. 그는 발령이 나자마자 사표를 냈다. [중앙포토]

현직 검사장 4명을 동시에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발령 낸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사 발표가 나자 곧바로 사표를 냈다. 윤 전 고검장은 “조직에 쓸모가 없다고 하면 가야지 별 수 있겠느냐”고도 했다. 검찰 조직에서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발언이다.

법무·검찰 공무원의 실무 교육기관인 법무연수원에는 모두 7명의 연구위원이 있다. 그 중 4개가 검사 몫이고 나머진 교정직 등 일반 고위공무원 몫이다. 직급은 ‘검사장급’으로 불리는 ‘대검찰청 검사급’이다. ‘대검찰청 검사급 이상 검사의 보직범위에 관한 규정’에는 검찰총장을 비롯해 총 52개의 검사장급 보직을 명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연구위원 4명이 포함돼있다.

규정만으로는 검사장들을 연구위원으로 발령 낸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평소 이 자리에 검사장보다 직급이 낮은 부장검사급을 보내기 때문이다. 검찰 내부에선 검사장 승진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로 관행화 되어 있기도 하다. 윤 전 고검장 등 4명이 연구위원으로 발령 나면서 자리를 내준 기존의 연구위원 검사들이 부장검사급(고검 검사)이었다.

‘5·6공 황태자’ 박철언 위해 신설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은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의 '산물'이었다.

1986년 11월 당시 권력 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을 검사장으로 승진시킨 뒤 마땅한 자리가 없자 전두환 정권은 법무연수원에 연구위원이란 검사장급 보직을 신설했다. 당시 인사 발령을 두고 위인설관(爲人設官) 논란이 일었다. 박 전 의원은 이름만 걸어놓았을 뿐 출근은 하지 않고 청와대를 오가며 현직 검사장이란 명예와 정권의 막후 실세로서 권력을 동시에 누렸다.

'5공 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왼쪽)은 1986년 검사장으로 승진된 뒤 그를 위해 신설된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막후에서 실권을 누렸다. [중앙포토]

'5공 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왼쪽)은 1986년 검사장으로 승진된 뒤 그를 위해 신설된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막후에서 실권을 누렸다. [중앙포토]

그 뒤에도 연구위원은 필요에 따라 검사장급 고위 검사가 잠시 거치는 자리로 활용됐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송광수 검찰총장 내정자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발령 냈다. 국회 인사청문회 준비를 위한 배려 차원에서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그 뒤로는 예비 검사장들의 승진 코스로 여겨졌다. 김병화 전 인천지검장은 2008년 3월 검사장 승진 직전까지 연구위원으로 근무했다. 김강욱 전 대전고검장도 2012년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다 검사장으로 승진해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검찰 관계자는 “연구위원은 딱히 업무가 주어진 자리가 아니어서 검사장에 오르기 전에 잠시 한숨 돌리도록 배려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는 송광수 전 검찰총장 후보를 지명한 뒤 인사청문회 준비를 위해 그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발령 냈다. [중앙포토]

노무현 정부는 송광수 전 검찰총장 후보를 지명한 뒤 인사청문회 준비를 위해 그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발령 냈다. [중앙포토]

2002년 ‘이용호 게이트’ 이후 ‘검사장들의 무덤’

하지만 이 자리가 늘 '꽃길을 걷는' 검사들만의 자리였던 건 아니다.

비위에 연루된 고위 검사들을 현업에서 손 떼게 하는 데 연구위원 인사만한 카드가 없었다. 2002년 김대중 정부의 대표적인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됐던 김대웅 전 광주고검장이 현직 검사장으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법무부는 그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보냈다. 김 전 고검장은 이듬해 3월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사표를 냈다.

이때부터 연구위원은 ‘검사장의 무덤’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검찰 관계자는 “지방으로 발령 내는 좌천성 인사와 연구위원 발령은 다르다. 연구위원 발령은 조직에서 배제한다는 뜻이 포함돼 있어 사실상 ‘나가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말했다.

넥슨의 비상장 주식을 뇌물로 받았다는 의혹 등을 받던 진경준 검사장은 수사가 시작되자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검찰 현업에서 배제됐다. [중앙포토]

넥슨의 비상장 주식을 뇌물로 받았다는 의혹 등을 받던 진경준 검사장은 수사가 시작되자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검찰 현업에서 배제됐다. [중앙포토]

2009년 5월에는 민유태 당시 전주지검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1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져 대검 중수부의 내사를 받게 되자 연구위원으로 사실상 ‘대기발령’ 됐다. 민 전 지검장 역시 연구위원으로 발령되자마자 곧바로 사표를 냈다. 지난해에는 넥슨 주식을 공짜로 받은 혐의로 피의자가 된 진경준 전 검사장이 연구위원으로 발령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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