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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들려면, 그 회사 ‘지급여력’부터 살펴보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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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2000년 5월 일본 손해보험업계 8위였던 다이이치(第一)화재보험이 도산했다. 일본 금융감독청(FSA) 영업정지 명령 당시 총 자산은 1조3870억엔(약 14조원). 오랜 저금리로 투자수익이 떨어져 800억엔(약 8200억원) 가량의 부채를 떠안고 자본잠식 상태가 된 게 원인이었다. 문제는 저축형 상품에 가입해 회사에 꾸준히 돈을 부어온 소비자들이 부담한 손해다. 도산한 보험사를 인수할 새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가입자들은 이듬해 4월부터 약속한 금액보다 10% 적은 보험금을 타가야 했다.

국제회계기준 도입 앞서 기준 강화 #보험 부채 고스란히 시가 평가해야 #체력 허약한 일부 생보사 비상등 #판매채널·영업 약화 악순환 우려

내가 고른 보험사는 지금 안전할 걸까. 당국이 보험사들의 재무건전성 감독 기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로 하면서 국내 보험업계에 거센 지각변동이 예고되고 있다. 종착지는 오는 2021년 도입되는 보험사 새 국제회계기준(IFRS17) 시행이다. IFRS17은 쉽게 말해 그동안 다양한 장치로 감춰온 보험사들의 ‘회계 민낯’을 드러내는 제도다. 도입 예고 시점부터 업계의 저항과 우려가 거센데 금융감독원이 지난달 말 다가올 충격에 미리 대비하라며 이른바 ‘신(新) RBC(지급여력) 제도’ 시행을 올 연말로 전격 예고했다.

신RBC제도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보험부채 듀레이션(잔존만기)을 현행 최장 20년에서 올 연말 25년, 내년 12월 30년으로 점차 늘리기로 했다. 지금까지 보험사들은 만기 수십년짜리 종신보험을 팔고도 회계장부에는 만기 최대치를 20년으로 반영했다. 부채의 잔존만기와 자산의 잔존만기를 최대한 가깝게 맞춰 금리 변동에 따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IFRS17은 부채 잔존만기에 제한을 두지 않고 보험 부채를 고스란히 시가 평가한다. 당국은 3년간 단계적으로 잔존만기를 키워 RBC 하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한다는 계획이다.

신 RBC는 또 최저보증 조건이 달린 변액보험에 대해서도 보험사들이 자본을 늘려나가도록 제도를 바꿨다. 변액보험은 투자손실이 나더라도 보험사가 무조건 10년 뒤 원금 등을 보장해준다. 가입자 입장에서는 좋은 조건이지만 투자 수익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보험사의 재무건전성을 악화시키는 주범이 된다. 이에 금감원은 보험사가 언제 부담해야 할 지 모를 최저보증 준비금을 미리 쌓아두라는 취지로 올 연말까지 요구자본 증가액의 35%를 반영하게끔 했다. 2018년, 2019년에 각각 70%, 100%로 단계적으로 기준을 올려 충격을 줄여나갈 방침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보험사들은 새로운 RBC 기준에 맞추기 위한 본격 체력강화에 들어갔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21개 생명보험사의 평균 RBC비율은 222.9%다. 장기보장성 상품 판매가 많은 생명보험사들이 손해보험사보다 재무건전성 강화책에 좀 더 취약한 편이다. 특히 RBC 수치가 낮은 일부 중소형 생보사들은 당장 빨간불이 켜졌다. 흥국(148.5%), 현대라이프(150%), KDB생명(124.35%) 등이 제각기 자본확충 방안을 급히 모색하고 나섰다. 지점 수를 통폐합하고 회사별로 소유한 부동산을 매각하는 데 이어 신종자본증권 발행, 대주주 증자 등을 검토 중이다.

문제는 낮은 RBC가 자칫 판매채널 감소, 영업력 약화 등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중소형사들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주요 시중은행들은 RBC 150%를 밑도는 보험사들의 영업점 방카 판매를 중단했다. 자사 고객 보호 차원에서 위험한 상품을 팔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소형 생보사 임원은 “방카 판매 비중이 과거보다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채널이라 가능한 빨리 RBC 비율을 올려 재진입을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당국 최소 RBC권고 기준은 150%다. 하지만 업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신 RBC 적용에 대비하려면 200%를 넘겨야 안전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빅3 생보사 중 하나인 한화생명의 지난 3월말 RBC가 202%임을 감안할 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기준이다.

보험사가 튼튼해지면 소비자도 좋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벌써부터 회사별 희비가 엇갈린다. 외국계나 대형사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고, 토종 중소형 보험사들은 생존이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지각변동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중국 안방보험이 대주주인 동양생명과 알리안츠생명의 지난 1분기 월납초회보험료 합이 업계 3위인 교보생명을 처음으로 넘어셨다. 미래에셋생명이 PCA생명을 인수하면서 회사 간 인수 합병전도 막을 올렸다. 그렇다면 RBC가 낮은 중소형사 보험에 든 소비자는 당장 보험을 해지해야 할까. 결론은 일단 좀 더 지켜보라는 거다. 다이이치화재처럼 보험사가 파산할 경우 보험계약은 고스란히 다른 보험사에 인수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2000년 일본과 달리 현 국내 제도에서는 원칙적으로 가입자가 입는 피해가 없다. 예금자보호법에 따라 일반 보험계약도 은행 예금처럼 예금보험공사에서 5000만원까지 보호를 해 준다. 최근 예보가 보험사 파산 시 소비자가 손실 일부 부담하는 방안(보험계약이전제도 변경) 도입을 고려했지만 잠정 중단한 상태다.

성대규 보험개발원장은 “5000만원이 넘는 고액 가입자의 경우 보험사의 RBC 비율 등 재무건전성 수치를 면밀히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지만 대부분 소비자는 아직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진단했다.

◆지급여력(RBC, Risk-based Capital ratio)제도

은행에 적용되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처럼 보험권에 적용되는 자기자본 규제제도.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요청을 한꺼번에 받았을 때 지급할 수 있는 능력을 수치화한 지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보험사가 언제든 내 보험금을 줄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당국은 보험회사가 예상하지 못한 손실을 입었을 때도 보험계약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책임준비금 외 추가 순자산을 보유하도록 정하고 있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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