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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르포]문재인 정부 들어 '새벽 4시 밑바닥 성남 인력시장'에 가봤더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5일 오전 4시30분쯤 경기도 대표인력시장인 성남 태평동 수진리 고개. 건설 근로자들이 이동할 차량을 기다리고 있다. 김민욱 기자

5일 오전 4시30분쯤 경기도 대표인력시장인 성남 태평동 수진리 고개. 건설 근로자들이 이동할 차량을 기다리고 있다. 김민욱 기자

5일 오전 4시10분쯤 경기지역 대표 인력시장으로 꼽히는 성남 태평동 수진리 고개. 작업복으로 두툼한 배낭을 멘 일용직 건설 근로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편안한 활동복 차림이었다. 센터 앞 도로에는 이들을 태우고 ‘현장’으로 이동할 승합차 10대가량이 주차해 있었다.

경기도 대표 인력시장으로 불리는 성남 수진리 고개 #일당 건설 근로자들 "일감 줄고 외국인까지 잠식해와" #건설업은 경제성장 이끈 기간산업이지만 근로자 고령화 #"건설 근로자 지원사업 확대하고 최저입찰제 관행 개선해야"

수진리 고개 인력시장은 1970년대 초반부터 형성됐다. 서울 청계천 무허가 판자촌 거주자들을 성남 수정구 등지로 강제이주시키면서다. 당시 성남시엔 한 집 건너 건설 근로자가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수진리 고개에는 전국건설노동조합 부설 성남건설무료취업알선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건설 근로자들 사이에서 쉼터로 불린다. 센터 앞 60여명의 건설 근로자들은 두런두런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인근 노점에서 판매하는 500원짜리 커피믹스를 마셨다. 센터 안 의자에 앉아 잠시 쉬거나 무거운 눈을 붙이는 근로자들도 눈에 띄었다.

경기도 대표 인력시장 성남 수진리 고개. [구글맵 캡처]

경기도 대표 인력시장 성남 수진리 고개. [구글맵 캡처]

건설근로자공제회 이동출장소(미니버스)에서 자신의 퇴직공제금을 확인하는 근로자도 있었다.퇴직공제금은 일용·임시직 건설근로자가 건설업에서 퇴직할 때 받을 수 있는 돈이다. 200호 이상 공동주택 건설공사, 공사 예정금액 3억원 이상의 국가 또는 지자체 발주 공사 등 퇴직공제 가입현장에서 근로한 일수에 맞게 적립된 공제부금에 이자를 더해 지급한다.

건설근로자공제회 이동출장소 내부모습. 김민욱 기자

건설근로자공제회 이동출장소 내부모습. 김민욱 기자

수진리 고개에서 만난 김모(52)씨는 자신을 경력 20년의 철근공이라고 소개했다. 김씨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 경기가 좋아질 거로 기대하지만, 워낙 지금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둘째(딸 26살)가 가을에 결혼한다. 딸은 챙겨줘야 하는데….” 말끝을 흐리며 김씨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철근 숙련공은 하루 일당이 21만원으로 조공(단순 일꾼·하루 12만원)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들이 일당 16만~17만원에 일을 따내면서 일감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건설 근로자들에게 쉼터로 불리는 수진리 고개

건설 근로자들에게 쉼터로 불리는 수진리 고개

일부 근로자들에게 이날은 징검다리 연휴였지만 수진리 고개에서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장모(62)씨는 “일감이 줄어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이 200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며 “내일 비가 온다는 데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8~9월 경기도 광주 빌라촌 공사현장에서 일을 했는데 하도급 업체측으로부터 수백만원의 일당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데서 벌어서 주겠다’는 말만 듣고 있다”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인맥 장사이다 보니 고용노동부에 체불임금 사실을 신고하지 않고 일단 그냥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수진리 고개에 모인 건설 근로자들은 50대 이상이 대부분이다. 청년실업자가 120만명에 육박하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청년들이 외면하는 직업이다.

유모(55)씨는 “이 바닥에서는 거짓말 조금 보태 50대가 막내”라며 “고된 일을 젊은이들이 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밖에 “예전에 수진리 고개에 도지사님(김문수 전 지사)도 오고 다른 높은 분(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도 오고 했는데 경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동하는 건설근로자. 김민욱기자

이동하는 건설근로자. 김민욱기자

이날 오전 5시쯤 되니 건설 근로자들은 대기해 있던 승합차를 타고 남양주 별내지구와 오산 세교지구 등지로 떠났다. 대부분 ‘팀장’이라 불리는 사람의 인맥을 통해 일자리가 정해진다. 인력사무소를 통하면 일당의 일부분(통상 10%)을 떼간다고 한다. 현장에서 선택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날 일자리를 잡지 못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은 취재진이 다가가 신원을 밝히자 손사래를 쳤다.

비슷한 시간 인근 모란시장 인력시장도 파장 분위기였다. 일을 구하지 못한 근로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삼일인력 차일환(66) 사장은 “성남에만 인력 사무소가 150여군데나 있다. 불법 인력사무소까지 합하면 더 많다”며 “건설 현장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 데 외국인 근로자가 들어오니 더욱 힘든 것”이라고 말했다.

건설근로자공제회가 발간한 건설근로자종합실태조사(2015) 보고서를 보면, 일용직 건설 근로자의 월 평균 근로일수는 15일에 불과하다. 전산업 평균 (20.4일) 보다 낮은 수준이다. 월 평균 임금은 181만3000원으로 조사됐다. 전산업 평균(319만원)에 비해 턱 없이 낮다.

건설업 임시일용근로자 임금총액

건설업 임시일용근로자 임금총액

이처럼 사정이 안 좋은데다 외국인 근로자가 대거 유입돼 인력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건설기능인력 수요 및 공급분석 전망 자료(2013)에 따르면 내년도 건설기능 인력 수요는 138만8829명(건설투자 153조6027억원 전망 기준)이다. 이에 반해 인력공급은 내국인 114만161명에 외국인 28만9477명을 포함한 142만9638명이다. 4만809명의 공급초과인 셈이다.

건설기능인력 수요 및 공급분석

건설기능인력 수요 및 공급분석

전국건설노조 경기도건설지부 박우철 사무국장은 “제조업 같은 경우 부족한 국내 근로자의 자리를 외국인 근로자들이 채우는데 건설업은 외국인 근로자들의 일자리 잠식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체불임금까지 발생해 근로자들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설근로자공제회에 따르면 직업으로서의 일용직 건설 근로자는 현재 110만여명으로 추산된다. 건설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4%가량을 차지하는 국가 기간산업으로 한국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이처럼 건설 근로자들은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건설근로자공제회 기획관리팀 민상현 과장은 “외형적 성장에도 건설 근로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약화되고 있다”며 “이에 퇴직공제 혜택 외에도 건설 근로자 자녀에 대한 대학 학자금 지원, 근로자 건강관리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우상범 객원연구위원은 “가장 큰 문제는 원청-하청 구조가 수직적이며 종속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라며 “여기에 최저가입찰제를 하다보니 하청업체들이 수주 획득 이후 쉽게 수익을 낼 수 있는 인건비 등을 건드리게 된다"고 분석했다. 그는 "무리한 공사로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남=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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