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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철강·금융·IT 거쳐 우주산업까지 성장한 스타트업 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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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룩셈부르크 정보통신박람회 가보니

지난 9일 열린 스타트업 경진대회 ‘피치 유어 스타트업’. 19개 스타트업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3분 33초동안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사진 ICT Spring]

지난 9일 열린 스타트업 경진대회 ‘피치 유어 스타트업’. 19개 스타트업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3분 33초동안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사진 ICT Spring]

홀 전체에 깔린 호른의 낮은 울림에 첼로와 피아노의 부드러운 선율이 더해졌다. 드럼과 트럼펫이 연주의 클라이맥스를 향하자 수백 명의 청중은 교향곡에 더 빠져 들었다. 무대 위에는 오케스트라도 지휘자도 없었다. 가죽 재킷을 입은 청년 한 명만 덩그러니 무대에 서 있었다.

25개 국가의 스타트업 경연대회 #세계에 통용될 혁신 아이디어 찾아 #“비전·기술력 있으면 아낌없이 투자” #제주도 1.5배 크기의 룩셈부르크 #1인당 국민소득 1억 넘는 강소국 #아마존·MS 유럽본사, EU 기구 몰려 #정부·기업·민간 협력 ‘에코시스템’ #기업 68%가 스타트업 육성 병행 #고위관료가 직접 전화 걸어 도와줘

유럽의 강소국 룩셈부르크에 있는 유럽 컨벤션센터에서 지난 9일 공연된 이 교향곡의 작곡자는 ‘아이바(AIVA)’다.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AI)이다. 이날 공연은 전 세계 스타트업 기업들의 경진대회인 ‘피치 유어 스타트업(Pitch your startup)’의 참가곡이었다.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는 아이바의 개발자 피에르 바로(Pierre Barreau)다. 그는 “아이바는 딥러닝을 통해 음악을 배운다. 바흐·모차르트·베토벤 등 거장들의 음악을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스타트업 ‘지속가능발전소’도 로봇 애널리스트 ‘후즈굿’을 소개했다. 후즈굿은 ‘착한 기업’을 감별한다. 기업의 물·전기 사용량, 사회공헌활동, 산업재해 등을 분석하는 AI 프로그램이다. 리제트 브레켈 매니저는 “단순히 재무제표만으로는 기업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할 수 없다. 빅데이터를 이용해 기업의 진짜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아이바와 후즈굿을 포함해 전 세계 25개국 160개 스타트업의 작품 중 본선 통과 19개 팀이 참가한 대회의 우승 상금은 5만 유로(약 6300만원). 심사 기준은 혁신성과 창의성, 그리고 시장성이다. 룩셈부르크 경제부 고위 관료와 유명 벤처캐피털리스트,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등이 심사위원이다. 상금을 훌쩍 뛰어넘는 거액의 투자 논의 등도 이 대회에서 이뤄지기도 한다.

우주, 4차 산업혁명 등을 주제로 열린 ‘ ICT Spring’에서 VR기기를 체험 중인 한 참가자.

우주, 4차 산업혁명 등을 주제로 열린 ‘ ICTSpring’에서 VR기기를체험 중인 한 참가자.

스타트업 경진대회는 지난 9일부터 이틀간 우주, 4차 산업혁명, 핀테크, 디지털을 주제로 유럽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정보통신박람회 ‘ICT Spring Europe 2017’(ISE)의 일부다. ISE에는 91개 기업과 48개 스타트업이 AI·VR(가상현실) 등 첨단 기술을 선보였다. 유럽우주기구(European Space Agency)·미국항공우주국(NASA) 등도 부대 행사인 스페이스 포럼에 참가했다.

ISE는 룩셈부르크 경제의 축소판이다. 기업인과 관료·투자자 등이 한자리에 모이기 때문이다. 제주도 1.5배 정도의 면적에 인구 57만 명의 소국이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 달러가 넘는 경제 강국이 된 비밀이 이 행사에 숨어 있다. 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 등의 유럽 본사가 입주해 있고, 유럽투자은행·유럽재판소·유럽연합집행위원회 등 유럽연합(EU)의 핵심 기구들도 몰려든 이유는 뭘까.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정보통신박람회. 140개 기업이 첨단기술을 선보였고 5200여 명이 박람회를 찾았다.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정보통신박람회. 140개 기업이첨단기술을 선보였고 5200여 명이 박람회를 찾았다.

친기업적인 법과 제도, 안정적인 정치 환경과 함께 룩셈부르크 경제력의 원천은 ‘에코시스템(ECO-SYSTEM)’이라 불리는 정부-기업-민간의 협력시스템 덕분이다. 관료들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 기업들의 민원 처리와 사후 관리에 집중하고, 기업의 68%는 단순 기업 활동 외에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등 혁신 분야에 투자한다.

프랑스 최대 은행 BNP파리바는 핀테크 분야의 스타트업을 육성 중이다. 세계 1위 고로 설비 전문업체 폴워스는 산업 분야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식이다. 정부출자 기관인 럭스이노베이션의 앙투안 헤론 담당관은 “기업들의 인큐베이터 활동은 사회공헌이면서 동시에 최첨단 기술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이를 통해 룩셈부르크 경제는 창조성과 혁신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한국 최초로 BNP파리바의 인큐베이팅 기관에 입주한 ICTK의 박승은 차장은 “펀딩과 기술 지원뿐 아니라 전 세계적 네트워크도 함께 제공받는다. 경제부 공무원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며 직접 전화를 걸기도 한다. 이곳은 스타트업의 천국이다”고 말했다.

지난 9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정보통신박람회 'ICT Spring Europe'에서 본지 기자와 만난 데이비드 왈로키어 맹그로브 캐피털 파트너. '스카이프'의 초기 투자자로 유명하다.

지난 9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스타트업 경연대회 '피치 유어 스타트업(Pitch Your Startup)의 경연 모습. 크리스 최 스프라이핏 대표는 운동과 소셜네트워킹을 결합한 어플리케이션을 선보였다.
ISE에 참가한 한국의 스타트업 '펀리햅(Fun Rehab)'. 재활치료와 게임을 접목시켜 투자자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김민관 기자
스타트업 경진대회 '피치 유어 스타트업'에 참가한 수백명의 업계 관계자들. 사진 프리랜서 백영진

탄탄한 금융 인프라도 강점이다. 1980년대부터 금융업에 전폭적으로 투자해 온 룩셈부르크에는 27개국 143개의 은행이 진출해 있다. 정부가 운영하는 투자펀드뿐 아니라 수많은 개인투자자도 몰리고 있다. 피치 유어 스타트업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이노허브의 폴 궤팅거 공동 대표는 “우리와 커넥션을 맺고 있는 투자그룹만 800개다. 유럽에 정착하고 싶은 기업을 발굴해 시장가치를 평가하고 알맞은 투자자를 연결해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고 말했다. 스카이프 초기 투자자로 유명한 맹그로브캐피털의 데이비드 왈로퀴어 파트너는 “우리는 전 세계 시장에 통용될 수 있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찾는다. 비전과 기술력을 보여준다면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프랑스·독일·벨기에 등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룩셈부르크는 빠르고 효과적으로 산업 체질을 변화시켜 왔다. 1867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이후 농업을 시작으로 철강(1950년대), 금융(80년대), IT(90년대 후반)를 거쳐 현재는 우주산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에티엔 슈나이더 부총리 겸 경제 장관은 “소국인 룩셈부르크가 생존하기 위해선 다른 나라보다 한발 앞서 혁신해야 한다. 전 세계 인재들이 모여 함께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이유”라고 말했다. 현재 룩셈부르크의 우주산업은 연간 9%대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해줄 정보통신 분야의 성장률도 16%대다.

지난 9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정보통신박람회 'ICT Spring Europe'에서 본지 기자와 만난 에티엔 슈나이더 룩셈부르크 부총리 겸 경제장관. 사진 룩셈부르크 경제부

지난 9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정보통신박람회 'ICT Spring Europe'에서 본지 기자와 만난 에티엔 슈나이더 룩셈부르크 부총리 겸 경제장관. 사진 룩셈부르크 경제부

[S BOX] 슈나이더 부총리 “정보통신·물류 융합한 스마트 국가 구상”

“작은 나라는 늘 혁신적(innovative)이고 창조적(creative)이어야 합니다.”

지난 10일 ‘ICT Spring Europe’ 행사장에서 만난 에티엔 슈나이더(사진) 룩셈부르크 부총리 겸 경제장관의 말이다. 그는 룩셈부르크의 비전에 대해 “현재 구상 중인 콘셉트는 ‘스마트 국가(smart nation)’”라고 말했다.

스마트 국가는 어떤 개념인가.
“정보통신·그린 테크놀로지·물류 기술 등을 융합해 지속 가능하고 안전한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전기로 움직이는 공유형 이동수단이 지금의 자동차를 대체할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이동 장소만 선택하면 전기차·버스·트램·자전거 등을 연계한 루트가 계산된다. 내년이면 전기 트램이 깔리고 3년 후에는 전기차 4만 대와 충전소 1600개가 갖춰진다.”
우주산업에 집중하는 이유는.
“30년 전 우리가 TV 송수신용 인공위성을 개발할 때 모두가 비웃었다. 하지만 대성공이었고 연구를 주도한 SES(Societe Europeenne des Satellites)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우주는 생각보다 가까운 미래다. 우주 광물 채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가 함께 연구 개발 중이다. 인류의 공공선을 위해 활용될 수 있도록 제도 정비도 병행하고 있다.”

룩셈부르크 =김민관 기자 kim.mink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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