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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간판 디자인이 이렇게도 바뀔 수 있나? '간판 혁명'으로 도시미관 바꾼 전주시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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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전북 전주시 전동 풍남문 로터리에서 관광객 백설빈(32)씨가 아들을 안고 상점 간판들을 가리키고 있다. 김준희 기자

지난 17일 전북 전주시 전동 풍남문 로터리에서 관광객 백설빈(32)씨가 아들을 안고 상점 간판들을 가리키고 있다. 김준희 기자

지난 17일 전북 전주시 전동 남부시장. 시장의 관문인 풍남문(豊南門) 로터리에는 상점 60여 곳이 몰려 있다.풍남문은 조선 시대 전주 읍성의 남문으로 보물 제308호다. 낡고 오래된 아크릴 또는 철제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여느 전통시장과 달리 이곳의 간판들은 목재와 석재·기와 등으로 꾸며져 있다. 크기는 일반 간판보다 작고 가게 이름을 나타내는 글씨체는 다양하다.

전주시가 지난 1월 전북도교육청 인근에 만든 서부시외버스 간이정류소. 지역 예술가들이 참여해 캠핑카와 카페를 결합한 디자인을 고안했다. [사진 전주시]

전주시가지난 1월 전북도교육청 인근에 만든 서부시외버스 간이정류소. 지역 예술가들이 참여해 캠핑카와 카페를 결합한 디자인을 고안했다. [사진 전주시]

전주시가 2015년 국비와 시비 4억원을 들여 간판을 손본 결과다. 상점들도 2~15%씩 비용을 보탰다. 상인들은 "거리 이미지가 밝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글자만 크고 직사각형으로 된 획일적 디자인 벗어나 #지역 문화·특색 반영하고 한글 아름다움 살리는 방식 #전주시장 "도시 전체 '지붕 없는 미술관' 만들겠다" #전통시장·버스승강장·민원실·동물원 등 '첫인상' 탈바꿈 #지자체는 도시 이미지 높이고 상인들은 상권 살고 #지역 예술가들은 일감 생기는 '일석삼조' 효과

'남문먹거리' 박순자(60·여) 사장은 "예전에는 멋 없이 글씨만 크고 간판만 넓적하게 만들어 보기에도 지저분했다"며 "요즘은 단골뿐 아니라 여행객들도 '간판이 아기자기하고 예쁘다'며 좋아한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 전주에 놀러온 백설빈(32)씨는 "전체적인 간판 색깔은 옛날식인데 글씨는 현대적이라 깔끔하고 신선하다"고 말했다.

전주시가 지난 1월 전북도교육청 인근에 만든 서부시외버스 간이정류소. 지역 예술가들이 참여해 캠핑카와 카페를 결합한 디자인을 고안했다. [사진 전주시]

전주시가지난 1월 전북도교육청 인근에 만든 서부시외버스 간이정류소. 지역 예술가들이 참여해 캠핑카와 카페를 결합한 디자인을 고안했다. [사진 전주시]

전주시가 창의적 '간판 혁명'으로 도시 미관을 업그레이드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글자만 큼지막하고 직사각형으로 된 기존의 획일적인 간판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디자인을 가미하고 한글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방식이다. 자치단체로선 도시 이미지를 높이고 상점들은 상권을 살리고 간판 작업에 참여하는 지역 예술가들은 일감을 얻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옛 동산동 주민센터를 리모델링해 개관한 '전주공연예술연습공간' 간판. [사진 전주시]

옛 동산동 주민센터를 리모델링해 개관한 '전주공연예술연습공간' 간판. [사진 전주시]

전주시는 지난해 7월부터 '아름다운 간판 만들기' 사업을 본격화했다. 옛 동산동 주민센터를 리모델링해 개관한 '전주공연예술연습공간'과 전주동물원 내 동물병원인 '동물치유쉼터' 등에는 새로운 형태의 간판이 설치됐다. 이 간판들은 기존의 글자 중심의 딱딱한 느낌의 간판이 아닌 목재를 활용해 장소마다 개성을 살린 게 특징이다.

전주시청 로비에 마련된 민원실 간판. [사진 전주시]

전주시청 로비에 마련된 민원실 간판. [사진 전주시]

이달 중순 완공을 앞둔 전주 '첫 마중길' 인근 상가들도 아름다운 간판을 달게 된다. 전주 첫 마중길 사업은 전주역에서 명주골사거리까지 백제대로 850m(왕복 8차선) 구간 가운데 중앙 2차선을 서울 광화문광장처럼 인도 겸 문화 공간으로 꾸미는 사업이다.

전주동물원 내 새로 생긴 '동물치유쉼터' 간판. [사진 전주시]

전주동물원 내 새로 생긴 '동물치유쉼터' 간판. [사진 전주시]

전주시는 간판뿐 아니라 시내버스 승강장 40곳 등 공공시설도 '예술 작품'으로 만들 계획이다. 이미 지난 1월 전북도교육청 인근에 만든 서부시외버스 간이정류소는 지역 예술가들이 참여해 캠핑카와 카페를 결합한 디자인을 고안했다.

예술가들이 협업을 통해 최근 완성한 전주월드컵경기장 동문 버스승강장 모습. [사진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

예술가들이 협업을 통해 최근 완성한 전주월드컵경기장 동문 버스승강장 모습. [사진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
예술가들이 협업을 통해 최근 완성한 전주월드컵경기장 동문 버스승강장 모습. [사진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

지난 20일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개막식이 열린 전주월드컵경기장 동문 버스승강장 2곳도 최근 지역 예술가들이 협업을 통해 완성했다.

승강장의 원목 틀은 전통 짜맞춤 기법으로 제작됐다. 창살 문양은 문양 디자이너가 레이저 조각기로 투각(透刻)했다. 명화(名畫)도 그려 넣었다. 승강장 제작에 참여한 이주원 그래픽 디자이너는 "승강장의 기본적인 역할과 이용자 편의 등을 고려해 안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작가 정신을 최대한 발휘했다"고 말했다.

예술가들이 협업을 통해 제작 중인 호남제일문 고속·시외버스 승강장 모습. [사진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

예술가들이 협업을 통해 제작 중인 호남제일문 고속·시외버스 승강장 모습. [사진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
예술가들이 협업을 통해 제작 중인 호남제일문 고속·시외버스 승강장 모습. [사진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

아름다운 간판 및 승강장 만들기는 넓게는 전주시의 '핸드 메이드시티' 구상에 포함된다. 전주시는 지난 2월 수제작 기술을 기반으로 한 핸드 메이드 시티(수공예 도시)를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시민을 위한 공간에 설치되는 간판 제작에 지역 예술가를 적극 참여시킬 계획"이라며 "전주만의 특색 있는 간판 문화가 공공영역에서 민간영역까지 확대되면 전주시 전역이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 예술계도 반기는 분위기다. 공예가인 양경란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 부이사장은 "간판에 스토리를 입히고 결과물을 만들려면 문학과 공예·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해야 한다"며 "이런 작업을 통해 '저 독특한 간판은 누가 만들었을까'하는 관심이 높아지면 예술가들을 찾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7월 창립된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은 전북 지역에 기반을 둔 20~50대 예술가 8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최영기 전주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는 "도시 경관적 측면에서 간판은 주민에게는 편의성을, 관광객에게는 첫인상을 좌우하는 요소"라며 "단순히 잘 정리된 간판보다는 장소와 시설의 특징을 살리면서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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