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마을에 '양심가게' 들어선 사연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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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군 흑산면 대둔도의 양심가게 '오정리 전빵'. [사진 신안군]

전남 신안군 흑산면 대둔도의 양심가게'오정리 전빵'. [사진 신안군]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서 북동쪽으로 약 4㎞ 떨어진 대둔도. 전체 면적 3.34㎢인 이 섬의 3개 마을 중 하나인 오리(옛 지명 오정리) 주민들은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진 도시와 달리 여러 불편을 감내하며 산다. 주민들이 생필품을 살 변변한 가게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신안군 흑산면 대둔도 오리에 양심가게 설치 #청년회, 마을 노인들 불편 덜기 위해 아이디어 #운영 한 달째 사라진 물품 없고 '소통공간' 역할

이 마을에 지난달 주민 누구나 반기는 시설이 들어섰다. 옛 마을회관 건물을 고쳐 만든 일명 ‘양심가게’다. 소규모 동네 가게를 의미하는 ‘오정리 전빵(전방·廛房)’이라는 작은 간판을 내걸었다.

이 양심가게에는 휴지부터 라면·생수·양념까지 식료품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이 가득 차 있다. 규모는 작지만,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물품을 판매한다.

전남 신안군 흑산면 대둔도. [사진 네이버 지도 캡쳐]

전남 신안군 흑산면 대둔도. [사진 네이버 지도 캡쳐]

그러나 양심가게를 지키는 주인은 따로 없다. 오리 주민들은 지켜보는 이가 없더라도 각 물품 아래 붙은 가격표를 보고 동전과 지폐를 가게에 두고 간다.

양심가게가 운영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사라진 물건은 없었다. 오히려 물품 가격보다 훨씬 많은 돈을 놓고 간 주민도 있었다.

양심가게를 만든 건 이 마을 청년 10여 명으로 구성된 오리 청년회다. 이 마을에서 나고자란 이들은 부모 같은 노인들이 가게가 없어서 큰 불편을 겪는 모습을 보고 양심가게를 만드는 방안을 떠올렸다.

전남 신안군 흑산면 대둔도 '오정리 전빵'. [사진 신안군]

전남 신안군 흑산면 대둔도 '오정리 전빵'. [사진 신안군]

오리 주민들은 치약 하나만 필요해도 배를 타고 소형 마트가 있는 흑산도까지 가야 했다.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여 분이지만, 하루 2차례만 운행하는 데다 기상 여건이 나쁠 경우 배가 뜨지 않아 큰 불편을 겪어왔다.

큰 마음을 먹고 배를 타고 나와 흑산도에 도착하더라도 불편은 있었다. 마트와 철물점, 우체국 등을 모두 가려면 배가 다시 떠나는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서다. 오리에 사는 70여 가구 120여 명의 주민들 가운데 70%가 넘는 노인들은 이런 불편을 안고 살아왔다.

오리 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마을 주민들은 십시일반 1000만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마을회관을 개조하고 물품 진열에 쓸 선반, 생필품을 구매했다. 마을 주민 누구나 찾는 ‘오정리 전빵’은 물품 판매 공간을 넘어 주민들이 안부를 묻고 외로움을 달래는 소통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김근중(43) 오리 청년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라 부모나 마찬가지인 마을 어르신들의 불편을 외면할 수 없었다”며 “양심가게를 계기로 주민들끼리 더욱 소통하고 이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안=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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