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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끌리네 … 남의 일 같지 않은 ‘궁상남 다이어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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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SBS ‘미운 우리 새끼’에서 ‘궁상민’으로 통하는 이상민(왼쪽).

SBS ‘미운 우리 새끼’에서 ‘궁상민’으로 통하는 이상민(왼쪽).

“네가 대단하다. (빚을) 십 몇 년씩 갚는 사람이 있을까. 짠하기도 하고.”

TV 관찰 예능 프로그램 새 코드 #70억 빚 갚아가는 눈물겨운 생활 #이상민, 유재석 꺾고 인기 1위로 #파산 윤정수도 짠내 풍기며 재기 #“스타들도 저렇게 사네” 위로받아

지난 7일 SBS 예능 ‘미운 우리 새끼’에서는 이상민이 2005년부터 빚을 갚고 있는 채권자와의 대화가 방송됐다. 이상민은 채권자 앞에서 2900원짜리 티셔츠, 7900원짜리 바지, 팬이 녹용 보내줄 때 담아 보냈던 가방을 들어 보이며 연신 “돈을 아껴야 한다”고 말한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 겸 프로듀서에서 70억원 가까이 빚을 진 채 채권자의 집에 세 들어 사는 ‘빚쟁이’로 전락한 그다. 13년간 힘들게 빚을 갚아온 얘기를 들은 채권자는 “내가 너였으면 손들었다”며 혀를 내두른다.

궁상맞은 이들이 뜨고 있다. 누구보다 좋은 환경을 누리며 살 것 같던 스타들의 궁상맞은 모습에 시청자들이 호응하고 있다. 10대, 20대 시청자들에게 이상민은 누군지도 잘 몰랐던 ‘한 때 스타’였다. 하지만 이제는 ‘궁상민(궁상+이상민)’이란 이름으로 친근하게 다가가면서 ‘비호감’이 ‘극호감’으로 바뀌었다. 최근엔 예능 방송인 브랜드 평판도에서 유재석을 꺾고 1위(한국기업평판연구소)를 기록하기도 했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는 “탈세·탈법 등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모습과는 달리 엄청난 빚을 꿋꿋이 갚아나가면서 올바름과 희망에 대한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고 있다”고 말했다.

◆‘궁상남’으로 뜬 이상민·이시언·윤정수

조연 전문 배우 이시언도 각종 예능에서 짠 내 나는 모습을 가감 없이 공개하며 인지도를 높이고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다. 지난 5일 MBC ‘나혼자 산다’에서 이시언은 일본행 저가 비행기에 올라 “기내식은 안 주느냐”며 승무원에게 애처롭게 묻는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다른 승객이 이시언에게 샌드위치를 사주고 이시언은 그걸 또 얻어먹는다. 지난 2월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해서는 통영 사는 친구의 장모님 등 주변 지인들로부터 받은 반찬들을 차례로 공개하며 시청자들로부터 “나도 도와주고 싶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지난해 말 연예대상에 패딩을 입고 참석한 웹툰 작가 기안84도 마찬가지다.

JTBC ‘님과 함께2’에서 파산 선고 이후의 모습을 보여준 윤정수(오른쪽).

JTBC ‘님과 함께2’에서 파산 선고 이후의 모습을 보여준 윤정수(오른쪽).

이상민보다 먼저 ‘채무’를 앞세워 성공한 이는 개그맨 윤정수다. 2013년 12월 10억원 이상의 빚 때문에 파산 선고를 받은 윤정수는 JTBC ‘최고의 사랑 2’에 출연해 전기세 아끼려 에어컨을 켜지 않는 모습과 빚 장부를 공개했다. 결국 파산의 아이콘에서 재기의 아이콘으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연예인들은 선망의 대상? ‘NO’

스타들은 한때 선망과 대리만족의 대상이 되는 판타지의 결정체였다. 하지만 이제 신비주의 전략은 실종됐다. “신비주의의 대표주자 서태지도 ‘인간’이 된지 오래”(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다. 이동연 한예종 교수는 “예전에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연예인을 보며 대중들은 ‘나댄다’거나 ‘볼품 없다’고 생각했다”며 “그러나 이제는 신비주의적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배우에 공감하지 못하고 일상을 보여주는 모습에 더 호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꺼풀 벗겨진 연예인들의 모습은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관찰 예능의 인기와도 무관치 않다. 관찰 예능 속에서 연예인들은 일상 속모습을 거리낌 없이 공개한다. 지상파 예능 ‘혹한기’인 요즘에도 지난 7일 시청률 21.3%를 기록한 ‘미운 우리 새끼’는 궁상남들의 집합소다. ‘궁상민’을 필두로, 47살 박수홍이 클럽춤을 연습하며 잘 돌아가지 않는 허리를 열심히 돌리는 모습이나 김건모가 일어나자마자 소주를 들이키는 모습, 곳곳에 먼지가 쌓여있는 토니안의 집 등은 궁상맞음과 짠함의 절정이었다.

◆팍팍한 현실에 위로되는 궁상 코드

김헌식 평론가는 “‘궁상코드’에 호응하는 시청자가 많다는 건 그만큼 실제로 궁상 맞게 사는 이들이 많아져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1인 가구라고 할 수 있다. 챙겨줄 이가 있으면 궁상스러움은 반감 된다. 국토연구원의 ‘2016년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실제로도 1인 가구가 급격히 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전체 가구의 27.2%로 10년 전 14.4%보다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났다. 이렇다 보니 혼자 살고 있는 연예인들의 궁상스러운 모습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KBS2 연예대상 시상식에 패딩을 입고 참석한 웹툰작가 기안84(오른쪽).

KBS2 연예대상 시상식에 패딩을 입고 참석한 웹툰작가 기안84(오른쪽).

궁상남은 많아도 ‘궁상녀’는 찾아보기 힘든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최태섭 문화평론가의 분석이다. “남성의 찌질함과는 달리 여성의 찌질함은 연민이 아닌 불편한 것으로 인식하는 이중 잣대가 있다. 여자 연예인이 기안84처럼 편안하게 입고 갔다면 엄청난 욕을 먹었을 것이다. 한편으론 IMF 이후 사회문화·경제적 측면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가장 큰 주체가 남성이다. 남성들이 궁상남을 보며 연민을 느끼고 ‘스타들도 저러는데 뭘’하면서 자기 변호를 하기 때문에 사랑 받고 있다.” 특히 ‘궁상민’의 경우는 궁상을 떠는 가운데도 나름대로 스타일과 멋이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줘 눈길을 끌고 있다. 이사를 몇십 번 다니면서도 운동화 컬렉션을 고이 모시며, 인터넷 쇼핑몰에서 할인 받아 구입한 2900원짜리 티셔츠에는 연예인적 안목이 번득인다. ‘궁셔리(궁상+럭셔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라면을 먹어도 등심 한 조각은 넣어야겠다는 ‘허세’가 궁상스러운 현실에서도 ‘작은 사치’와 멋을 추구하려는 사회 트렌드와 맞물리는 것이다.

배국남 평론가는 “고용 없는 성장, 실질 임금의 지속적 하락 등 팍팍한 현실의 사정으로 실제로도 궁상을 떨 수밖에 없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며 “궁상떠는 스타들이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의 기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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