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장관들은 모두 휴가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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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프랑스에서 정부 각료들의 휴가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3천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 더위야 천재(天災)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모든 장관이 휴가를 즐기느라 하루에도 수백명의 노약자가 쓰러지는 상황을 나몰라라 해 인재(人災)까지 초래했다는 주장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장관들은 1일부터 8월의 첫 국무회의가 열리는 20일 전까지 3주 가까운 휴가가 예정됐었다. 따라서 1일부터 12일까지 계속된 폭염 기간에 정부는 여느 해처럼 개점 휴업이었다.

로즐린 바슐로 환경장관은 11일 대서양 연안의 휴양지 비아리츠에서 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수만ha의 삼림을 재로 만든 산불은 거의 잡혀갈 무렵이었다. 그리곤 "시민의식을 발휘해 절전해 달라"며 남의 다리나 긁는 말을 해댔다.

장 프랑수아 마테이 보건장관은 같은 날 밤 남부 별장의 정원에 앉아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고 반박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응급의사협회장이 "더위 때문에 파리에서만 1백명이 죽었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장피에르 라파랭 총리가 14일 휴가를 취소하고 급거 상경했지만 이미 사망자가 3천명을 넘어섰을 때였다.

휴가로 인한 프랑스 정부의 늑장 대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5년 우파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알랭 쥐페 총리 역시 잇따라 터진 테러 사태에도 불구하고 휴가를 계속하다 비난을 면치 못했다.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99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 유조선 침몰 사고를 이집트 휴양지에서 바라보다 호된 욕을 먹었다.

이처럼 '휴가 후 봉변'이 거듭되는 것만 봐도 프랑스인들에게 여름 휴가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연중 최대 행사인 것 같다.

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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