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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시조백일장

중앙일보

입력

< 장원>

빨래

윤애라

바닥일까 더 이상 가라앉지 않는 곳
물의 입에 갇혀서 되새김질 당하고
한 번 더 힘껏 비틀려
허공에 던져지네

찌든 낮 얼룩진 밤 모서리 해진 날도
또 한 번 헹궈내며 다시 한 번 더듬는 길
젖은 몸 바람에 맡긴 채
흔들대며 가고 있네

바닥에서 허공으로 말라가는 저 먼 길
젖은 날 칸칸마다 볕이 드는 오후 세 시
유순한 희망 한 벌이
햇빛 속을 걷고 있네

◆윤애라
1963년 부산 출생. 김천 백수시조아카데미에서 시조 공부. 201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부
문 등단. 논술 교사.

<차상>

간고등어

김순호

판에 박힌 궤적의 물때를 벗고 싶었다
비릿한 아가미로 헛물켜며 나부댄 시간
미망의 물결에 쓸려 지느러미 휘어졌다

바람도 잠든 밤바다 수평으로 뉘어 놓고
물려받은 뼈대 하나 이름을 남기고자
익숙한 물을 버리고 목숨마저 버리고

속을 다 드러내고 소금꽃을 안은 몸
짭짤한 생의 갈피 고소하게 피는 저녁
꽃처럼 잔뼈를 열고 적멸에 드는 고등어

<차하>

문답

황혜리

무명실 한 가닥이
원에게 묻고 있다

어떻게 널 느끼니
어찌하면 좋으니

천천히
원이 하는 말
나를, 그냥, 칭칭 감아

이 달의 심사평

4월을 지나면서 예비 시인들의 상념이 꽃잎처럼 화사하게 펼쳐졌다. 건져 올린 ‘세월호’를 제재로 한 작품들도 있었으나 완성도가 부족하였다.
윤애라의 ‘빨래’를 장원작으로 올린다. 여기서 ‘빨래’는 삶의 형상을 비유하는 환유적 장치이다. ‘찌든 낮 얼룩진 밤 모서리 해진 날’은 생의 현주소를 환기시키는데, 이러한 일상의 얼룩은 ‘빨래’를 통해 점차 순화되면서 ‘바닥에서 허공으로 말라가는 저 먼 길’과 같이 무게감을 덜고 치유의 순간을 완성하게 된다. 여기서 ‘빨래’를 통해 상기(想起)된 ‘생’은 물기를 말리면서 가벼워지고 유순해진다.
차상으로는 김순호의 ‘간고등어’를 선한다. ‘간고등어’가 가진 형상을 통하여 삶의 비린내와 등뼈의 서사를 곡진하게 풀어내는 솜씨는 다른 작품과 함께 믿음을 주었다. 다만 ‘속을 다 드러내고 소금꽃을 안은 몸’에 이르는 자기추구가 갑자기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뀌면서 결구가 풀어진 것이 흠이 되었다.
차하로 뽑은 황혜리의 ‘문답’은 대상과의 교감의 장면을 ‘문답’의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자칫 단순하고 치기어린 작품으로 읽힐 수 있으나, 작품 ‘리와인드(rewind)’와 함께 대상에서 오는 내밀한 느낌을 받아 적는 화법의 신선함이 돋보였다. 그러나 ‘원’이 갖는 상징에 깊이를 더하지 못한 점이 지적되었다.
입상작으로 끝까지 거론된 정두섭의 작품은 가능성을 두고 논의되었으나 다른 투고 작품으로 인해 조우리·조긍·정춘희 등과 함께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심사위원 : 박명숙·염창권(대표집필 염창권)

<초대시조>

처용

김연동

천년 유랑아로 돌종 흔든 바람으로
유곽을 돌아오던 나는 지금 풍각쟁이
피 묻은 역신의 뜰에
꽃을 심는 풍각쟁이

북창 문풍지처럼 우는 밤을 이고 앉아
달빛도 죽어버린 서울 어느 골목길을
암 병실 간병인 같이
신발 끌며 가고 있다

지금 여기, 스스로 처용이 된 한 풍각쟁이가 있다. ‘천 년 유랑아’로 ‘돌종 흔든 바람’으로 설화 속을 떠돌던 처용은 모든 풍각쟁이의 원형이다.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분노와 울분의 ‘피 묻은’ 현실 앞에 노래와 춤으로 ‘꽃을 심는’풍각쟁이 처용은 오늘도 ‘역신의 뜰’인 가슴 무너지는 한 서린 불의 앞에 응징의 칼이 아니라 운율의 가락을 풀어내는 무수한 처용으로 현현함으로써 시인은 스스로 처용의 탈을 쓴다. 처용은 『삼국유사』 권 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 전하는 인물이다. 신라 헌강왕 때 동해용왕의 아들로서 정사를 도우기 위해 왕경에 들어와 급간 벼슬을 받고 미인과 혼인하였으나 아내와 동침한 역신을 보고도 춤과 노래로써 감화시켜 이후 처용의 화상만으로도 사귀와 강복을 불러왔다는 설화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우리가 만나는 처용은 서라벌 달 밝은 밤을 이슥토록 노닐다 돌아오는 낭만적 풍각쟁이가 아니다. 지금 여기, 우리 시대가 만나는 처용은 ‘북창 문풍지처럼 우는 밤을 이고 앉아/ 달빛도 죽어버린 서울 어느 골목길’에 절망하는 우리 자신이다. 지금 여기, 우리가 만나는 처용은 아내의 불륜을 가무로 다스린 초인간적인 풍각쟁이가 아니다. 지금 여기, 우리 시대가 만나는 처용가는 ‘암 병실 간병인 같이/ 신발 끌며 가고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비극적 의지로 초극하고자 하는 시인이라는 풍각쟁이가 혼신으로 들려주는, 인간정신과 인간애로 가득 찬 가장 인간적인 노래인 것이다. 박권숙 시조시인

◆김연동
1948년 경남 하동 출생. 87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동아대 국문과 졸업 후 김해여자중학교장, 경남교육연구원정보원장, 경남시조문학회 회장,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의장 등 역임. 시조집 『바다와 신발』『점묘하듯, 상감하듯』『시간의 흔적』 등. 중앙시조신인상‧중앙시조대상‧가람 시조문학상‧이호우·이영도 시조문학상 등 수상.

◆응모안내=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해 그달 말 발표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게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전 응모자격을 줍니다.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100-814) 또는 e메일(choi.sohyeo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e메일로 응모할 때도 이름·연락처를 밝혀야 합니다. 02-751-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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