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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후보자 토론은 게임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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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원호서울대 교수·정치학

박원호서울대 교수·정치학

일반적으로 TV토론을 통해 대통령선거 결과가 바뀌기는 어렵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은 중간층 유권자들이 일부러 찾아서 지루한 토론회를 볼 가능성은 크지 않다. 오히려 지지 후보를 굳게 정한 유권자일수록 ‘응원’과 ‘야유’를 위해 토론 중계를 기다릴 것이다. 마치 프로야구 중계를 보는 것처럼 이들은 지지하는 후보가 실수하면 속상해할 것이고, 상대 후보가 식견 있어 보이면 또 속상해할 것이다. 이럴진대 토론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는 어렵다.

5년 전 TV토론 돌아보면 #박근혜 인식 문제점 많아 #승패 집착하다 큰 그림 놓쳐 #토론은 점수 게임 아니고 #장기 비전, 내용 디테일로 #상대 설득, 합의 찾는 과정

토론회는 이제 스코어가 정산되는 게임이 된 듯하며, 그 승패를 논하는 기사들로 신문·방송은 넘쳐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토론회라는 소중한 기회를 잘 활용하고 있는가? 혹시 어젯밤, 토론회의 ‘승패’와는 무관하게 무심결에 놓친 사소한 장면에서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이야기와 후보자의 핵심적 실체를 알아볼 수 있는 실마리가 언뜻 지나가지 않았던가?

문득 5년 전 대선후보 토론회의 기억을 다시 꺼내 반추하게 된다. 사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토론회에서 나온 발언들을 보면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엔 심각한 결격 사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들이 있어 나는 그것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메모해 둔 적이 있었다. 5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그러나 발언 당사자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탄핵으로 파면된 역사적 시간이 흐른 뒤 당시 발언을 되씹어 보면 오싹한 감이 든다.

박근혜 후보는 당시 토론회에서 “법안(디테일)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지와 실천이 중요하다”며 “그래서 제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 아니에요?”라는 유명한 반문(反問)을 어색한 웃음과 함께 남긴다. 박 후보는 또한 4대 강 사업에 대해 “국가가 핵심 사업으로 추진하는 일에 개인이 뭐라 할 수 없다”면서도 마지막 마무리발언에서는 “열 자식 안 굶기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민 모두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끝맺는다.

나는 이 일련의 발언들이 정치를 바라보는 박 후보의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법치가 아닌 인치(人治), 정책이 아닌 신의(信義), 협치가 아닌 시혜로 정치를 바라보는 이런 전근대적 관점이야말로 5년 후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 우리 공동체 전체를 현재의 나락으로 끌어내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때 우리가 집착한 것은 엉뚱하게도 이정희 후보의 토론 태도와 토론회의 골 득실이었다.

5년 전 대통령 후보 토론회를 새삼 오늘 상기하는 이유는 이번 대통령선거 후보자 토론회가 조금은 달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우선 후보자 토론회를 공격과 수비가 있고, 이를 통해 점수를 따거나 잃는 게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근본적으로 토론은 경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좋은 토론은 상대방과의 근원적 차이에서가 아니라 사소한 일치점을 찾아내는 장면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유능하고 협치할 수 있는 지도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피아(彼我)의 근원적 차이를 드러내는 일은 쉽고, 이는 지지자의 환호를 이끌어 내는 ‘토론게임’에 어울리는 일이다. 예컨대 토론 상대방에게 북한을 ‘주적’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은 사실 상대방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카메라의 시선과 유권자 점수를 염두에 둔 질문이며, 더 이상 토론이 진행될 여지를 막는다는 의미에서 좋은 질문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건 북한을 ‘주적’이라고 규정하는 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 비해 어떤 장점이 있는지, ‘주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같이 이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무엇인지가 아니겠는가.

현대 선거가 사실 몇 개의 핵심 구호(태그라인)로 치러진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짧고 간결하고 선명한 메시지의 반복만이 유권자의 뇌리에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효율적인 토론은 이러한 핵심 구호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저 후보는 종북입니다, 저 후보는 친박입니다, 중소기업을 살리겠습니다, 교육을 개혁하겠습니다. 지지자들은 열광하고 반대자들은 야유할 것이다.

그러나 어렵사리 얻은 토론 기회를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다. 지난 반년 동안 쉼 없이 주말마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밝혔던 시민들의 목소리는 결국 정치의 형식을 바꾸고 내용을 다시 고민하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후보자들이 자신의 장기적 비전과 내용적 디테일을 제시할 수 있고, 상대를 설득하고 합의점을 찾아나가려 노력한다면, 그리고 정말 우리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들이 유권자의 진정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비로소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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