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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 목포 9미(味)를 찾아서⑵ 홍어삼합·병어조림·민어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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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 요리로 나라 안에서 가장 유명한 목포 ‘영란횟집’에서 이번에 먹은 음식 가운데 가장 맛있다고 느낀 한 점. 민어전과 묵은지다.

민어 요리로 나라 안에서 가장 유명한 목포 ‘영란횟집’에서 이번에 먹은 음식 가운데 가장 맛있다고 느낀 한 점. 민어전과 묵은지다.

 묵은지 얹은 민어전, 홍어 삼합에 탁배기…봄 무논에 물 넘듯 

그래픽=고석현 기자

그래픽=고석현 기자

목포에서 첫날(4월 1일) 아침(갈치조림·꽃게살무침)과 점심(낙지)은 만족스러웠다. 저녁은 홍탁이다. 목적지는 ‘덕인집(전남 목포시 영산로73번길 1-1 목포역 옆 오거리5/전화 061-242-3767, 010-8727-3536)’. 홍어로는 금메달식당(전남 목포시 후광대로143번길 8 법원 앞/전화 061-272-2697)과 함께 목포의 양웅(兩雄)으로 꼽히는 집이다. 정품 흑산도 홍어를 쓰는 것은 같지만 상차림이 다르고 값도 다르다. 둘이 먹을 삼합 기준 덕인집 8만원, 금메달식당 12만5000원이다. 어디를 갈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목포 ‘덕인집’의 홍어삼합 한 상(8만원). 장정 둘이 먹기에 넉넉한 양이다.

목포 ‘덕인집’의 홍어삼합 한 상(8만원). 장정 둘이 먹기에 넉넉한 양이다.

점심에 1인당 대낙지 2마리씩 먹었으니 삼합(홍어·돼지수육·묵은지)을 갖춘 홍탁을 맛있게 먹자면 소화가 되도록 몸을 써야 한다. 1900년대 목포 서민들의 애환과 추억이 서린 온금동과 서산동 골목길을 걸어서 돌아보기로 했다

목포진에서 바라본 삼학도. 목포항 어선들이 보인다.

목포진에서 바라본 삼학도. 목포항 어선들이 보인다.

유달산 정상쯤에서 본 1930년대 목포. 삼학도와 목포진 터(3시 방향)·노적봉(6시 방향)·목포역(9시 방향)이 보인다. 목포역과 철길은 이때 바다와 호수를 양 옆에 끼고 물 가운데 있다. 삼학도와 입암산(10시 방향)을 연결하는 둑을 쌓는 간척이 1973년 완공되면서 이 일대는 모두 시가지가 됐다. 목포 근대역사관 전시 사진을 촬영했다.

유달산 정상쯤에서 본 1930년대 목포. 삼학도와 목포진 터(3시 방향)·노적봉(6시 방향)·목포역(9시 방향)이 보인다. 목포역과 철길은 이때 바다와 호수를 양 옆에 끼고 물 가운데 있다. 삼학도와 입암산(10시 방향)을 연결하는 둑을 쌓는 간척이 1973년 완공되면서 이 일대는 모두 시가지가 됐다. 목포 근대역사관 전시 사진을 촬영했다.

목포는 일제 강점기에 목포항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됐다. 1897년 10월 1일 개항한 목포항은 1940년대까지 부산·인천과 함께 한반도 3대 항이었다. 목포라는 이름은 『세종실록』에 기록이 처음 나온다. 세종 21년(1439) 목포 만호진을 설치한 내용이다. 연안 12개 섬을 관리하며 일반 민생행정도 겸하는 수군부대였다. 중선 6척, 별선 2척, 군인 490명, 뱃사공 4명을 배치했다고 기록했다. 만호진 위치는 무안현 남쪽이라고만 기록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개항할 때 목포진 또는 목포항으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만호진은 유지됐다. 현재 목포에 만호동이 있고, 그 동네 가운데 우뚝한 바위 언덕에 객사·홍살문과 선정비 등을 복원한 ‘목포진 역사공원’이 조성(2015년)돼 있다. 공원 꼭대기 큰 활엽수 아래서 둘러보면 바다·시가지·유달산·삼학도·고하도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눈맛’이 그만이다. 만호진이란 만호(萬戶)가 책임자로 근무하는 진(鎭)을 말하는데, 만호는 종4품 무관이다(공원 안내판에는 만호를 종6품이라고 설명).

1872년에 그린 목포진지도(규장각 소장). 12시 방향이 유달산 봉수, 6시 방향은 삼학도다. 지형이 거북이가 목을 뺀 형상이다. 1897년 개항 당시목포에는 150~160가구가 살고 있었다.<블로그 ‘팬저의 국방여행’에서 인용>

1872년에 그린 목포진지도(규장각 소장). 12시 방향이 유달산 봉수, 6시 방향은 삼학도다. 지형이 거북이가 목을 뺀 형상이다. 1897년 개항 당시목포에는 150~160가구가 살고 있었다.<블로그 ‘팬저의 국방여행’에서 인용>

1902년 목포진에서 바라본 서산동 방향. 중간의 논은 바다 만수위보다 1~2m 낮은 지역도 있었다. 간척과 매립으로 택지를 만들어 원도심을 건설했다.<사진=목포시청 홈페이지>

1902년 목포진에서 바라본 서산동 방향. 중간의 논은 바다 만수위보다 1~2m 낮은 지역도 있었다. 간척과 매립으로 택지를 만들어 원도심을 건설했다.<사진=목포시청 홈페이지>

서산동 보리마당길에서 본 목포 원도심과 목포진 역사공원(3시 방향 나무와 기와집 있는 언덕). 그 중간 낮은 지역은 1900년대 초 도시개발 전에는 모두 농지였다. 가운데 놓은 건물이 옛 목포경찰서 자리에 들어선 초원실버타운이다.

서산동 보리마당길에서 본 목포 원도심과 목포진 역사공원(3시 방향 나무와 기와집 있는 언덕). 그 중간 낮은 지역은 1900년대 초 도시개발 전에는 모두 농지였다. 가운데 놓은 건물이 옛 목포경찰서 자리에 들어선 초원실버타운이다.

만호진이 설치되면서부터 목포에 사람이 모여 사는 촌락이 형성됐지만 크게 발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20년 전 개항 무렵 목포의 가구 수는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150~160호가량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개항 당시 목포는 무안군 목포진 주변을 말한다. 노령산맥의 끝이자 시작인 유달산 줄기가 노적봉을 거쳐 바다 쪽으로 거북이 목을 쭉 뺀 형상의 지형이었다. 1872년 그린 ‘목포진지도’를 보면 그렇다. 개항 후 조계지(외국인 공동거류지)가 정해지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일본 영사는 조계지 일대를 둘러보고 유달산 노적봉 남쪽으로 바닷가까지 남북 700여m, 목포진부터 서산동 너머 아리랑고개에 이르는 동서 약 1.2km에 결쳐 지형과 현지 사정을 약도로 그려 본국에 보고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목포진 서편으로 서산동 언덕까지 평지는 논인데 바다보다 낮은 지대가 많다고 했다. 바닷물 만수위보다 5~6척, 심한 곳은 1장(丈: 10척)이나 낮다고 했다.

일본은 밀려드는 일본인 거주지 확보를 위해 간척을 시작했다. 목포항 주변의 원도심 일대는 그렇게 주택지가 확보되고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다. 반듯한 도로들이 종횡으로 이어지면서 바둑판처럼 짜여진 도시가 됐다. 쾌적하고 편리한 평지는 일본인들이 살고 조선 사람들은 언덕과 골짜기에 살게 됐다. 서산동 보리마당 언덕 주위와 온금동 고개 아래 골짜기다.

목포시는 전체 면적 중 3분의 2가 간척지라는 말이 있다. 목포역도 갯벌을 매립한 곳에 지어 1960년대만 해도 주위가 갯벌이었다. 1930년대 사진을 보면 목포역 뒤는 바다였다. 갯벌에 흙을 쌓아 만든 둑을 따라 들어온 철길 양쪽이 다 물이었다. 목포의 명소였던 삼학도가 1940년 육지와 연결되면서 역 뒤로 시가지가 형성됐다. 다시 삼학도~입암산을 잇는 간척공사(1968~1973)가 끝나자 일대는 완전히 육지가 됐다.

목포진 역사공원에서 바라본 만호동·연동·삼학동 일대. 이 지역은 1960년대까지도 대부분 갯벌이었다.

목포진 역사공원에서 바라본 만호동·연동·삼학동 일대. 이 지역은 1960년대까지도 대부분 갯벌이었다.

목포 시가지 모형. 색이 밝은 지역은 예전에 대부분 갯벌이나 바다였다고 볼 수 있다. 목포 땅의 3분의 2가 간척지라고 한다. 목포 근대역사관 전시물을 촬영했다.

목포 시가지 모형. 색이 밝은 지역은 예전에 대부분 갯벌이나 바다였다고 볼 수 있다. 목포 땅의 3분의 2가 간척지라고 한다. 목포 근대역사관 전시물을 촬영했다.

이런 공사로 확보된 낮은 평지에 용당동·연동·삼학동 같은 시가지가 형성됐다. 목포 출신 화가 조풍류(49·본명 용식)씨는 “1980년대 초 문태중학교(용당2동 유달경기장 사거리)에 다닐 때 큰물만 지면 운동장이 침수됐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낚싯대를 들고 출근해 수업 없는 시간에 낚시를 했다. 바다 물고기가 잡혔다”고 회상했다. 그 학교는 지금 삼학도 앞바다에서 1.9km쯤 떨어져 있다. 육지가 됐던 삼학도는 6년의 역(逆) 연륙공사(2000~2006) 끝에 막내 섬(소삼학도)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 대·중 삼학도 사이에도 물길을 내 3개의 섬으로 복원했다. 섬 사이는 다리로 연결하고 이난영 공원 등을 조성해 2007년 3월 개방했다.

점심에 낙지를 먹은 압해대교에서 택시를 불러 타고 해안로를 달려 온금동 ‘선경준치회집(전남 목포시 해안로57번길 2/전화 061-242-5653)’ 앞에 내렸다. 준치회초무침 비빔밥으로 유명한 집이다. 준치는 목포 9미 중 하나다. 하지만 위장 사정은 이걸 먹을 겨를이 없다.

바다를 바라보며 조금 걷자 커다란 공장 굴뚝 3개가 보인다. 1938년에 들어선 조선내화 공장이다. 고온에 견디는 벽돌을 굽던 공장 불은 오래 전 꺼졌다. 크기가 압도적인 공장 건물은 그대로 있고, 담을 따라 양지바른 곳에서는 동네 아주머니 넷이서 몇백m는 돼 보이는 빨간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공장 부지와 마을 재개발계획이 오락가락하면서 공장을 둘러싼 언덕에 옹기종기 들어앉은 동네도 사람도 활기를 잃어가는 온금동이다.

가동을 멈춘 지 꽤 오래된 조선내화 공장 담 아래서 동네 아주머니 넷이 수백m가 넘는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산 아래 보이는 동네가 다순그미(온금동)다.

가동을 멈춘 지 꽤 오래된 조선내화 공장 담 아래서 동네 아주머니 넷이 수백m가 넘는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산 아래 보이는 동네가 다순그미(온금동)다.

온금동에서 내려다본 옛 조선내화 공장. 공장은 떠나고 재개발 계획이 오락가락하면서 동네는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온금동에서 내려다본 옛 조선내화 공장. 공장은 떠나고 재개발 계획이 오락가락하면서 동네는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다순그미·다순금이라고 불렀다. 산 아래 후미진 곳인데 늘 따뜻해 그런 이름을 얻었다. ‘구멍’의 고어가 ‘굼ㄱ’인데 지명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다른 이름도 있다. ‘조금이’라고도 했다고 조풍류 화백은 기억을 되살렸다. 동네 아이들을 ‘조금새끼’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조금 물때에 잉태한 자식을 이르는 말이다. 이곳은 1912년 두 갈래 좁은 만(灣)을 파내고 막아 어항과 상가를 만들었다. 두 갈래여서 별명이 ‘째보선창’이었다. 둘레 산자락에는 가난한 어부들이 모여 살았다. 조금 때는 바닷물이 조금만 나가 수위가 높으므로 선원들이 출어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 그때 들어선 아이를 조금새끼(조금이)라고 했다.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이라도 만나 잘못되면 떼로 바다에 초상을 치르는 일도 생겼다. 동네엔 생일도 제사도 한 날인 집이 많았다. 조금은 작은사리, 소조(小潮)라고도 하는데 매월 음력 7, 8일과 22, 23일이다.

온금동 ‘큰 샘과 불망비’. 95년 전 판 샘과 비석에 적힌 사연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증언한다.

온금동 ‘큰 샘과 불망비’. 95년 전 판 샘과 비석에 적힌 사연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증언한다.

온금동 골목 계단 길. 집도 사람도 길도 윤기가 쪽 빠져 보인다.

온금동 골목 계단 길. 집도 사람도 길도 윤기가 쪽 빠져 보인다.

‘째보선창’이 번창하던 시절, 인근 섬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북적대던 마을은 이제 집도 사람도 늙어 꼬불꼬불 골목과 가파른 계단을 따라 숨가쁘게 존재를 지탱하는 작은 달동네가 되고 말았다. 마을 가운데 우물과 그 옆에 비석 두 개가 서 있다. ‘온금동 큰 샘과 비군(목포시문화유산 제4호)’이다. 95년 전 이곳 사람들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증언하는 유적이다. 1922년 가뭄 때 주민들이 식수난을 겪자 파준 우물과 도움 준 사람의 은혜를 잊지 말자는 ‘불망비(不忘碑)’다.

 ‘조금이’라고 불리던 온금동 아이들이 꿈을 키웠을 서산초등학교 운동장. 공을 세게 차면 바다로 빠질 것 같다.

‘조금이’라고 불리던 온금동 아이들이 꿈을 키웠을 서산초등학교 운동장. 공을 세게 차면 바다로 빠질 것 같다.

보리마당에서 서산동 비탈 마을로 내려가는 계단 길 초입. 경사와 엄청난 계단 수가 사진으로도 느껴진다.

보리마당에서 서산동 비탈 마을로 내려가는 계단 길 초입. 경사와 엄청난 계단 수가 사진으로도 느껴진다.

가파르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길 중간에 남아 있는 한 칸 공용화장실. 급한 사람은 어찌했을까 상상해보면 난감 그 자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가파르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길 중간에 남아 있는 한 칸 공용화장실. 급한 사람은 어찌했을까 상상해보면 난감 그 자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목포에서 손꼽히는 달동네 서산동 비탈 마을의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식수도 화장실도 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해결되던 삶을 지금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목포에서 손꼽히는 달동네 서산동 비탈 마을의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식수도 화장실도 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해결되던 삶을 지금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온금동 아리랑고개를 오르는 길 건너에는 서산초등학교가 있다. 공을 세게 차면 바다에 빠질 것 같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가면 ‘보리마당’으로 오르는 길이다. 정자가 있는 언덕에 올라서면 목포항과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발 아래로는 지붕을 맞댄 낡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비탈 마을이 보인다. 일제 강점기 유곽촌이었다는 서산동이다. 박화성(1903~1988)이 1925년 이광수 추천으로 데뷔할 때 등단작인 단편소설 「추석전야」의 배경이 된 동네다. ‘보리마당’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입구에 ‘서산동 시화(詩畵)골목길’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하지만 골목 속을 조금만 들어가 보면 ‘시화’와는 거리가 먼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정자 옆에서 들어가는 급경사 좁은 골목,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으며 내려가다 보니 수백 조각의 퍼즐이 큰 그림 하나를 만들듯 아귀 맞춰 들어앉은 집들 틈에 한 칸 공중화장실이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한데, 그 앞에서 줄 서서 순서를 기다렸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서산동의 평지는 간척한 땅이다. 거기서 다시 작은 언덕을 넘으면 유달초등학교로 이어진다. 유달산 남쪽 아래다. 700m만 더 걸으면 목포역 근처 오거리가 나온다. ‘덕인집’이 있는 곳이다. ‘전라도 개미의 시인’ 송수권 선생의 시 한 수를 읊조리며 간다.

덕인집의 삭힌 홍어 한 접시. 흑산도에서 직접 보내는 홍어를 김치냉장고에서 한 달쯤 삭혔다. 살의 분홍빛은 냉동한 적이 없는 국산 홍어가 잘 삭았을 때 비치는 색깔이다.

덕인집의 삭힌 홍어 한 접시. 흑산도에서 직접 보내는 홍어를 김치냉장고에서 한 달쯤 삭혔다. 살의 분홍빛은 냉동한 적이 없는 국산 홍어가 잘 삭았을 때 비치는 색깔이다.

삼합의 한 축인 돼지수육은 삼겹살과 다리살이 반반이다.

삼합의 한 축인 돼지수육은 삼겹살과 다리살이 반반이다.

홍어삼합의 밑거름이라 할 수 있는 묵은지. 덕인집 묵은지는 빛깔에 비해 시지는 않다.

홍어삼합의 밑거름이라 할 수 있는 묵은지. 덕인집 묵은지는 빛깔에 비해 시지는 않다.

홍탁
 -목포삼합

지금은 목포 삼합을 남도 삼합이라고 부른다

두엄 속에 삭힌 홍어와 해묵은 배추김치
그리고 돼지고기 편육

여기에 탁배기 한 잔을 곁들이면
홍탁

이른 봄 무논에 물넘듯
어, 칼칼한 황새 목에 술 들어가네.

아그들아, 술 체엔 약도 없단다
거, 조심들 하거라 잉!

지금은 목포 삼합을 남도 삼합이라고 부른다

빛깔 고운 홍어 애와 껍질묵. 묵은 홍어 껍질과 자투리 살을 달여서 굳혔다.

빛깔 고운 홍어 애와 껍질묵. 묵은 홍어 껍질과 자투리 살을 달여서 굳혔다.

덕인집의 구기자·인삼막걸리는 차진 흑산도 홍어 삼합과 찰떡궁합이다.

덕인집의 구기자·인삼막걸리는 차진 흑산도 홍어 삼합과 찰떡궁합이다.

일제 강점기 목포는 노적봉을 기준으로 남동쪽에 일본인이 살았고, 조선사람은 서북쪽 죽교동에 모여 살았다. 도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두 지역 사람들의 접점이 역과 가까운 오거리였다. 일본인들은 거들먹거렸을 테고 조선 청년들이 보기엔 고까웠을 터이다. 한·일간 충돌이 잦았다. 국권을 회복한 후에도 주먹다짐이 잦았다. 목포 최고의 상권이자 번화가였기 때문이다. 조폭 계보에 나오는 ‘목포 오거리파’의 유래다.

홍어를 자르는 여주인 김말신 여사. 30대 초에 젊은 나이에 시작해 음식점 경력 37년이 됐다.

홍어를 자르는 여주인 김말신 여사. 30대 초에 젊은 나이에 시작해 음식점 경력 37년이 됐다.

홍어 한 접시는 몸통 살과 날개·연골을 섞어서 담는다. 붉은 빛이 도는 것이 몸통 살이고 오른쪽 자르지 않은 덩어리는 날개 살이다.

홍어 한 접시는 몸통 살과 날개·연골을 섞어서 담는다. 붉은 빛이 도는 것이 몸통 살이고 오른쪽 자르지 않은 덩어리는 날개 살이다.

덕인집 주인 부부가 흑산도 홍어중매인이 보낸 홍어 포장을 풀고 있다. 10~12kg 암치 3마리가 들어있다.

덕인집 주인 부부가 흑산도 홍어중매인이 보낸 홍어 포장을 풀고 있다. 10~12kg 암치 3마리가 들어있다.

홍어 코에는 흑산도 홍어임을 증명하는 ‘태그’가 매어있고, 비닐 포장 안에 ‘특상’이라고 쓴 종이 표찰이 들어있다.

홍어 코에는 흑산도 홍어임을 증명하는 ‘태그’가 매어있고, 비닐 포장 안에 ‘특상’이라고 쓴 종이 표찰이 들어있다.

오거리 한 모퉁이에 ‘덕인집’이 있다. 1980년 손춘석(72)·김말신(69)씨 부부가 ‘덕인주점’으로 문을 열어 자리만 한번 바꿔 37년째 이어오고 있는 집이다. 간판을 보면 ‘흑산홍어집 덕인집’이라고 씌어 있다. 자랑이기도 하고 자신감이기도 하다. 3월 12일 오후에도 이 집엘 들렀다. 주인 부부가 택배로 온 흑산도 홍어 상자를 뜯고 있었다. 10~12kg 3마리가 들어왔다. 라벨을 보니 발송처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 예리항 홍어중매인 50번 김정진씨의 ‘두떼수산(전화 061-275-9018/010-3484-9019)’이다. 한 마리씩 넣은 비닐봉지 안에 ‘특상’이라고 쓴 종이 표찰이 들어있고 홍어 코에는 ‘흑산홍어’ 태그가 달려 있었다.

삼합을 주문하자 밑반찬을 차린다. 콩나물찜·백김치·제철나물무침. 콩나물찜 맛이 신기하다. 보기에는 영락없이 맹물에 콩나물 삶은 모양새지만 국물이 시원하고 향기롭다. 내공 깊은 맛이다. 배춧잎에서 황금빛이 도는 백김치도 쩡하게 잘 익었다. 홍어 접시가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표현처럼 몸통 살이 산복사꽃 같은 분홍색을 띄었다. 냉동하지 않은 국산 홍어가 잘 삭으면 비치는 빛깔이다. 그런 살 14~16점, 볼살·날개·연골 등 10여 점이 한 접시다. 돼지수육은 삼겹살과 다리살을 반반 담았다. 양념은 참깨·고춧가루·소금 참기름장과 묵은 고추장에 양념을 해 묽게 만든 즙 두 가지다. 내 입에는 기름장이 더 어울린다. 묵은지는 1년 됐다는데 정말 곰삭은 맛이다. 김치냉장고에서 삭혔다는 홍어를 돼지수육·묵은지와 삼합으로 먹으니 코를 쏘는 정도는 아니다. 순한 맛이다. 이 집은 이게 기준이란다. 살은 아주 차지다. 서울에서 수입 홍어만 먹던 입에는 마치 찰떡을 먹는 느낌이다. 이 집에서 만든 구기자·인삼막걸리와도 찰떡궁합이다.

잘 삭은 홍어를 냉장고에서 바로 꺼냈을 때는 속살에 분홍빛이 돈다.

잘 삭은 홍어를 냉장고에서 바로 꺼냈을 때는 속살에 분홍빛이 돈다.

삭힌 홍어를 냉장고에서 꺼내 시간이 흐르면서 공기가 닿는 쪽은 분홍빛이 허옇게 바랜다.

삭힌 홍어를 냉장고에서 꺼내 시간이 흐르면서 공기가 닿는 쪽은 분홍빛이 허옇게 바랜다.

먹고 있으니 딸기아이스크림처럼 색이 고운 홍어 애, 껍질을 자투리 고기들과 함께 달여서 굳힌 껍질묵을 한 접시에 담아 내왔다. 홍어는 부위별로 독특한 맛이 있는데 목포 사람들은 ‘일코 이애 삼날개 사살 오뼈’라는 말을 한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사라지는 삭힌 애의 고소함이나 설컹거리다가 녹아 없어진 묵의 미끈거리는 맛이 모두 특별한 경험이었다. 삭힌 홍어 살의 분홍빛에 집착을 보이는 내게 여주인 김 여사는 “삭으면서 분홍빛을 띠지만 꺼내서 공기 중에 나오면 공기와 닿는 부분은 분홍색이 바랜다”고 설명을 해줬다.

덕인집이 고추장을 담기 위해 지은 찰밥과 13년 묵은 고추장. 빛깔이 춘장 같다. 여주인 김말신 여사가 “맛 보라”며 인심 좋게 내줬다.

덕인집이 고추장을 담기 위해 지은 찰밥과 13년 묵은 고추장. 빛깔이 춘장 같다. 여주인 김말신 여사가 “맛 보라”며 인심 좋게 내줬다.

보리 순과 자투리 고기가 넉넉히 들어간 홍어 애국. 보통은 ‘애탕’이라고 하는데 이 집은 애국이라고 했다.

보리 순과 자투리 고기가 넉넉히 들어간 홍어 애국. 보통은 ‘애탕’이라고 하는데 이 집은 애국이라고 했다.

막걸리 기운을 빌어 이런 저런 말을 붙이니 김 여사는 그날 고추장 담느라 찹쌀밥을 했다며 누룽지가 반쯤 섞인 밥 한 그릇을 내왔다. 노지에서 겨울을 난 쌈채소와 춘장처럼 검은 빛 도는 고추장 한 숟가락도 함께였다. 13년 된 고추장이라고 자랑했다. 맛이 부드럽고 달다. 매운 맛은 거의 없다. 오랜 세월 깊어진 발효미(醱酵味)가 약동하는데 마땅한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장이 아니라 보약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3월 12일이면 보리 순이 먹기 좋게 자랐을 무렵이다. 옆자리 손님 상엔 보리 순 넣은 홍어애국이 끓고 있다. 구수하면서 톡 쏘는 발효취가 실내에 가득하다.

메뉴는 흑산 홍어 7만원, 삼합·홍어찜 각 8만원, 애국 2만원, 구기자·인삼막걸리 1뚝배기 7000원. 명절만 빼고 쉬는 날 없이 매일 오후 3시~12시 문을 연다.

목포역 옆 오거리 한 커브에 자리잡은 흑산도 홍어 전문 덕인집.

목포역 옆 오거리 한 커브에 자리잡은 흑산도 홍어 전문 덕인집.

목상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오래도록 홍어 명가의 자리를 지키던 금메달 식당. 상권이 신도시로 옮겨가자 남악신도시 법원 앞으로 이전했다.

목상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오래도록 홍어 명가의 자리를 지키던 금메달 식당. 상권이 신도시로 옮겨가자 남악신도시 법원 앞으로 이전했다.

숙소로 가며 목포 동부시장 실비집에 들러 포장 안주를 준비했다. 병어·웅어 회무침을 샀다. 병어는 목포 9미 중 하나다. 옥호를 확인 못했으나 시장 한 가운데 있는 실비집은 손님이 많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주인 ‘예산댁’은 그 와중에도 말대꾸 다 해가며 깻잎·양파·쪽파·대파·오이·풋고추를 우두두두두 썰어 넣고 긴 버들잎처럼 자른 병어회 올리고 고추장·고춧가루·참깨와 하얀 가루 두 가지를 더 넣더니 순식간에 버무려냈다. 웅어회무침에는 깻잎이 빠지는 대신 무채가 약간 들어갔다. 병어·웅어 회는 은빛이 선명한 게 모두 싱싱해 보였다.

목포 동부시장 실비집에서 병어회무침을 준비하고 있다.

목포 동부시장 실비집에서 병어회무침을 준비하고 있다.

완성된 병어회무침. 버들잎처럼 걀쭉한 병어 살이 도톰하다.

완성된 병어회무침. 버들잎처럼 걀쭉한 병어 살이 도톰하다.

보리가 팰 때 가장 맛있다는 웅어회무침을 만들기 위해 양념을 하고 있다. 이날 목포에서 팬 보리를 보았다.

보리가 팰 때 가장 맛있다는 웅어회무침을 만들기 위해 양념을 하고 있다. 이날 목포에서 팬 보리를 보았다.

순식간에 뚝딱 버무려낸 웅어회무침. 시장음식이라 맛이 강했으나 안주로는 그럴듯했다.

순식간에 뚝딱 버무려낸 웅어회무침. 시장음식이라 맛이 강했으나 안주로는 그럴듯했다.

목포와 뱃길로 가까운 진도의 유명한 전통주인 홍주. 40도의 증류주인데 기름진 생선의 회무침과 잘 어우러졌다.

목포와 뱃길로 가까운 진도의 유명한 전통주인 홍주. 40도의 증류주인데 기름진 생선의 회무침과 잘 어우러졌다.

일행은 숙소인 아원(芽原) 김순자 선생(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9-5호) 판소리 전수관에서 적벽가 눈대목(판소리에서 가장 두드러지거나 흥미 있는 장면)으로 꼽히는 ‘적벽화전(赤壁火戰)’의 숨 넘어가는 자진머리 가락을 동무 삼아 진도 홍주를 마셨다. 조조 달아나는 대목이 요즘으로 치면 개그콘서트다.

《조조가 황겁하야 입은 홍포를 벗어버리고 군사 전립 앗아 쓰고 다른 군사를 가리키며 "참 조조 저기 간다." 제 이름을 제 부르며 "이 놈 조조야 날다려 조조란 놈 지가 진정 조조니라."
황개가 쫓아오며 “저기 수염 긴 것이 조조니라." 조조 정신 기겁하야 긴 수염을 걷어잡아 와드득 와드득 쥐여뜯고 꽤탈양탈 도망헐 제 … 조조 잔말이 비상허여 "문 들어온다 바람 닫아라 요강 마렵다 오줌 들여라 뒨중 낫다 똥칠세라 배 아프다 농(弄)치지 마라 까딱 허면은 똥 싸겄다 여봐라 정욱아 위급허다 위급허다 날 살려라 날 살려라." 조조가 겁짐에 말을 거꾸로 잡어 타고…》

목포 동부시장입구에 있는 신안진애식당은 예약 손님만 받는다. 간판에 ‘목포에서 최고로 맛있는 집’이라고 썼다. 근거 있는 자신감일까.

목포 동부시장입구에 있는 신안진애식당은 예약 손님만 받는다. 간판에 ‘목포에서 최고로 맛있는 집’이라고 썼다. 근거 있는 자신감일까.

다음날 아침은 숙소에서 가까운 ‘신안진애식당(전남 목포시 동부로17번길 5-4 동부시장 주차장 동문 골목/전화 061-274-5564)’에서 병어조림을 먹었다. 제철 생선으로 회·찜·매운탕 등을 조리해주는 음식점인데 자리가 좁아(좌식 식탁 5개) 예약 손님만 받는다. 간판에는 ‘목포에서 최고로 맛있는 집’이라고 씌어 있다. 벽에 걸린 ‘발전 기원’ 시계를 보니 ‘도초서초등학교 23회 동창회’라고 씌어있다. 폐교된 학교다. 주인 김초단씨가 1971년 2월 졸업한 23회인가 보다. 나와 갑장이다.

신안진애식당의 병어조림과 12찬 아침상. 병어조림에는 특이하게도 주인의 고향인 도초도 야생 갓으로 담근 묵은지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반찬 모두 차지한 자리 값은 했다.

신안진애식당의 병어조림과 12찬 아침상. 병어조림에는 특이하게도 주인의 고향인 도초도 야생 갓으로 담근 묵은지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반찬 모두 차지한 자리 값은 했다.

목포 9미 중 하나인 병어와 껍질을 벗기지 않은 감자, 두툼하게 자른 무, 야생 갓 묵은지가 들어간 조림.

목포 9미 중 하나인 병어와 껍질을 벗기지 않은 감자, 두툼하게 자른 무, 야생 갓 묵은지가 들어간 조림.

아침상에는 병어조림과 12찬이 올랐다. 병어조림은 감자를 껍질째 토막 쳐 넣고 무도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었다. 특이하게도 묵은 갓김치를 씻어서 나물로 넣었다. 주인의 고향인 도초도에서 자란 야생 갓으로 담근 김치라고 한다. 반찬은 감태무침, 미역무침, 맹히(명이)장아찌 고추장무침, 표고버섯꽈리고추볶음, 열무김치, 깡다리(황석어)젓갈무침, 배추김치, 머위나물, 오이무침, 갓쪽파김치, 취나물 들깨무침, 시금치나물. 대충 만든 반찬은 없다. 모두 자리 차지한 값을 했다. 명이를 ‘맹히’, 황석어를 ‘깡다리’라고 하는 게 서울과 달랐다. 병어조림은 메뉴표에 ‘싯가’라고 써놨는데 밥값을 계산해보니 1인 1만5000원꼴이다. 우럭지리·갈치찜·농어찜·아나고탕·아구찜 값이 모두 3만/4만원이다. 2명이면 작은 냄비, 3명이면 큰 냄비를 시키면 맞겠다.

이런 집들 음식이 대개 그렇듯 제도권 요리 공부를 받지 않고 바닷가에서 대물림해 온 솜씨를 물려받아 맛이 개성 있고 안정적이다. 도심의 외식에 길든 입맛에는 고향 같은 미각이다. 나는 이런 맛을 찾아 지방을 떠돈다.

영란횟집의 민어회 한 접시. 가운데 하얀 껍질이 붙은 게 뱃살이고 분홍빛을 띤 것은 몸통 속살이다. 막걸리식초로 만든 초고추장과 쑥갓을 듬뿍 주는 것이 이 집 특색이다.

영란횟집의 민어회 한 접시. 가운데 하얀 껍질이 붙은 게 뱃살이고 분홍빛을 띤 것은 몸통 속살이다. 막걸리식초로 만든 초고추장과 쑥갓을 듬뿍 주는 것이 이 집 특색이다.

상추·쑥갓이 어울린 민어 된장 쌈. 내 입에는 막걸리식초로 만든 초고추장보다 이 조합이 더 맛있었다.

상추·쑥갓이 어울린 민어 된장 쌈. 내 입에는 막걸리식초로 만든 초고추장보다 이 조합이 더 맛있었다.

늦은 점심 겸 이번 여행의 고별식 메뉴는 민어다. 여름이 제철인 음식이지만 민어로는 나라 안에서 가장 유명한 ‘영란횟집(전남 목포시 번화로 42-1/전화 061-243-7311)’은 임자도에서 선돈 주고 큰 놈으로만 사들여 민어의 모든 요리를 계절에 상관없이 낸다. 1969년 어머니가 개업한 음식점을 딸 박영란(65)씨가 물려받아 48년째다. 휴일도 없이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문을 연다. 민어 회·회무침·전·모둠접시(뼈다짐·부레·껍질)·탕에 공기밥까지 코스 4인 한 상은 15만원이다. 5명이 가면 코스 한 상 시키고 회·전·무침 가운데 하나(4만5000원)을 추가하면 된다.

48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란횟집의 민어회무침. 이 집에서 회·무침회·전·모둠접시(껍질·부레·뼈다짐)·탕으로 이어지는 ‘민어 코스’가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8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란횟집의 민어회무침. 이 집에서 회·무침회·전·모둠접시(껍질·부레·뼈다짐)·탕으로 이어지는 ‘민어 코스’가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어전과 함께 나온 묵은지. 이런 조합으로 먹기는 처음이었다. 민어전이야 원래 맛이 있지만 묵은지를 곁들이자 맛이 환상적으로 바뀌었다.

민어전과 함께 나온 묵은지. 이런 조합으로 먹기는 처음이었다. 민어전이야 원래 맛이 있지만 묵은지를 곁들이자 맛이 환상적으로 바뀌었다.

민어 코스 중 모둠접시에는 부레(흰색)·뼈다짐(붉은색)·껍질이 올라왔다. 오른쪽 가루는 깨소금이다.

민어 코스 중 모둠접시에는 부레(흰색)·뼈다짐(붉은색)·껍질이 올라왔다. 오른쪽 가루는 깨소금이다.

민어 코스의 마지막인 민어탕·밥·6찬. 탕은 실망스러웠고 반찬도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

민어 코스의 마지막인 민어탕·밥·6찬. 탕은 실망스러웠고 반찬도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

집에서 만든 막걸리식초에 고춧가루·물엿·생강을 넣고 숙성했다는 ‘영란표 초고추장’ 맛이 특별하다고 말들을 많이 하는데 내 입에는 된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었다. 두툼한 뱃살이나 분홍빛 속살 한 점을 상추·쑥갓에 얹고 편으로 썬 마늘·풋고추 올려 된장 쌈으로 먹으니 민어 본고장에 온 실감이 든다. 산골 출신인 내 입에는 무엇보다 묵은지 얹어 먹는 민어전이 으뜸이었다. 민어탕은 뼈를 고아서 끓인 것이 아닌 듯 진한 맛이 없고 간은 짰다. 탕과 함께 나온 6찬도 특별히 당기는 맛은 아니었다. 오로지 민어로 승부하는 음식점이라는 생각을 혼자 했다.

민어 코스에 낮술을 곁들이니 오후 1시 39분에 시작한 늦은 점심은 2시간44분 동안 먹고 4시 23분에 끝났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아 본인의 이름을 걸고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민어 전문점으로 키운 영란횟집의 박영란 대표. 사진을 찍자 “안 된다”며 얼굴을 돌렸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아 본인의 이름을 걸고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민어 전문점으로 키운 영란횟집의 박영란 대표. 사진을 찍자 “안 된다”며 얼굴을 돌렸다.

영란횟집의 남자 화장실 한쪽 벽은 바위다. 목포진 역사공원 암벽에 기대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바위에서 사람 얼굴이 보인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영란횟집의 남자 화장실 한쪽 벽은 바위다. 목포진 역사공원 암벽에 기대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바위에서 사람 얼굴이 보인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카메라를 들자 여주인 박씨는 질겁을 하며 피했다. 요즘같이 온 국민이 사진가인 시절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사진 찍으면 얼굴이 이상하게 나온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남자화장실을 들어가면 카메라를 저절로 들게 하는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한쪽 벽이 바위다. 음식점 건물을 목포진 바위 봉우리 뒤편 절벽에 기대어 지은 것이다. 이 집만 그런 게 아니다. 옆집, 옆에 옆집으로 나란히 이어진 민어집들이 다 절벽에 기대어 들어앉았다.

목포 ‘민어의 거리’. 민어 전문 횟집들이 모여있다.

목포 ‘민어의 거리’. 민어 전문 횟집들이 모여있다.

초원실버타운 교차로에 있는 ‘민어의 거리’ 입간판.

초원실버타운 교차로에 있는 ‘민어의 거리’ 입간판.

‘영란횟집’이 있는 목포시 원도심의 만호동 1번지 골목은 ‘민어의 거리’로 지정돼있다. 이웃해 있는 만호유달횟집(061-242-8025), 임자도 민어전문 중앙횟집(061-242-5040), 포도원회집(061-245-3755) 등이 모두 민어 전문점이다.

목포에 두 차례 가서 1박 3일 43시간10분을 머물며 8가지 음식을 먹었지만 9미 ①세발낙지 ②홍어삼합 ③민어회 ④꽃게무침 ⑤먹갈치 ⑥병어회(찜) ⑦준치무침 ⑧아구탕(찜) ⑨우럭간국 가운데 준치·아귀·우럭은 먹지 못 했다. 모두 4~5월이 제철이다. 한번 더 가야 하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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