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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람의 미주알고주알바둑알] ②우리 꽃길만 걷자…훈훈했던 영재 vs 정상 대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 바둑면에 쓰지 못한 시시콜콜한 취재 뒷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다루는 코너입니다. '일기' 컨셉이라 긴장 풀고 편하게 쓸 작정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기사가 아닌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글입니다. 신문에서 쓰지 못한 B컷 사진과 취재 현장에서 찍은 셀카 등도 함께 올립니다. :-)


벚꽃이 만개하다 못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한 지난 주말. 슬프게도 아직 벚꽃놀이를 하지 못한 나는 경남 합천에서 벚꽃을 제대로 만끽하고 왔다. 합천군 해인사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벚꽃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는데, 그 광경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내가 서울에서 진짜 멀리 떨어진(4시간 가까이 차만 탔다) 합천까지 내려간 건, 제5기 합천군 초청 영재 vs 정상 기념 대국이 지난 10일 열렸기 때문이다. '정상 대표'는 다들 아시겠지만, 국내 랭킹 1위인 박정환(24) 9단이다.

"경남 합천군의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소개합니다." 내 오른쪽이 박정환 9단이다. 대충 보면 진짜 같지만, 이건 팔만대장경 사진을 찍어놓은 모조 판넬이다. 진짜 팔만대장경은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경남 합천군의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소개합니다." 내 오른쪽이 박정환 9단이다. 대충 보면 진짜 같지만, 이건 팔만대장경 사진을 찍어놓은 모조 판넬이다. 진짜 팔만대장경은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영재 대표'는 제5기 합천군 초청 하찬석 국수배 영재바둑대회서 우승한 설현준(18) 3단이다. 여정에는 다른 영재들도 함께했는데, 이번 대회서 준우승한 최영찬(18) 초단과, 지난 대회 입상자인 박종훈(17) 2단과 신민준(18) 5단까지. 'F4'를 위협하는 이른바 '영재4'다.

이번 코너의 주인공인 '영재4'를 소개한다. 왼쪽부터 박종훈 2단, 최영찬 초단, 나, 설현준 3단, 신민준 5단. 

이번 코너의 주인공인 '영재4'를 소개한다. 왼쪽부터 박종훈 2단, 최영찬 초단, 나, 설현준 3단, 신민준 5단.

우리는 대국 하루 전날 합천에 도착해서 해인사를 한 바퀴 둘러봤다. 여기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영재들의합장 행진이다. 해인사 마당에는 '해인도'라는 미로처럼 생긴 길이 있다. 이곳을 돌면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해설사님의 설명에 따라(실은 유창혁 9단의 엄중한 지시에 따라), 영재들은 합장하고 '해인도'를 뱅글뱅글 끝까지 돌았다. 각자 속으로 무슨 소원들을 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쑥스러워서 종종걸음으로 미로를 도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귀요미들 ㅎㅎㅎ

오종종종. 신민준 5단은 늦게 합류해서 합장 행진에는 함께하지 못했다. 

오종종종. 신민준 5단은 늦게 합류해서 합장 행진에는 함께하지 못했다.

톡 까놓고 말하면, 이번 대결은 승패가 중요하다기보단 훈훈한 이벤트성격이 강했다. 자라나는 영재의 성장을 위한 최정상 기사의 지도기라고 해야 할까. 승패 예측도 (설현준 3단에겐 미안하지만) 다들 박정환 9단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국 전에 박정환 9단에게 "박 사범, 우리 서울 일찍 올라가게 바둑 좀 일찍 끝내줘~"라고 농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조금 느긋한 마음을 갖고 대국을 지켜볼 수 있었다. 

박정환 9단(왼쪽)과 설현준 3단의 대국 장면. [사진 한국기원]

박정환 9단(왼쪽)과 설현준 3단의 대국 장면. [사진 한국기원]

결과는 역시 박 9단의 흑 불계승.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흥미로웠던 건 그 다음부터다. 두 선수는 대국이 끝나고 복기를 시작했는데, 어느 대회의 결승전보다 복기가 진지했다. 나중엔 신민준 5단까지 가세해 함께 복기를 했는데, 복기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시상식 때문에 관계자가 어쩔 수 없이 나서서 복기를 중단할 때까지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심각하게 복기에 열중했다. 

대국이 끝난 뒤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복기에 열중하는 박정환 9단(왼쪽)과 설현준 3단. [사진 한국기원]

대국이 끝난 뒤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복기에 열중하는 박정환 9단(왼쪽)과 설현준 3단. [사진 한국기원]

복기가 마무리되고 열린 시상식 자리서 설현준 3단은 내내 시무룩했다. 우승 트로피와 상금 800만원까지 받았지만, 패배의 충격이 컸던 탓인지 계속 풀죽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환 9단과의 대국 내용을 보면, 설 3단이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돌을 던졌다. 그럼에도 나는 관전자 입장에서 설현준 3단이 우승 트로피를 받으면서, 이제 그만 웃어도 될 듯한데 계속해서 시무룩시무룩한 게 너무 귀여웠다 ㅎㅎㅎ

고개 숙인 설현준 3단(오른쪽). 바둑을 져서인지 내내 시무룩했다. 

고개 숙인 설현준 3단(오른쪽). 바둑을 져서인지 내내 시무룩했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예전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고 '예쁘다'고 하는 게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진짜 완벽하게 예쁘거나 잘생겨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고보니 그게 어떤 뜻인지 알겠다. 순수한 가능성과 풋풋함 그 자체가 예쁘다는 말이었다.

최근 중국 바둑이 약진하면서 한국 바둑은 조금씩 밀리는 모양새다. 인정하긴 싫지만, 가장 큰 원인은 세대 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중국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신예 기사들의 층이 두터운 반면, 우리나라는 신예 기사 층이 얇아 소수에 기대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 의미에서 영재 선수들은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다. '예쁘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하다. 실제로 한국 바둑의 미래가 이들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람이 있다면, 시상식에서 밝힌 "앞으로 박정환 9단처럼 좋은 프로기사가 되겠다"는 설현준 3단의 각오가 꼭 지켜지길. 그리고 다들 꽃길만 걷길!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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