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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기자의맛따라기] 동해복집 복샤브샤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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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해안 울진의 죽변항에 갔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을 달려 도착했을 때 일행은 모두 허기에 지쳤다. 허겁지겁 대게를 한 마리씩 해치우고, 그 사이 끓인 생대구맑은탕으로 식사를 했다. 처음엔 시장해서 체면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잠시 후에는 맛이 체면을 잊게 했다. 싱싱한 해산물만이 낼 수 있는 시원하면서 달착지근한 맛. 바닷가 삶이 때론 고단해도 이런 맛의 특혜는 아무나 누리기 어려운 행복일 게다.

식사를 하고 마을 구경을 하는데 할머니가 마당 샘 가에서 복어를 손질하고 있다. 겨울철 동해에서 잡히는 밀복이다. "복어 독이 무서운데 다룰 줄 아시나 봐요." 낯선 길손의 지나는 말에 할머니는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별거 아니시더. 배 갈라 내장 버리고 눈 떼내고 피 빼고 깨끗이 씻으믄 괘않은 기라. 배 속에 있는 거라도 곤이(정소)는 먹을 수 있제. 복국 끼리먼 씨원하구마."

이 할머니 같은 분이 콩나물과 무, 파만 넣고 소금으로 간해 끓인 맑은 복국. 특별한 양념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시원하고 맛이 깊은 국물. 이것이 내게는 복국 맛의 기준이다. 그러나 배가 불러 복어는 포기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죽변항을 떠났다. 복 요리의 제철을 보내면서 그 아쉬움은 무시로 되살아났다. 서울에서는 이런 맛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쉬움이 갈증으로 변할 즈음 '기준'을 이해하고 있는 '동해복집'을 알게 됐다. 남편 김종태(49)씨는 사장 겸 복어조리기능사 자격을 갖춘 주방장이고 부인 함선옥(45)씨가 주방 보조 겸 지배인이다. 도우미 아주머니와 셋이서 13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명한 복집들이 비싸고 분위기도 삼엄해 접근할 염을 내기가 쉽지 않지만 이 집은 값도 싼 편이고 안방처럼 가족적이다. 무엇보다 장점은 양념을 절제할 줄 알고, 복어의 원 맛을 제대로 살려내는 게 훌륭한 복 요리라는 원칙을 지키려 노력하는 자세다. 주인의 정직함도 믿음직하다. 요즘 쓰는 복어의 '출신'을 묻자 참복인데 중국산이라며 숨기지 않았다. 다만 냉동이 아닌 냉장 상태로 수입해 신선하기 때문에 맛은 괜찮다고 덧붙였다. 90%가 단골인 이 집 손님들이 주로 찾는 음식은 복맑은탕(복지리)이지만 권하고 싶은 음식은 복샤브샤브다. 두 음식의 육수는 한 가지. 복어 머리와 뼈에 무.다시마.미역.멸치.가다랑어포를 넣고 달였다. 맛의 비법은 불 조절과 시간이라고 한다. 육수 맛은 가볍고 시원하다. 또 깔끔하고 부드럽다.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이 연상된다.

샤브샤브는 2시간 전까지는 예약해야 한다. 복어 살을 회 뜨듯 저며야 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으면 신선로 냄비에 육수가 나온다. 살을 저미고 남은 복어 뼈와 머리, 새송이버섯, 청경채, 대파 약간, 대추 세 알을 육수에 넣었다. 육수가 끓으면 커다란 꽃다발 같은 접시가 나온다. 새송이, 팽이버섯, 미나리를 큰 접시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저민 복어 살로 미나리 줄기와 팽이버섯을 돌돌 말아 꽃꽂이하듯 촘촘히 담았다.

복어 살 말이는 15개가 1인분이다. 끓는 육수에 하나씩 데쳐(10초쯤) 양념장(지리스)에 찍어 먹는다.복어 살, 미나리, 팽이버섯의 맛과 씹히는 감촉은 서로 다르면서 하나로 어우러지고, 어울리다가도 제 맛으로 돌아간다. 묘한 길항작용으로 엮어내는 3색 하모니가 그럴듯하다. 데치는 시간을 조금씩 다르게 하면 맛도 따라 달라진다. 남은 국물에 애호박을 넣고 끓여 주는 수제비도 빼놓을 수 없는 별미다.

이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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