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연애세포는 동면(冬眠) 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양선희 논설위원

얼마 전 30대 후반의 전문직 미혼 후배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하루는 그녀의 어머니가 “지금 난자를 냉동보관해두면 어떻겠느냐”고 묻더란다. 나중에 결혼해 불임으로 고생할 가능성을 미리 대비하라는 거였다. 어머니는 친구들도 나이 들어 결혼 안 한 자녀들이 많다 보니 엄마들끼리 모이면 이런 정보를 교환한다고 하더란다. 후배는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후에 아이가 갖고 싶으면 기증정자로 아이를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에 진지하게 검토 중”이라고 했다.

연애·결혼보다 싱글이 좋다는 젊은층 #일자리 같은 기계적 정책으론 안 돼

요즘 우리 연배 엄마들끼리 모이면 하는 얘기가 자식들 연애 걱정이다. 연애를 안 해서다. 연애하는 자식을 둔 엄마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30대인데 첫 연애도 못했다거나 소개팅도 안 하고 소개해준대도 거부만 하는 자식들 때문에 속 터지는 부모도 많다.

통계적으로도 드러난다. 통계청의 자료(2015년 기준)를 보면 우리나라 20~30대 여성의 미혼비율이 해당 인구의 절반을 넘는 55.2%였다. 숫자로 보면 더 심각하다. 이 연령대 여성은 663만 명인데 이 중 결혼한 여성은 297만 명. 10년 전만 해도 440만 명(전체 765만 명)은 기혼이었다. 나이 50살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는 여성이 2025년엔 10명 중 한 명꼴(10.5%)이 될 거란다. 이웃 일본도 남성 4명 중 한 명, 여성 7명 중 한 명이 나이 50세까지 평생 미혼이다.

결혼과 연애를 포기한 청춘들을 일러 ‘N포 세대’로 부른 지는 꽤 됐다. 우리 사회는 불안정한 일자리, 높은 집값과 교육비 부담 등의 사회문제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그래서 해결책도 이런 사회문제를 해소하면 젊은이들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서 저출산 문제를 해소할 것이라는 데로 모아진다. 정말 그럴까?

물론 사회여건 때문에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한데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너무 많다. 번듯한 전문직 남녀들도 결혼을 기피하고, 아예 혼자 살기로 작정하는 인구는 점점 늘어간다.

요즘은 ‘싱글 웨딩’ ‘비혼식’이라는 말도 있다. 아예 결혼 포기 선언을 하고, 평생 혼자 살 것을 다짐하는 의식이다. 주로 혼자 혹은 동성의 친구들끼리 드레스나 턱시도를 차려입고 촬영을 하는 싱글웨딩 사례가 늘면서 기존 웨딩스튜디오들도 ‘싱글웨딩 촬영 전문’ 간판을 내걸기 시작했다. 비혼식은 지난해 말 방송인 박수홍이 그동안 결혼식 축의금으로 낸 돈이 아깝다며 평생 독신을 선언하는 비혼식을 해서 축의금을 돌려받고 싶다고 말한 후 큰 호응을 얻는 화두가 됐다.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못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피하려는 경향도 보인다. 어쩌면 연애세포가 동면(冬眠) 중이거나 결혼하지 않는 게 시대의 풍조 혹은 문화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혼도 연애도 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이유를 물어봤더니 “귀찮다”는 대답이 많았다. 한 똘똘한 젊은이는 이런 농담인 듯 농담 아닌 농담 같은 말을 했다. 여성은 똑똑한 척하는 민폐형 여주인공에게 목숨 걸고 헌신하며 ‘X고생’ 하는 남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처럼 살고 싶어 하고, 남성들은 남자들만 나오는 요즘 영화처럼 여성은 없거나 조연인 세상에 살고 싶어해 만나지지 않는다는 거다.

남녀 간의 낭만적 감성은 TV 드라마를 통해서나 소비하는 세상이 된 건지도, 또 남녀 혹은 세대 간에 나름의 이유 있는 어긋남으로 인해 우린 결혼 없는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지도 모른다. 냉동난자와 기증정자로 아이가 태어나는 ‘결혼 없는 출산’이 이상하지 않은 세상을 조만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일자리와 소득 정책으로 결혼을 장려하면 출산이 늘 거라는 ‘낭만적’ 생각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개인의 행복과 가족을 보호하는 건 사회의 의무다. 청춘들의 연애·출산과 가족 등 행복과 직결된 인간의 자산을 보호할 방법을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인간관계에 대한 전통적 사고의 틀을 깨는 혁신적 발상이 요구되는 ‘4차 관계혁명’의 길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