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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엄마가 어떻게 키웠는데, 오빠가 부양을 거부하네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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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세 노모를 모시고 있는 주부 윤 모(55) 씨는 어머니를 부양하지 않는 오빠(63)에게 불만이 많다. 아버지와 일찍 사별한 뒤 어머니가 온갖 고생을 하며 오빠를 대학 공부시켰고 결혼할 때는 집까지 사줬다고 한다. 그런데도 오빠가 어머니를 모시지도 않고, 부양비도 한 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 씨는 "오빠는 재산이 많고 연금도 받고 있다"며 "오빠에게 부양료를 분담하자고 제안했지만 거부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윤 씨는 올 초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찾아 이런 고충을 털어놨다.

 15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부모 부양책임이 가족에 있다는 사람이 10명 중 7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3명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같은 기간 '가족과 정부·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사람이 18.2%에서 45.5%로 늘었다(통계청 사회조사).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부양이 필요한 노인은 급증하고 있지만 가족 부양의식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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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이런 의식 변화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부양을 둘러싸고 윤 씨처럼 형제끼리 다투거나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갈등이 생긴다. 한국가정법률사무소가 접수한 부모 부양 관련 상담이 2006년 49건에서 매년 증가해 지난해에는 183건이나 됐다.

 심지어는 부모가 자녀에게 부양비를 달라며 소송을 내기도 한다. 대법원에 따르면 2011년 201건에서 2015년 239건으로 증가했다. 지난해 상반기엔 103건이 접수됐다. 최근 박 모(32·여) 씨는 어릴 때 엄마와 이혼한 아버지(65)가 자신을 상대로 부양료 심판청구 소송을 제기한 사실을 알게 됐다. 박 씨는 성인이 된 이후 여러 차례 아버지의 도박 빚을 갚아줬다. 이렇게 하면 얼마 동안 별 탈 없이 지내다 시간이 좀 지나면 또 돈을 요구했다. 최근 몇 년 동안엔 매달 생활비를 보냈다. 그걸 도박에 탕진하는 걸 알고서는 1년 전 송금을 중단했더니 아버지가 소송을 낸 것이다.

부모 부양 두고 곳곳서 갈등 표출 #50대 여동생이 오빠 상대 부양비 소송 준비 #한국인 10명 중 3명만 가족 부양 책임 인정 #급속한 고령화 탓에 부양 갈등은 갈수록 심화 # #부양 책임 상담은 10년 새 4배로 증가 #"부양비 내놔라' 부모의 자식 상대 소송도 급증

 69세 여성은 아들(35)을 상대로 부양비 소송을 고려하고 있다. 그는 아들 네와 같은 아파트 단지의 옆동에 살면서 손자가 6세가 될 때까지 봐주고 집안일도 도맡아 했다. 그런데 3년 전 집을 팔면서 아들·딸과 갈등이 생겼고 연락이 끊겼다. 아들이 생활비를 주지 않아 집 판 돈으로 살았는데 그게 다 떨어져 소송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 부양 의무를 규정한 법률은 두 가지다. 민법(974조)에서는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간과 기타 생계를 같이 하는 친족간에 서로 부양의 의무가 있다고 포괄적으로 규정한다. 기초생활보장법에는 1촌 직계혈족(부모-자식) 및 그 배우자에게 부양 의무가 있다고 돼 있다. 민법보다 좁다. 기초생활보장법의 부양의무자는 당연히 민법상 부양의무 조항의 적용대상이 된다.

  기초생활보장법의 부양의무자도 국민들의 의식 변화를 반영해 그동안 범위를 축소해 왔다. 2000년 이 제도를 도입할 때는 생계를 같이 하는 2촌 이내의 혈족(조손,형제·자매)까지 부양의무자였다. 그러다가 2005년 조손, 2007년 형제·자매, 2011년 며느리(아들 사망)와 사위(딸 사망)를 제외했다. 지금은 부모-자식만 남았다.

  부양을 거부하는 자녀도 늘어나는 추세다. 현행 기초생보법에는 부양의무자(자녀)가 있지만 부양을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사실이 확인되면 부모를 기초수급자로 보호하게 돼 있다. 2001년 이런 사람이 3만3907명이었으나 2010년 11만9254명으로 증가했고 2015년에는 28만2609명이나 됐다. 건강보험 피부양자에도 88년 형제·자매를, 95년 백부·숙부를 포함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점차 범위를 좁혔고 내년 7월이면 형제·자매가 빠지고 이제는 부모·조부모만 남게 된다. 

정부가 기초생활보장법의 부양의무자 제도를 선뜻 없애지 못하는 이유는 예산 문제도 있지만 이 조항의 상징성 때문이다. 이걸 없애면 효(孝)의식을 해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부작용이 큰 것도 사실이다. 임모(75)씨는 독거노인이다. 과거 사업 실패 때문에 자녀들을 고생시켰다. 그래서 자녀와 관계가 틀어졌고 부양을 받지 못한다. 임씨는 자녀의 부양 기피를 입증하면 기초수급자가 될 수 있지만 행여 자녀에게 해가 갈까봐 이를 포기했다. 차상위계층 의료비 경감이라도 받기를 원하지만 이마저 불가능한 상황이다. 부양의무자 기준에 걸려 기초수급자가 못 되는 117만명의 '비수급 빈곤층'의 상당수가 이런 처지에 놓여 있다. 

 정부가 2015년 7월 기초수급자 수당을 4개로 쪼개고, 올해 부양의무자 소득기준을 2015년의 1.7배로 완화했는데도 수급자가 34만명 밖에 증가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는 당초 76만명이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능력 있는 자녀의 부양 기피도 문제다. 이심 대한노인회장은 "부양의무제는 효 문화를 위해 유지할 필요가 있지만 피해를 보는 사람도 있어 정답이 없다"며 "능력이 충분하게끔 자식을 잘 키워놓고도 버림받는 일이 정말 많다. 부양의무제를 완화하는 것보다 지금 기준조차 지키지 않는 자식을 감시하고 벌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를 반영해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이 19대 국회에서 재산을 받고 나서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면 재산을 환수하는 내용을 담은 민법개정안(일명 불효자방지법)을 발의했으나 처리되지 못하고 폐기된 바 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정종훈ㆍ백수진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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