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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 '휠체어 대통령' 탄생…80년 전 루스벨트와 비교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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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 좌파 집권여당 국가연합당(알리안사 파이스)의 레닌 모레노 후보가 2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AP=뉴시스]

에콰도르 좌파 집권여당 국가연합당(알리안사 파이스)의 레닌 모레노 후보가 2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AP=뉴시스]

휠체어를 탄 이 남성은 인구 1600만 명의 국가 수장에 막 뽑혔다. 중남미 에콰도르의 제44대 대통령에 선출된 레닌 모레노(63). 좌파 집권여당 국가연합당(알리안사 파이스) 후보로 출마한 그는 지난 2일(현지시간) 실시된 대선 결선투표에서 51%를 약간 넘은 득표율로 49%를 얻은 우파 야당 기회창조당(CREO)의 기예르모 라소(61) 후보를 따돌렸다(4일 오후 현재 개표율 99.65%).  

에콰도르 대선 결선에서 여권 후보 모레노 당선 #45세때 강도에 총 맞아 하반신 마비 '역경' 극복 #미국 루스벨트, 휠체어 탄 공식사진 거의 안 남겨 #"유약 이미지 우려"…이젠 시련 극복 아이콘으로

모레노 당선자는 남미에 최근 부는 ‘우파바람’을 잠재우고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에 이어 좌파 통치를 잇게 됐다. 그가 주목 받는 이유는 또 있다. 에콰도르의 첫 ‘휠체어 대통령’이란 점이다. 세계 각국 역사를 통틀어도 신체장애를 안은 대통령은 손꼽을 만하다.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소아마비로 인한 하반신 장애를 겪었지만 휠체어에 탄 모습의 사진은 극히 남아있지 않다. 백악관은 '유약한 이미지'를 우려해 촬영을 통제했다.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소아마비로 인한 하반신 장애를 겪었지만 휠체어에 탄 모습의 사진은 극히 남아있지 않다. 백악관은 '유약한 이미지'를 우려해 촬영을 통제했다.

대표적인 이가 미국의 프랭클린 D.루스벨트(1882~ 1945) 대통령이다. 민주당 출신 루스벨트 대통령은 3선 연임 제한이 없던 시절 연달아 재선에 성공,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재임 1933~45)으로 남았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New Deal)’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치인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던 1921년 39세의 나이에 두 다리가 불구가 되는 소아마비에 걸렸다. 그 후 평생 동안 목발이나 지팡이에 의지해야 했다. 이동할 때 휠체어는 필수적이었다.

포드 자동차를 개조한 장애인용을 타고 다닌 루스벨트 대통령. 그의 공식사진은 주로 의자나 차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포드 자동차를 개조한 장애인용을 타고 다닌 루스벨트 대통령. 그의 공식사진은 주로 의자나 차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그럼에도 당시 사진을 보면 루스벨트가 휠체어를 탄 모습은 거의 없다. 주로 의자에 앉아 있거나 주변 사람들의 팔을 이용해 몸을 지지하고 있는 식이다. 일각에선 “루스벨트의 장애는 언론과 대중에게 감춰진 비밀이었고 가족 일부만 알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데이비스 하우크와 아모스 퀴웨가 2003년 같이 낸 책 『FDR의 신체 정치: 장애의 수사학』이 이런 내용을 담았다(FDR은 프랭클린 D.루스벨트의 약자).

AP통신은 2013년 ‘휠체어에 태워지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희귀 영상’을 입수했다고 보도하면서 “아마 본인은 이 영상이 세상에 공개되길 원치 않았을 것”이라는 관련 연구자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거 과정에서 공화당 후보가 루스벨트의 신체 약점을 문제 삼는 등 ‘완전한 비밀’은 아니었다. 다만 당선 후에 백악관이 휠체어에 탄 대통령 모습을 사진기자들이 찍는 것을 통제한 정황은 확인된다. 루스벨트 재임 기간은 대공황에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겹쳐 국민에겐 강력한 리더십의 영웅이 필요했던 때다. 당시 통념상 신체 장애가 국정 수행에 지장을 줄 거라는 편견을 우려했을 수 있다.  

얄타회담에서 한자리에 모인 세 거두 . 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중앙포토]

얄타회담에서 한자리에 모인 세 거두 . 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중앙포토]

이에 반해 에콰도르의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된 모레노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휠체어를 벗어난 모습을 거의 보인 적 없다. 오히려 그게 ‘역경을 극복한 정치인’ 이미지를 덧씌웠다. 상대방 라소 후보가 1999년 금융위기 때 부당한 이득을 취한 것이 폭로되면서 ‘신체 건강하되 부도덕한 정치인’과 대비되는 효과까지 낳았다.  

인권 운동가 출신인 모레노는 페루 국경과 가까운 아마존 소도시 누에보 로카푸에르테의 블라디미르 레닌을 존경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레닌이란 이름도 아버지가 지어줬다. 관광행정 분야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모레노가 ‘신체적 역경’을 맞닥뜨린 때는 45세 때다. 1998년 1월 에콰도르 수도 키토의 식료품점 주차장에서 모레노는 강도가 쏜 총에 맞아 하반신 마비를 당했다. 

극심한 고통이 따랐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일명 ‘웃음 치료법’으로 극복한 뒤 이 치료법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에벤타’라는 재단까지 설립했다. 관련된 유머 시리즈 책도 여러 권 펴냈다. “웃음은 건강에 좋다. 그러니 의사들이 별도 처방을 하지 않는 것”이란 게 그의 지론이다.  

에콰도르 좌파 집권여당 국가연합당(알리안사 파이스)의 레닌 모레노 후보가 2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AP=뉴시스]

에콰도르 좌파 집권여당 국가연합당(알리안사 파이스)의 레닌 모레노 후보가 2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AP=뉴시스]


2007년부터 2013까지 부통령으로서 코레아 대통령과 일했던 모레노는 2013년엔 에콰도르 의회 추천으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반미 성향의 코레아보다 합리적인 성향으로 평가받는다.

선거 과정에서 모레노는 코레아 정부가 추진한 빈곤 퇴치와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계승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산유국인 에콰도르는 지난 1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3.86%에 달했지만 지난해 강타한 규모 7.8의 강진에 따른 복구 작업과 저유가 탓에 경제 침체를 겪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전망한 에콰도르의 경제성장률은 ?2.7%. 일자리 창출, 대규모 부채 처리, 사회 복지 유지 등 모레노가 짊어진 과제는 순탄치 않다. 그가 ‘휠체어 대통령’을 넘어 80년전 미국의 루스벨트처럼 개혁과 혁신의 지도자로 남을 수 있을지는 4년 임기에 달렸다.

에콰도르 좌파 집권여당 국가연합당(알리안사 파이스)의 레닌 모레노 후보가 2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AP=뉴시스]

에콰도르 좌파 집권여당 국가연합당(알리안사 파이스)의 레닌 모레노 후보가 2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AP=뉴시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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