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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대훈의 시시각각

진퇴의 기로에 선 김수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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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고대훈 논설위원

고대훈 논설위원

시작은 악연이었다. 김수남 검찰총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만남은 그랬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2013년 고검장 승진에서 탈락하고 수원지검장으로 ‘좌천’됐을 때 모두들 끝났다고 했다. 김수남의 부친과 박근혜의 불편한 관계를 입방아에 올렸다. 1980년대 말 영남대 총장이던 김수남 부친과 영남학원 이사이던 박근혜와의 갈등, 그리고 2007년 대선 때 부친의 이명박 후보 지지가 화근이란 말이 뒤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통합진보당 해산을 이끌어낸 수원지검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수사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공안을 중시한 박근혜의 눈에 들었다.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영전하고 검찰총장으로 발탁되며 완벽하게 부활했다. 악연의 고리를 끊는 반전 드라마였다. 김수남에게 박근혜는 분명 은인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만 없었다면 올 12월 2일까지 박근혜와 함께 임기 2년을 마치고 평생 인연을 이어갔으리라.

임명권자 박근혜 구속에 거취 고심 #‘바람에 눕지 않는 풀’ 될 수 있을까

김수남은 어제 박근혜를 구속수감했다. 자신을 임명한 박근혜를 제 손으로 구속한 검찰총장이란 기록을 역사에 남겼다. 그는 구속영장 청구에 앞서 “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거기엔 회한과 자책이 담겨 있다.

그에겐 박근혜의 비참한 말로를 막을 기회가 있었다. 2014년 11월 ‘정윤회 문건 파동’ 사건 당시 김수남 서울중앙지검장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이라는 진술이 나왔지만 그냥 덮었다. ‘문고리 3인방’이니 ‘십상시’니 하는 비선 실세들의 농단에 대한 수사 정보를 보고받고 불행의 묵시록을 예감했을 것이다. 목을 걸고 건의하지 않았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전횡도 견제하지 못했다. 미르·K스포츠재단의 모금 과정과 최순실씨 비리를 내사한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을 해임하는 과정에 눈을 감았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박근혜의 운명을 바꿀 수 있던 안타까운 순간들을 놓친 후회의 감정들이 밀려들 것이다.

김수남에게 박근혜 구속은 끝이 아니라 고뇌의 시작이다. ‘은인’ 박근혜의 구속 사태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칠 순 없다. 박근혜 기소 시점인 4월 중순을 전후해 사의를 표명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주군’ 박근혜를 저버린 ‘배신자’라는 허물을 떨쳐내긴 아무래도 힘들다. “궁궐에서 쫓겨난 여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격”이라며 ‘왕의 딸’ ‘비운의 공주’로 받드는 무리들이 있다. 보신에 급급해 비수를 꽂았다고 공격한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평가하는 무리들도 언제든 하이에나로 돌변해 물어뜯을 수 있다. 대통령도 쫓아내는 마당에 검찰 총수쯤이야 헌신짝 내버리듯 내일이라도 버림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번을 넘긴다 해도 5월 9일 좌파든 우파든, 보수든 진보든 완장 찬 세력은 김수남을 ‘박근혜의 사람’으로 분류해 적폐 청산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2004년 3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검사와의 대화’에서 “검찰 수뇌부를 믿을 수 없다”며 김각영 검찰총장을 공개적으로 면박하고 취임 4개월 만에 사실상 내쫓은 적이 있다. 용도가 다 된 김수남을 버리고 또 다른 정치검찰을 찾는 게 권력의 속성이다.

진퇴에는 양면성이 공존한다. 장수는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임명권자를 단죄했기에 옷을 벗어야 한다는 봉건시대적 사고는 곤란하다. 자리에 연연해 권력에 알아서 기라는 얘기도 아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는 길들여짐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길들여진다는 게 무슨 뜻이야”라는 어린 왕자의 질문에 사막여우는 “그건 관계가 생긴다는 뜻이야.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필요해져”라고 답한다. 권력에 길들여지면 정치검찰이 된다.

김수남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그에겐 하루하루가 운명의 날이며 역사가 되고 있다. 권력 앞에서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바람이 불어도 눕지 않는 풀이 될 때 정치검찰이란 오명을 떨칠 수 있다. 버티기냐 물러나느냐의 갈림길에 선 김수남의 선택을 주목하는 이유다.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