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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꽃·영춘화·히어리·노루귀 … 꽃 이름도 어여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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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 구례 야생화

구례 야생화 책, 색향미, 정연권

구례 야생화 책, 색향미, 정연권

야생화는 본디 산천에 지천으로 피는 꽃이었다. 때가 되면 자연히 피고 지니 사람이나서 길들일 필요가 없는 꽃이었다. 하지만 이제 야생화는 두메산골에서도 귀한 취급을 받는다. 주변에 농약과 같은 오염원이 있으면 얼굴을 내밀지 않는 야생화가 많아서다. 우리나라에 몇 남지 않은 야생화 보고로 꼽히는 지역이 지리산과 섬진강을 품고 있는 청정한 땅, 전남 구례다. 지리산 자락에 야생화가 갓 피기 시작한 3월 하순 야생화를 찾아 구례로 향했다. 야생화 탐방에 『색향미 야생화는 사랑입니다』(사진)의 저자 정연권(60·중앙대 겸임교수) 구례군농업기술센터 소장이 동행했다. 정 소장과 함께 구례의 봄을 알리는 야생화를 만났다. 

키가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야생화를 마주하려면 나를 낮추는 연습을 해야한다. 겸양의 미덕을 가진 사람에게만 허락된 장면일지도 모른다. 구례 상위마을에서 만난 민둥뫼제비꽃.

키가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야생화를 마주하려면 나를 낮추는 연습을 해야한다. 겸양의 미덕을 가진 사람에게만 허락된 장면일지도 모른다. 구례 상위마을에서 만난 민둥뫼제비꽃.

이름과 사연이 깃들다
야생화 탐방을 앞두고 마음을 졸였다. ‘야생’이라는 단어에 지레 겁을 먹은 터였다. 야생화라 하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골짜기나 낭떠러지 바위 틈새에서만 볼 수 있는 꽃으로 생각했다. 한데 정 소장이 야생화 탐방지라고 데리고 간 곳은 구례 서부 유곡마을, 그것도 감나무·매화나무를 가꾸고 있는 과수원이었다. 야생화를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옛 농부들은 ‘지심(잡초) 베기 징글징글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제초제를 사용하면서 농부는 ‘노동 해방’을 이뤘을지도 모르지만,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야생화까지 죽이고 말았죠. 반면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밭을 잘 살펴보면 야생화가 눈에 띄어요. 꽃과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어요.”

길섶이나 밭고랑에 흔히 볼 수 있는 별꽃. 하얀 꽃잎이 하트처럼 보인다.

길섶이나 밭고랑에 흔히 볼 수 있는 별꽃. 하얀 꽃잎이 하트처럼 보인다.

농약 사용을 최소화하고 있다는 과수원은 꽃 천지였다. 과수원 이곳저곳에 새끼손톱만한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별꽃’이었다. 오각형 모양의 꽃받침이 별처럼 보인다고 해서 별꽃이라 부른단다. 꽃받침 위에 얹힌 하얀 꽃잎은 하트(♡) 같았다. 정 소장은 별과 사랑을 한 데 품고 있는 이 로맨틱한 꽃에 ‘별에서 온 그대’라는 별명을 달아 줬다.


별꽃 군락 옆에 파란색 꽃무리도 보였다. ‘큰개불알풀’이었다. 큰개불알풀은 잡초처럼 생명력이 질겨 흔히 볼 수 있는 야생화다. 이름은 괴상한데 반해 하늘빛을 닮은 꽃은 앙증맞았다.


“큰개불알풀은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이 붙인 이름입니다. 열매가 개의 음낭과 비슷하게 생긴 데서 따왔지요. ‘봄까치 꽃’으로 바꿔 부르자는 학자의 의견이 있지만 공식 명칭은 그대로입니다. 다케노신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지원을 받아 한반도를 샅샅이 훑고 식물자원을 수탈한 장본인이에요. 우리 자생식물 4000여 종 중 무려 1000여 종에 ‘나카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야생화와 좀 더 가까워지고, 야생화에 우리 이름을 되돌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야생화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저마다 기구한 사연 하나쯤은 있는 듯싶었다. 밭두렁이나 논두렁에서 새파란 큰개불알풀을 다시 마주친다면, 꽃처럼 어여쁜 이름으로 부를 수 있길 바랐다.

군락을 이루는 큰개불알풀. 자연에 푸른 빛을 가진 꽃은 흔하지 않다. 

군락을 이루는 큰개불알풀. 자연에 푸른 빛을 가진 꽃은 흔하지 않다.


노랑의 세상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렸다. 질척질척한 땅을 밟고 다녀야 했지만 봄비가 야속하진 않았다. 날이 개면 물방울을 머금은 야생화가 활짝 꽃잎을 열어젖힐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희끄무레한 구름이 걷히자 샛노란 구례의 봄 색깔이 선명해졌다. 산등성이마다 개울가마다 자리 잡은 산수유가 노란꽃을 활짝 틔웠다. 산수유는 3월 중순 꽃망울을 여는데, 3월 하순이 되면 꽃망울 안에 숨어 있던 작은 꽃봉오리가 다시 한 번 개화한다. 구례의 봄이 깊어질수록 색이 짙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산수유가 만개한 구례 현천마을 풍경. 

산수유가 만개한 구례 현천마을 풍경.


섬진강 지류 서시천을 따라 걸으며 산수유가 빚어내는 봄 풍경을 만끽했다. 구례에는 산수유 200만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사람이 부러 심은나무가 있지만, 서시천 주변의 산수유는 씨앗이 개천을 따라 흐르며 자연 번식한 것이대부분이란다. 정 소장은 “야생화를 ‘사람이 조작하지 않은 자연의 꽃’이라고 정의한다면 서시천의 산수유도 야생화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생강나무에 레몬색 꽃이 피었다. 생강나무꽃은 봄꽃으로는 드물에 은은한 향이 난다.

생강나무에 레몬색 꽃이 피었다. 생강나무꽃은 봄꽃으로는 드물에 은은한 향이 난다.

구례의 노랑은 산수유만의 몫은 아니었다. 서시천을 따라 소담히 자리 잡은 대평마을·반곡마을 등 산수유마을의 돌담길을 거닐며 노란 야생화를 마주쳤다. 개나리와 비슷하게 생긴 ‘영춘화’, 인형 속에 인형이 들어 있는 러시아 전통 민예품 마트료시카처럼 꽃봉오리 안에 꽃봉오리가 줄줄이 딸린 ‘히어리’도 봄 색을 빚는 데 일조했다. 그늘진 돌무더기 사이에선 눈 속에서도 핀다는 꽃 ‘복수초’도 자랐다. 복수초는 물이 풍부하고 배수가 잘되는 환경에서만 서식한다는데 산수유마을이 꼭 그랬다. 구례의 노란 야생화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생강나무꽃’이었다. 생강나무는 봄 야생화 중 드물게 향이 났다.

지리산 일대에 서식하는 자생식물 히어리. 대롱처럼 생긴 꽃봉오리가 줄줄이 딸린 모양새다.

지리산 일대에 서식하는 자생식물 히어리. 대롱처럼 생긴 꽃봉오리가 줄줄이 딸린 모양새다.


“봄꽃은 나무에 잎이 나기 전 번식을 마칩니다. 벌이나 벌레를 꾀기 위해 화려한 색을 띄지요. 대신 향이 없는 꽃이 많습니다. 너무 서두른 탓인지 향기는 가져오지 못했나 봐요. 그래서 생강나무가 반갑죠. 생강나무 가까이만 가도 싱그러운 향이 퍼지거든요.”

골목을 따라가다 산수유마을 꼭대기 상위마을까지 닿았다. 상위마을은 산수유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사진작가가 봄마다 집결하는 장소다. 상곡마을에서 제비꽃을 발견했다. 제비꽃은 북적북적한 인파를 슬쩍 피해 이끼 낀 바위틈에 자라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보랏빛 제비꽃이 아니라 연분홍색 제비꽃으로 정식 명칭은 ‘민둥뫼제비꽃’이다. 나무에 달린 산수유꽃은 정수리 위에 있어 쉽게 눈을 맞출 수 있는데, 민둥뫼제비꽃을 자세히 보려면 무릎을 꿇어야 했다. 작은 꽃 앞에서 절로 겸손해졌다. 제비꽃의 꽃말은 ‘겸양’. 작은 생명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

2월 하순 께 꽃을 피우는 복수초. 구례 문척면 오산 일대에 자생한다.

2월 하순 께 꽃을 피우는 복수초. 구례 문척면 오산 일대에 자생한다.

 ·여행정보=서울시청에서 구례군청까지 차로 4시간 거리다. 구례에서 야생화를 볼 확률이 큰 곳은 산동면 계천리·원촌리·위안리를 아우르는 산수유마을이다. 산수유마을같이 산수유 군락지로 유명한 현천마을에도 광대나물·큰개불알풀 등 야생화가 자란다. 문척면에 있는 오산(541m) 기슭에도 야생화가 핀다. 항일운동가 임현주가 후학 양성을 위해 세운 건축물인 오봉정사 부근에서 현호색·할미꽃·복수초 등을 마주칠 수 있다. 구례군농업기술센터가 야생화 표본을 모아 둔 한국압화박물관을 운영한다. 운영시간 화~일요일 오전 10~오후 5시.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글=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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