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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좋아하는 곳에 살면 예술이 나온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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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호 08면

배병우 창작 레지던시. 사진 신경섭 작가

배병우 창작 레지던시. 사진 신경섭 작가

전남 순천에서 ‘한국의 조르바’를 만났다. 매화 피는 3월의 봄날이었다. 그는 지난 겨울을 영국 맨 섬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소렌토 등 지중해 일대에서 보냈다고 했다. 귀국해 순천에 오기 전에는 제주ㆍ서울ㆍ경주를 돌아다녔고, 다시 프랑스로 떠난다고 했다. 30년간 기우고 또 기운 청바지를 입고 불쑥 떠났다가 또 불쑥 돌아오는 게 그의 스타일이다. 휴대전화는 있지만 통화가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일생동안 아무 데서나 잤더니 아무데서 자도 안 피곤하다. 자는 곳이 내 집”이라는 그의 말은 카자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구절 같았다. 주인공 조르바를 한국에서 찾는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적임자일터다. 사진작가 배병우(67) 말이다.

순천 예술인촌 창작 레지던시 #1호 입주사진가 배병우

일생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그가 최근 순천에 새 거처를 마련했다. 순천시가 도심재생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구도심 내 창작예술촌을 조성하고 있는데, 그가 창작 레지던시에 입주한 1호 작가가 된 것이다. 83㎡의 땅에 들어선 배병우의 조그만 레지던시는 건축가 김찬중(더 시스템랩 대표)이 디자인했다. 순천에서 태어나 여수에서 자라난 그의 귀향 소식에 중앙SUNDAY S매거진이 그를 만나러 남도로 봄나들이를 떠났다. 한국의 조르바와의 동행길에는 음식과 술과 사람과 이야기가 넘쳤다.


그는 만나자마자 “점심부터 먹자”고 했다. 새로 문 연 그의 레지던시를 둘러보는 것도, 왜 순천에 새 보금자리를 만들었는지 묻는 것도 일단 잘 조려진 고등어 살에 진석화젓을 넣어 한 쌈을 먹은 뒤여야 했다. 평소 요리를 즐겨하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그다웠다. 약속장소는 순천시청 인근의 한식집 ‘대원식당’. “순천에 올 때마다 한 끼는 먹고 가는 곳”이라고 그는 소개했다.

단층 한옥인 식당 마당에 들어서자, 툇마루 위 창호지 방문 너머로 왁자지껄 사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독대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식구가 많았다. 서울에서, 강진에서, 또 벌교에서, 순천에 새로 움튼 배병우를 보려고 별렀던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친구가 전화 와서 보자고 했지. 그랬더니 또 자기 친구들을 데려온 거야. 우연인데 괜찮지 않아요?”

10여명이 방 안에 선 채로 두서없이 통성명을 하던 차에 밥상이 들어왔다. 4인 상을 기본 차림으로 상째 내는 호남한식이었다. 찬그릇 위에 또 찬그릇이 겹겹이 포개진 상이 놓이자 그가 외쳤다. “연금생활자인 제가 오늘 점심 쏩니다(그는 서울예술대학교 사진과 교수로 34년간 재직하다 2015년 정년퇴직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식당 주인이 가위를 들고 나타나 여럿이 나눠 먹기 좋게 음식을 자르며 권했다. “쌈이 세 종류가 있는데 젓갈에 싸서 드시면 좋아요. 오이 소박이도 좀 잡숫고, 이건 대갱이 무침인데 순천의 자랑이라. 남자들 양기에 좋아서 순천 어르신들이 꼭 챙겨 잡숴.”

처음 만난 사람들이 밥상머리에 모여 앉아 홀린 듯 먹기 시작했다. 밥 한 술에 봄 한자락이 넘어왔다. 순천에서 활동하는 화가 손준호(57)씨가 약통에 담아온 매화 꽃잎을 술잔마다 띄우며 흥을 돋웠다. 봄 취나물 무침 한 입에 매화꽃 동동 띄운 막걸리 한잔.

“열심히 살기만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이벤트”라는 손씨의 추임새에 흔들지 않은, 맑은 막걸리 세 병이 추가됐다. 배병우는 “내 친구들은 일흔이 다 되니 술바닥에서 은퇴했지만 (술도) 음식인데 왜 안 먹나. 내가 파주 헤이리 작업실에서 저녁 준비하면 음식 무제한, 와인 무제한이다”라며 흔들림없이 먹고 마셨다. 식당 주인이 창작 레지던시에 가서 먹으라고 싸 준 단감까지 들고 나선 길 위에서야 비로소 인터뷰가 시작됐다.

2층 다이닝 공간. 사진 신경섭 작가

2층 다이닝 공간. 사진 신경섭 작가

창작 레지던지의 갤러리(지하 1층, 지상1층). 사진 신경섭 작가

창작 레지던지의 갤러리(지하 1층, 지상1층). 사진 신경섭 작가

레지던시 옆 배병우가 삶터로 마련한 주택.

레지던시 옆 배병우가 삶터로 마련한 주택.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조르바처럼 사는 삶

순천 창작 레지던시를 어떻게 열게 됐나.

“후배와 제자 부탁으로 재작년에 순천대 사진예술학과 석좌교수를 맡게 됐다. 마침 순천시에서 구도심 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순천 출신의 예술가들을 모아 예술인촌을 만들려는 참이었다. 순천시 정원 박람회를 보러 관람객은 연간 500만 명 이상이 오는데 그들이 순천시로 잘 유입되지 않아서다. 그렇게 1호 작가가 됐다. 일사천리 진행된 거다. 나는 자유롭게 사는 사람인데…. 기왕 있는 거 편하게 있으려고 레지던시 근처에 2층짜리 낡은 집을 한 채 내 돈 주고 사서 고쳤다. 레지던시는 시 건물이니까 손님 오면 내 집에서 편히 놀려고….”
레지던시의 역할은 뭔가.
“통으로 뚫어 놓은 지하 1층 겸 지상 1층은 내 소나무 사진을 볼 수 있는 갤러리다. 2층은 다이닝 공간이고, 3층은 숙소, 옥상은 개방돼 있어 전망대 역할을 한다. 순천시에서 여러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데, 나무도 100년이 지나야 품격이 생긴다. 천천히 하나씩 해나가야 할 이야기다.”
파주, 제주, 순천까지 전국에 집이 많다.

“쉰 살까지 집 한 채 없었다. 거지였다. 그나마 서울예대에서 교수 생활한 덕에 안 팔리더라도 소나무 사진 계속 찍을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뜨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알함브라 궁전도 찍었고, 프랑스 샹보르성도 찍고. 한결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서 ‘배병우 스타일대로 찍어달라’고 한다.”
그 스타일이 뭔가.

“산수화이자 수묵화. 서양 사람들은 내 사진을 아주 동양적이라고 본다. 이탈리아 아트넷 사장이 날 만나러 한국에 와서는 ‘동양 수묵화의 전통을 사진으로 이어간다’고 하기에 이후로 나도 그렇게 내 사진을 소개한다.”
스스로 한국적이라고 생각하나.

“한국성이란 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구스타프 클림트도 자기 옆에 있는 여자들을 그렸다. 사는 곳에서 살면서 영감이 온다. 즉 사는 곳에서 예술이 나온다. 특히 예술가가 자기가 좋아하는 장소에 있으면 금상첨화다. 배병우도 태어나서 사는 곳이 한국인 거다. ‘윈드스케이프’라는 주제로 열고 있는 사진전도 제주에 있을 때 바람이 많이 불기에 그 바람을 담은 사진을 찍어 전시했는데 서구에서 열광하더라.”
소나무 사진 찍다가 매너리즘에 빠진 적은 없나.

“그게 나를 먹여 살려 주는데 찍어야지, 매너리즘이 어디 있나. 신제품이 있어야 구제품도 팔 것 아닌가. 그런데 처음보다 소나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참나무가 더 좋다.”
왜 그런가.

“침엽수는 땅을 죽인다. 독성이 있다. 독야청청이라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참나무는 땅을 풍요롭게 한다. 열매와 잎이 떨어져서 땅 생태계를 풍성하게 만든다.”

그는 얼마 전 경주에 갔다가, 산 속 암자에 기거하는 스님으로부터 “그리스인 조르바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웃었다. 그의 최근 행보를 들으면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마치 길 위에서 사는 듯 국내외를 수시로 여행한다. 스스로 “맨날 흘러다닌다”고 했다.

조르바라는 별칭 마음에 드나.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고로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가 내 좌우명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온 구절이다. 자유인이길 바라지만 조르바라고 말하긴 쑥스럽다.”
떠돌다 보면 피곤하지 않나.

“나는 집에 가면 피곤하다. 일생동안 아무데서나 잤더니 아무데서나 자는 게 안 피곤하다. 자는 곳이 내 집이다. 공기 좋은 곳이면 무조건 좋다. 프랑스 칸 앞에 생 마그리트라는 섬이 있는데, 옛 감옥을 미술관과 레지던스로 만들었다. 거기 묵으면 행복하다. 공기 맑고, 지중해의 따뜻한 바람 불고, 칸 시장에 가서 생선 사다 구워 먹으면 천국이다.”
경주 소나무. 사진 배병우

경주 소나무. 사진 배병우

창작 레지던시 3층 숙소의 창밖 전경.

창작 레지던시 3층 숙소의 창밖 전경.

배병우 창작 레지던시 뒷길.

배병우 창작 레지던시 뒷길.

끊긴 마을길 연결한,  소나무 결을 새긴 집

배병우 창작 레지던시는 중앙시장 인근 영동 공영주차장 앞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들어섰다. 노출 콘크리트 건물인데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우둘투둘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벽에 나뭇결처럼 선이 가 있다. 건물을 설계한 김찬중 대표는 “송판으로 거푸집을 짜 콘크리트를 부어 굳혀 떼냈더니 벽에 나무 무늬가 새겨졌다”고 설명했다.

건물은 가운데 공간을 두고, 계단이 겉을 빙글빙글 감싸고 있는 구조다. 건물 안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꼭대기층부터 지하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동할 수 있다. 이유 있는 디자인이다. 건물이 다리가 된 양 끊긴 마을 길을 잇고 있다. 1층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구도심을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옥천으로 갈 수 있는 작은 골목길을 만나게 된다. 큰 길에서 하천으로 나가려면 한참 돌아야했던 길의 물꼬가 작은 계단으로 터졌다.

공사 중에 옛 순천 읍성의 석축이 발견되어 그대로 보존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길가 1층 벽 일부를 통유리로 만들어 밖에서도 아래로 훤히 뚫린 지하 1층 갤러리를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전했다. 길 위에서 일생을 보내고 있는 사진가의 공간답게, 길 위에서 언제든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가 탄생한 셈이다.

어느샌가 2층 다이닝 공간으로 10여 명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배병우는 와인 애호가답게 직접 수입한다는 화이트 와인 두 종류를 여러 병 꺼냈다. 독일산 리즐링 와인과 프랑스산 유기농 와인이었다. 그는 “유기농 와인은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와인인데 와인 전문가들도 품종을 못 맞힐 정도로 특색있다. 밍밍한 듯하면서 마실수록 매력 있다”고 말했다.

그 사이 식객들이 품앗이하듯 인근 시장에서 사온 굴ㆍ새조개ㆍ멍게 등으로 순식간에 식탁이 풍성해졌다. 천일야화처럼 음식과 술을 곁들인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여느 작가와 다르게 작품 가격도 서슴없이 말하는 그가 절대 말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사진 찍는 장소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어느 날 TV 프로그램 ‘1박2일’ 경주편에 나와서 ‘여기가 배병우가 소나무 찍은 곳’이라고 말한 뒤 그 장소에 다시 가질 못했어요.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그 자리를 안 떠나고, 사람들은 사인해 달라 하고…. 일할 수가 없어요.”

전날 아무리 마셔도 새벽녘에 일어나 사진찍기를 거르지 않는 그에게 건강비결을 물었다. 그는 자기 분수(分數)껏 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고위관료 하라고 요청 들어온 적 있지만 관심 없어요. 능력도 없어요. 목에 힘주는 거 싫어요. 숲 속이 제일 편해요. 술 한 잔하고 침낭 속에서 자면 뱀이 지나가도 모르고 자요. 하하하.”

그와의 5시간 동행 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 소나무를 닮은 레지던시 앞에서 그가 무심하게 건넨 그의 작별 인사가 자꾸 곱씹혔다. “행복해야 해!” ●

순천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신경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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