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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한석규, 선과 악의 경계에서...

중앙일보

입력

악질 범죄자들만 모인 교도소. 그 속에서 바깥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범죄 설계자 정익호(한석규). 감옥 스릴러 ‘프리즌’(3월 23일 개봉, 나현 감독)은, 한석규(52)가 스크린에 처음으로 악역으로 등장하는 영화다. 한석규가 “시나리오를 봤을 때 두려웠다. 내 몸을 통해 ‘이 악독한 캐릭터를 표현하기 쉽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다. 배우 한석규와, 그가 그간 연기해 온 캐릭터를 살펴봤다.

'초록물고기'부터 '프리즌'까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글=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이젠 지나간 일이니 말해도 될 듯하다. ‘악마를 보았다’(2010, 김지운 감독)의 원래 캐스팅은 ‘악마’ 최민식과 ‘복수자’ 이병헌이 아니었다(연출도 김지운 감독이 아니었다). 한석규와 최민식이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한석규가 복수에 치를 떨며 최민식에게 돌진했을 거라고 쉽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악마’ 역할을 제안받았다.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장경철’이라는 캐릭터가 그의 몫이었던 것. 개봉을 앞둔 ‘프리즌’에서 생애 첫 ‘본격적인 악역’을 맡았다고 하지만, 한석규에게 ‘악역 욕구’는 예전부터 있었던 셈이다.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좋은 배우들의 필모그래피는 이중성을 띤다.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어떤 경향성을 가진다. 한석규도 마찬가지다. 그의 캐릭터는 순수한 멜로의 주인공부터 ‘프리즌’의 정익호처럼 악독한 인간까지 폭넓게 존재하면서 동시에 어떤 테마를 지닌다. 이 테마는 한 명의 배우·예술가가 작품 속 캐릭터를 통해 만들어 내는 어떤 가치 혹은 서사다. 물론 필모그래피에 있는 모든 영화를 하나의 테마로 아우르진 못한다. 작품을 선택할 때마다 사정이 있고, 항상 원하는 작품에만 출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잘 살펴보면 한 명의 배우는 나름 어떤 궤적을 그리고 자신의 영토를 지키며 전진한다.

양극단 사이에 서 있는 그의 캐릭터

한석규에게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경계’다. 그가 ‘악마를 보았다’나 ‘프리즌’의 캐릭터에 관심을 가진 건 ‘악의 극단’을 연기하는 것에 대한, 즉 ‘선악의 경계’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캐릭터들은 종종 자신도 모르게 혹은 의식적으로 어떤 경계선에 다가간다.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가 ‘초록물고기’(1997, 이창동 감독)의 ‘막동’이다. 한석규를 대표하는 이 캐릭터는 순수한 남자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미애(심혜진)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배태곤(문성근)을 접하면서 어둠의 세계로 접어든다. 그 안에서 그는 암흑가의 법칙에 휩싸인다.

한석규 주연의 영화 `초록물고기`의 한 장면.

한석규 주연의 영화 `초록물고기`의 한 장면.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은 순수와 어둠 사이에 있다. 이처럼 상반된 가치 사이에서 진동하는 캐릭터들은, ‘한석규’라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지탱시킨 원동력이다. ‘은행나무 침대’(1996, 강제규 감독)에선 현생과 전생, ‘접속’(1997, 장윤현 감독)에선 떠남과 만남, ‘넘버 3’(1997, 송능한 감독)에선 ‘넘버 2’와 ‘넘버 3’,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허진호 감독)에선 삶과 죽음, ‘쉬리’(1999, 강제규 감독)에선 우군과 적군의 경계 위에서 그는 고뇌했고 분투했고 마음 아파했다. 이런 작업이 가능한 건, 그는 카리스마를 휘둘러 대중을 압도하기보다 작고 소소한 감정들을 세공하는 데 더 능숙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계성은 2000년 이후 필모그래피에서도 여전하다. ‘그때 그사람들’(2005, 임상수 감독)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상관인 김 부장(백윤식)의 대통령 암살 계획에 느닷없이 동원된 부하 직원 주 과장. 그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격렬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물이다. ‘음란서생’(2006, 김대우 감독)에서 ‘윤리적인 책’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윤서’ 역을 맡은 그는 외설과 음란의 세계로 점점 빠져들어 간다.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을 통해 판매되고 영화화된 한석규.이문식 주연의 영화 `구타유발자들`의 한 장면.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을 통해 판매되고 영화화된 한석규.이문식 주연의 영화 `구타유발자들`의 한 장면.

여기서 어떤 변곡점을 찾는다면 ‘주홍글씨’(2004, 변혁 감독)도 있겠지만, 뚜렷한 건 ‘구타유발자들’(2006, 원신연 감독)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그가 예전까지 선택했던 이른바 ‘웰메이드 영화’와 다른 톤을 지닌다. 그는 처음으로 날것 그대로의 폭력에 대한 연기적 접근을 시도했고, 이것은 배우로서 그의 지평을 적잖이 넓힌 작업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2008, 곽경택·안권태 감독)의 백 반장이나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 박신우 감독)의 한 형사 같은 캐릭터가 낯설지 않았던 건, 어쩌면 ‘구타유발자들’의 경찰 캐릭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성과 악마성 동시에 지닌 악역으로

이후 한석규의 필모그래피는 어느 정도 변화를 추구한다. 오랜만의 코미디였고, 한석규와 김혜수의 뛰어난 연기가 돋보였던 ‘이층의 악당’(2010, 손재곤 감독). 안타깝게도 대중적 호응을 얻진 못했지만 반드시 기억돼야 할 수작이었다. 이후 한석규는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사극 장르에 전념한다. TV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 SBS)의 세종, ‘비밀의 문’(2014, SBS)의 영조 그리고 영화 ‘상의원’(2014, 이원석 감독)의 돌석. 하지만 그의 사극은 항상 궁중의 갈등과 음모로 휩싸였다. 그리고 ‘베를린’(2013, 류승완 감독)에선 다시 ‘쉬리’와 ‘이중간첩’(2003, 김현정 감독)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의 필모그래피에 종종 등장하는 분단과 냉전의 드라마는 한석규라는 배우가 지닌 경계적 특성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적’이라고도 ‘아군’이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고뇌. 이것은 ‘베를린’에서 표종성(하정우)을 놓아주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멘토 캐릭터를 내세웠던 ‘파파로티’(2013, 윤종찬 감독)와 지난 1월 종영한 TV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SBS)를 거쳐 도착한 ‘프리즌’. 이 영화에서 한석규는 그의 연기 인생을 통틀어 가장 무시무시하고 비인간적이며 악질적인 인간, 정익호를 연기한다. 그런데 이 캐릭터엔 아이러니가 있다. ‘절대 악인’처럼 보이지만 이 캐릭터는 송유건(김래원)의 멘토이자, 범죄자들의 냉철한 리더이며, 송유건에게는 인간적으로 따뜻한 면을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땐 괴물처럼 변해 교도소를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한석규는 ‘프리즌’에서 일반적인 악당이 아니라 인간성과 악마성을 동시에 지닌, 그 경계를 수시로 오가는 다층적 악당을 보여 준다.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흥미로운 건 ‘프리즌’이 ‘초록물고기’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초록물고기’에서 그는 배태곤이라는 ‘형님’을 모시는 폭력 조직의 막내 막동이었다. ‘프리즌’에선 위치가 바뀌었다. 정익호는 배태곤 같은 인물이고, 송유건은 막동 같은 캐릭터다. 어떻게 보면 두 영화의 흡사한 구도 속에서, 20년의 시간을 거친 한석규는 그 자리에 올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초록물고기’에선 막동이 제거되고, ‘프리즌’에선 정익호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어쨌든 죽는 사람은 한석규이고, 이것 역시 그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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