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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거침없고 자유로운 뮤즈, 오직 김민희

중앙일보

입력

이제는 김민희의 연기를 논할 때 구태여 TV 드라마 ‘굿바이 솔로’(2006, KBS2)까지 되짚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김민희가 배우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최초의 작품이지만, 이후 그가 보여 준 행보가 충분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김민희만큼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쌓아 온 배우는 드물다. 비교 범주를 30대 여배우로 국한하면 더욱 그렇다. 이제 그는 박찬욱 감독이 ‘아가씨’(6월 1일 개봉) 제작 보고회에서 말한 대로 “충무로 감독들이 제일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배우”가 됐다.

사진=전소윤(studio706)

사진=전소윤(studio706)

분기점에 ‘화차’(2012, 변영주 감독)가 있다. 김민희의 경력에 날개를 달아 준 영화다. 그가 연기한 차경선은 처음과 마지막 시퀀스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 그녀의 흔적을 좇는 약혼자 문호(이선균)의 플래시백으로 등장한다. 존재 자체가 의문투성이일 뿐 아니라, 기억 속 흐릿한 판타지 같은 여자. 게다가 경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경멸과 연민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하게 하는 임무를 띤 인물이다. 보기에 따라 천진한 소녀부터 표독스런 요부까지 다양한 결을 지닌 김민희는, 이러한 경선의 캐릭터에 설득력을 입힐 뿐 아니라 순간순간 기묘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엉망이 된 경선이 지인을 찾아와 어린애 같은 말투로 “언니, 저 택시비 좀 내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 비록 몇 초밖에 되지 않는 장면이지만, 여기에서 또렷하게 감지되는 독특한 기운은 온전히 김민희로부터 나온 것이다.

화차 김민희. [영화사제공]

화차 김민희. [영화사제공]

변영주 감독은 그를 가리켜 “공부 안 하는 천재 같다”고 표현한 적 있다. 전형적으로 잘하는 연기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내비치는 재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화차’를 구성하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 중 하나인 펜션 장면을 떠올려 보라.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부들부들 떠는 경선의 모습은 기이한 에너지를 뿜으며 화면을 장악했다. 시나리오에는 ‘어떤 소리가 들린다’ ‘욕실 밖으로 나온다’ 같은 간단한 상황 묘사만 적혀 있던 장면이다. 김민희에게 ‘화차’는 연기의 밀도를 채워 나가는 재미를 깨닫게 해 준 영화였다.

파격과 생활 연기를 오가는 유연함

뒤이은 출연작들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김민희의 자유로움 혹은 과감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장르영화의 장치를 두른 캐릭터 연기가 아니라는 점에서다. ‘연애의 온도’(2013, 노덕 감독)는 연기의 측면에서 보자면 김민희에게 처음으로 연기상(제4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안겼던 ‘뜨거운 것이 좋아’(2008, 권칠인 감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잠깐 이 영화를 먼저 되짚어 보자. 김민희는 활동 초기부터 대외적으로 그다지 대중 친화적인 이미지가 아니며, 바로 그런 이유로 현실감이 결여된 ‘스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른바 생활 연기에 도전한, 거의 최초의 시도가 바로 ‘뜨거운 것이 좋아’다. 김민희는 틈만 나면 사고를 치고 집 밖에 나가면 일단 넘어지기부터 하는 시나리오 작가 아미를 연기했다. 그는 이 영화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며 글을 쓰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후에 권칠인 감독이 “김민희를 배우로서 온전히 믿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라 회상한 장면이다. 지금 보면 이 영화 속 김민희의 연기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영화 '연애의 온도'.

영화 '연애의 온도'.

다시 ‘연애의 온도’ 이야기. 현실 연애의 지리멸렬함과 궁상맞음을 보여 주는 이 영화에서 김민희는 나 혹은 내 친구가 겪었을 법한 평범한 연애담의 주인공이 됐다. 이는 ‘화차’의 파격 이후 또 다른 파격으로 응수할 것이라는 예상을 빗겨간 행보였다. 감정의 디테일을 살려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훨씬 높은 난이도의 연기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별 후에 한 뼘 더 자라는 여자의 맨얼굴을 탁월하게 보여 주는 데 성공했다. 빗속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긴 했니?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아?” 하고 울며 소리치는 영의 모습은 현실에 단단히 발붙인, 새로운 차원의 김민희를 발견케 했다. 장르영화의 클리셰가 난무하는 ‘우는 남자’(2014, 이정범 감독)에서도 이 능력은 고스란히 발휘됐다. 김민희가 연기한 모경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실 감각을 붙들고 있는 캐릭터다. 죽은 딸의 기억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느라 시들어 가는 식물처럼 살아가는 여자. 메마른 모경의 얼굴에는 생활감이라는 김민희의 새로운 무기가 어른거린다.

‘아가씨’로 피어오르다

김민희는 어떤 감독과 조우하느냐에 따라 변화의 폭이 큰 배우다. 동시에 감독의 개성에 함몰되지만은 않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강점을 능동적으로 드러낼 줄 안다. 가녀린 외모와 연약한 발성이 발산하는 특유의 여성성은 그만의 좋은 개성이다. 이는 씩씩한 여자들이 활보하는 홍상수 감독의 개성 강한 세계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 때문에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는 홍상수 감독 영화 중 배우가 극의 재료가 아닌 주체가 되는 느낌을 주는 거의 유일한 영화처럼 보인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그리고 마침내 ‘아가씨’다. 지금 김민희는 작가영화의 아이콘과 같은 홍상수 감독의 세계와, 화려하게 직조된 박찬욱 감독의 세계를 유연하게 오갈 수 있는 보기 드문 배우라는 점에서 단연 흥미롭다. 박 감독은 김민희를 캐스팅할 때 그에게서 하얀 장모종 고양이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는 관객이 평소 느끼던 그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쉽게 다가설 수 없이 도도하고 새침한, 주변 공기에 온전히 섞이지 않고 예민하게 쭈뼛거리는 인상이라 할까.

아가씨

아가씨

김민희가 이를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여 활용한 캐릭터가 ‘아가씨’의 히데코다. 그에게서는 언제든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공기의 분위기를 뒤바꿀 수 있는 인물 특유의 기운이 느껴진다. 낭독회 장면이 대표적이다. 여기에서 신비로운 외모가 피사체로써 김민희의 타고난 조건이라면, 대사 처리는 그의 역량이다. 작은 움직임 하나 쉽게 허락되지 않는 상태로, 게다가 일본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김민희는 오직 대사 연기만으로 극의 분위기를 쥐락펴락한다. 인물의 변화 역시 또렷하게 감지된다. 히데코에게 일본어란, 음란한 책을 읽기 위한 지긋지긋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극 초반의 그는 생기 없이 읊조리는 인형 같다. 그런 그가 숙희(김태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감지한 뒤로, 자신의 삶에서 주체가 되겠다는 선언을 목소리로 나타낸다. 그의 변화는 연미복을 빼입고 음란한 낭독회를 벌이는 신사들의 추잡한 욕망에 채찍을 내려치는 힘이 된다. 줄에 매달린 인형 같았던 히데코는 어느덧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선다. 관계 역전의 쾌감이 물씬하다. ‘아가씨’의 김민희는 그렇게 아름다운 전시의 대상으로도, 거침없는 욕망의 주체로도 손색없다.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가 김민희의 재발견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의 성장을 이야기하기에 그것은 너무 간편한 수식이다. 요즘의 김민희에게선 자신만의 페이스로 충실하게 배우의 길을 걸어온 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단단함이 느껴진다. 그건 배우 스스로가 자각한 자기 확신이기도 하다.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에게 연기로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예전보다 커진 건 맞다. 그런데 그 기분이 버겁거나 나쁘지 않다. 오히려 힘이 된다고 해야 할까. 예전 같으면 ‘이게 아닌가’ 하면서 움츠러들었을 부분에서도, 이제는 적어도 자신 있게 지를 수 있다.” 김민희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이 말은 더 거침없고 자유로운 김민희를 기분 좋게 상상하게끔 한다. 아마 그 자신이 기꺼이 광대가 되는 코미디를 해도 근사하게 어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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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은선 기자 haroo@joongang.co.kr

※매거진M 16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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