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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릿한 킬힐, 21세기 신데렐라의 로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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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16면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 브래드쇼가 너무도 사랑했던 그 구두. ‘가십걸’에서 세레나가,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브레이킹 던’에서 벨라가 신었던 그 구두. 마놀로 블라닉은 세련되고 우아한 스타일과 화려한 색상, 높지만 소화 가능한 하이힐로 신데렐라이기를 원하는 여성들의 꿈을 실현시킨다.

‘섹스 앤 더 시티’ 캐리의 구두, #마놀로 블라닉 회고전 가보니

뛰어난 창의력과 기술로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75)의 구두 인생 45년을 회고하는 ‘아트 오브 슈즈(The Art of Shoes·1월 26일~4월 9일)’가 이탈리아 밀라노의 팔랏조 모란도 패션 뮤지엄에서 열렸다. 그는 3만 점이 넘는 개인 소장 자료 중 열정과 영감, 디자인 에센스가 담긴 212점을 고르고 손으로 그린 디자인 80점을 추려냈다. 여성들의 로망을 환상적으로 구현한 이곳을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다녀왔다.


구두 장인과 기술자들과의 대화에서 비법 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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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놀로 블라닉은 끊임없는 호기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우아함, 여성미, 아름다움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형태, 어느 스타일에서든 필요한 것을 포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인생에 대한 감정과 열정과 사랑을 담고 있는 그의 신발들은 완벽한 창조자의 내부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일터다.

마놀로 블라닉은 북아프리카의 서쪽 대서양에 있는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의 산타 크루즈 데 라 팔마 섬에서 1942년 11월 27일 체코인 아버지와 스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구두 사랑은 어머니로부터 나왔다. 그의 어머니는 최신 패션잡지를 보고 유행을 연구하며 자기 옷을 직접 만들었고, 동네 가게에서 파는 구두가 촌스럽다며 천을 사다 직접 만들어 신었다. 그 작업을 지켜보던 어린 마놀로에게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패션 디자이너였을 것이다.

하지만 창조적인 어린 아들의 열정과 잠재력을 눈치채지 못했던 부모는 아들을 외교관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스위스 제네바 대학으로 보내 법과 정치를 공부하게 했지만, 아들은 전공을 문학과 건축으로 바꿨다. 졸업 후 파리의 에꼴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아트를, 그리고 루브르 아트 스쿨에서 스테이지 세트 디자인을 공부한 후 68년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자파타(Zapata)라는 패션 부티크에서 머천다이저로 일하며 보그 워모 잡지에 기고했다.

전환점은 1970년 뉴욕 여행 중에 찾아왔다. 미국 최초의 보그 편집장이었던 다이아나 브릴랜드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포트폴리오를 넘기던 브릴랜드는 체리와 덩쿨로 발목을 감싼 형태의 디자인을 보고 이렇게 조언했다. “아이디어를 발에 집중하고 구두를 만들게. 자네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하게. 신발을 생각하지 말고 작품을 생각하게.”

그 뒤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의 구두 컬렉션을 제작해가며 캐리어를 쌓은 그는 모아둔 2000파운드로 자파타 부틱을 인수해 자신의 브랜드숍을 오픈했다.

74년 마놀로 블라닉은 헬무트 베르거 이후 두 번째로 UK 보그의 커버를 장식하는 디자이너가 된다. 처음에는 남자 신발을 디자인했으나 곧 창작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여성 신발로 전향했다. 통굽이 유행하던 70년대에 여성스러움의 극치이며 섹스 어필하는 킬힐을 부활시켰고 현재까지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구두 디자인이나 제작에 관련된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믿을 수 있을까. 그는 구두 제작의 모든 노하우를 구두 장인과 기술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었다. 끝없는 시도와 실수를 거듭해가며 창조한 구두들은 결국 전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BB 펌프(브리짓 바르도의 이니셜을 따 만든 이름. 언제 어디서나 어울리는 클래식),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파올리나 보나파르테로부터 영감을 받은 핸지시 펌프(Hangisi·보석 박힌 사각형의 바로크 버클이 장식된 마놀로 블라닉의 대표 구두), 스완 펌프(백조 깃털 같은 장식이 달린 구두), 캄파리 펌프(메리 제인 슈즈에서 영감을 받은 클래식. 발등을 지나는 벨트와 뾰족한 구두코가 특징), 카오스(가는 스트랩이 발목과 발등에만 달려 발의 대부분이 보이도록 디자인된 하이힐 샌들) 같은 대표 컬렉션을 탄생시켰다.

모든 신발은 직접 그린 스케치와 프로토 타입을 기반으로 공장에서 제작되지만, 신발의 정교한 모양과 힐 부분은 여전히 자신의 손으로 완성한다. 또 매 시즌마다 밀라노의 세 공장을 수 주간 방문해 공정을 일일이 관리하고 모든 컬렉션을 개인소장한다.

최근에는 미국 쿠튀르 위원회(Couture Council of America)상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수여하는 ‘대영제국 지휘관 훈장(CBE)’을 받았다. 33개국에 290개의 판매점이 있다.

이국적 문화와 예술에서 영감을 얻다

전시장은 자연·아트·건축·문화·지리적 영향·다양한 재료라는 6개의 주제를 중심으로 마놀로 블라닉의 장인 정신을 부각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갈라(Gala)’라는 제목의 첫 섹션에는 그의 풍부한 상상력을 잘 나타내는, 아이러니하고 판타지가 어우러진 신발들이 전시돼 있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2006)’에 협찬해 의상 감독 밀레나 카노네로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안겨준 신발 컬렉션도 이 섹션에 있었다. 구두가 클로즈업된 영화의 부분을 비디오 화면으로 보여줘 관람객의 이해를 도왔다.

두 번째 섹션에는 스페인·이탈리아·러시아·영국·일본 그리고 아프리카 각국의 이국적 문화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작품을 전시했다. 세 번째 섹션에서는 미술 작품이나 건축물이 어떻게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리한나, 베트멍(Vetements)과 협업한 부츠도 전시돼 있었는데, 허리까지 올라오는 길이도 길이지만 부츠 끝이 벨트와 연결되어 있어서 어떻게 신는 것인지 한참 생각해야 했다.

그가 특별히 사랑하는 자연과 보타닉 세계를 주제로 한 네 번째 섹션을 지나 ‘재료’라는 주제의 다섯 번째 섹션에 들어가니 장인의 기술로 완성된 정교한 세부묘사, 장식 및 색상 매치가 근사한 구두들이 주를 이뤘다. 손때 묻은 틀과 나무 모형, 디자인 원본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섹션은 이탈리아 보그 편집장을 지낸 안나 피앗지(Anna Piaggi), 영화배우 브리짓 바르도,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 등 마놀로 블라닉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에게 헌정하는 공간이었다. 화려한 디자인과 색상, 눈부신 보석으로 장식된 마놀로 블라닉의 신발들을 직접 그린 오리지널 스케치와 함께 비교해볼 수 있었다. 방마다 걸린 초상화와 고가구, 샹들리에와 바로크한 장식이 절묘하게 어울려 몽환적이고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외교관 출신으로 전 세계 주요 박물관에서 활동하는 예술 평론가이자 이번 전시를 2년간 준비한 큐레이터 크리스티나 카리요 드 알보르노즈는 “마놀로 블라닉은 신발을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 관객에게 선보이는 불가사의한 힘에 사로잡힌 예술가”라며 “유행의 영역을 넘어선 예술품으로서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순수한 상상력과 역동적인 아이디어를 느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최고의 아트북 출판사인 스키라에서 제작한 전시 아트북은 알파벳 단어를 활용해 작품 의도를 풀어낸 것이 눈에 띈다. 이 전시는 이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미술관, 체코 프라하의 캄파 박물관, 스페인 마드리드의 국립장식미술관, 캐나다 토론토 BATA 신발박물관으로 이어진다. ●

밀라노(이탈리아) 글 김성희 중앙SUNDAY S매거진 유럽통신원,  사진 마놀로 블라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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