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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인 더 룸 #16

중앙일보

입력

때마침 극장은 텅 비어있다. 범구는 시오의 손을 끌고 상영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붉은 의자들이 일제히 바라보는 스크린 앞에서 시오에게 격렬하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스크린에는 처음 관계를 맺는 서툴고도 다급한 남녀가 영사기 불빛을 받아, 과장된 몸짓으로 그림자들끼리 서로의 윤곽을 굶주린 듯 어루만진다. 

유난히 많게 느껴지는 단추를 푸르고 조금씩 드러나는 알몸의 부분에 입을 가져가 따뜻하고 끈끈한 침이 고인 입으로 부드럽게 서로를 자극한다. 바닥에 옷을 깔고, 알몸이 된 시오는 자위를 하던 예민한 부위를 범구의 허벅지 살에 밀착시킨다. 

범구는 시오의 건강한 가슴을 움켜쥔다. 시오는 범구의 허벅지 위에서 노련한 기수처럼 자극의 좌표를 신음으로 알려준다. '아, 거기에요 거기. 내가 제일 예민한 곳!' 이미 이성 따위 상실한 지 오래됐다. 눈을 마주 보고 앉아 격렬하게 움직인다.

"무슨 생각 해요?"

화들짝 놀란 시오에게 커피를 건네며 범구가 물었다.

"아. 그냥 이것저것... 별것 아니에요."

"우리... 얼굴 본지는 꽤 됐죠?"

"처음이 언제인지 기억나세요?"

"기억하죠. 젊은 여자가 여길 왜 왔을까, 카드 만들라고 왔나 생각했어요."

"저는 그전에 봤어요."

"네? 그전 언제요?"

"극장 앞에서 담배 피우는 거 봤어요. 첫눈 오던 날."

"그래요? 첫눈이 언제 왔지?"

"여기서 일한 지 오래되셨어요?"

"좀 됐죠. 편하거든요.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고. "

"범구 씨죠? 전에 기다리다 매표소에 있는 우편물 봤어요. 이름이 촌스러워서 오래 기억나더라고요."

"...너무 솔직한 거 아니에요? 그쪽은 이름이 얼마나 예쁘시길래."

"소금이요."

"네?"

"일본어로 시오가 소금이래요."

"아. 시오 씨구나."

시오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남녀가 짙은 키스를 나누며 혼미한 몸짓을 하고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에도 자주 시오는 극장을 찾았다. 하지만 범구와의 거리는 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시오는 커피나 따뜻한 카모마일 차 혹은 슬라이스 아몬드를 뿌린 쿠키를 구워왔고, 범구는 반가워하며 맛있게 먹었다. 범구는 시오가 올 때마다 따로 준비해놓은 공짜 표를 내밀었다. 하지만 시오와 범구 둘 중 누구 하나 먼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금 전에 시작했어요. 웬일인지 오늘은 사람이 좀 많네."

이 말을 하고 시오에게 표를 건넸다.

"... 사람 많아요? "

"사람 많으면 불편하죠? 나중에 오실래요?"

범구는 덤덤한 표정이다.

"볼게요. 커피 드세요."

시큰둥하게 범구에게 커피를 건넨 뒤 시오는 상영관으로 향했다. 공짜 표도 이젠 그다지 달갑지 않다. 범구의 호의를 바지 주머니 속에 대충 구겨 넣었다. 가끔씩 무심하게 대하는 범구가 남처럼 느껴졌다. 마치 기억상실이라도 한 듯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할 때는, 헤어질 때마다 손을 흔들어주던 남자가 맞는지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범구는 시오의 감정을 매일 리셋 시키는 장치가 있는 것처럼 느꼈다.

시오는 이제 성인영화에 이골이 났고, 아무런 자극이 없었다. 슬슬 졸음이 쏟아졌다. 30분쯤 뒤, 객석에 머리를 기대고 단잠에 빠져버렸다. 갑자기 '때르르르르릉!' 소화기 경보가 극장 안에 울려 퍼졌다. 시오는 단잠에 취해 영화에서 들리는 효과음인지 현실인지 감을 상실했다. 밤새 범구 생각을 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시오는 그제야 눈을 떴고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주위만 두리번거리며 살펴보고 있었다. 우왕좌왕 사람들이 객석을 빠져나갈 때 멀리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갑자기 시오의 팔을 잡았다. 당황한 표정의 범구였다.

"빨리 나와요. 빨리!"

시오는 범구의 고함에 놀라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끌려 나왔다. 바깥으로 나왔지만 불길이나 누전의 흔적은 없었다. 한참 뒤, 극장을 찾아오던 중학생들의 소행으로 밝혀졌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이해가 되자, 트램펄린 위에서 텀블링을 하는 꼬마가 된 것처럼 기뻤다. 자신을 걱정하며 허둥댔던 범구의 표정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마치 위기에서 구원을 받은 주인공이라도 된 듯했다.

"당분간 영업을 좀 쉬고 공사를 해야겠네요. 몇십 년을 방치해뒀으니, 이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뭐."

시오는 범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고마워요."

시오는 매표소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범구에게 천천히 다가가 꼭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감정에 취해 끌어안고 범구의 입술을 달콤한 사탕처럼 핥았다. 하지만 범구는 안긴 시오를 안아주지도 않았고 입술을 열지도 않았다. 범구의 얼굴을 따듯하게 잡고 입술을 비벼도 반응이 없자 시오는 키스를 멈췄다.

"... 싫어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범구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범구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그런 거 아니고..  좀 당황했어요."

"놀라게 했으면 ...미안해요. 저 이만 갈게요."

"잠깐만요."

범구는 시오를 붙잡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옥상에 잠깐 바람 쐬러 갈까요?"

고개를 끄덕이고 시오는 앞장서는 범구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밟았다. 잠시 뒤, 범구는 옥상 방에서 인스턴트커피 두 잔을 가져왔고 둘은 쓰러져가는 도로변 야경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김이 오르는 잔을 하나씩 든 채 어깨가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했다.

"저 별로 괜찮은 사람 아닌데. 알고 나면 실망할 거예요."

"말 돌리지 말고 정확하게 좀 말해줄래요?"

"멋있는 사람이네요. 시오 씨는."

소년원 이야기라던가 이모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시오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도 좋은 말 상대는 되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든지. 시오 씨가 허락해준다면요."

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범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니, 도무지 이해 안 갈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말을 할 수 없었다. 좀 전에 범구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마음을 받아달라고 말하던 시오였다. 하지만 뜻밖의 이야기가 범구의 입에서 들려오자 시오는 이런 남자에게 마음을 품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어색하지 않게 둘러대고 시오는 극장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오는 동안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터벅터벅 걸으며 골몰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집안의 온기가 느껴지자, 마음이 조금 노곤해졌다. 현관문을 열 때는 고백을 했어도 피해자가 된 것 같다는 생각, 외출복을 벗었을 땐 다른 남자들과 엉망이 되어버린 관계, 클렌징크림을 듬뿍 떠 얼굴에 문지르며 거울 속 지워져 가는 화장을 바라볼 때는 '나는 늘 피해자 역할을 했구나' 라고 생각했다.

침대에 눕자 연인보다 친구로만 지내고 싶어 범구가 지어낸 얘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내일도 보고 싶으면 그건 내일 생각하자.'

남자들의 욕망이 어디서 모여 어떻게 페니스로 가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어도, 시오는 그냥 범구가 궁금했다. 그날 밤, 시오는 혼자인 집에서도 자신의 몸을 만지지 않았다. 범구가 자신에게 고백했던 이야기들을 몇 번이나 곱씹어 보다 잠이 들었다. 소년원과 근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시오는 어젯밤 범구의 이야기들이 마치 달콤한 악몽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어젯밤 꿈속의 상처가 온몸에 나 있는 걸 바라본 느낌. 헛헛한 감정이 밀려왔다.

며칠이 지나 새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이사할 곳을 물색했다. 빛이 잘 드는 깨끗한 집을 찾기 위해 분주했다. 회사 몇 곳에 이력서도 보냈다. 그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만나 평범한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자신이 경험했던 범구와 극장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편두통처럼 머릿속에서 범구가 지끈거렸지만, 그럴 땐 친구를 재촉해 소개팅을 했다.

점심때가 다 되어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이력서를 넣은 세 군데 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고 그 회사 면접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날짜를 확인하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에 스스로를 책망했다.

서둘러 입고 갈 외투를 정리했다. 한동안 입지 않았던 검은 바지에는 드문드문 하얀 먼지가 묻어있었다. 세탁할 정도는 아니었다. 허둥지둥 화장실로 가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힘껏 털자, 구겨진 종잇조각이 또르르 바지에서 튀어나왔다. 처음엔 알지 못했지만, 펴보니 극장에서 범구가 주었던 공짜 영화 표였다.

 무시하고 다시 옷장으로 갔을 때, 문득 처음 시오가 극장을 방문했을 때가 기억났다. 조심스레 방문했던 첫날, 영화 표에는 15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시오는 그날 범구의 표를 받고 괜히 들떠서 15라는 글씨를 몇 번이나 쳐다봤다. 아마도 방문객 순서가 15번이라는 뜻이었을 거다. 공짜 영화 표에는 'S'라는 이니셜이 적혀있었다. 다른 표에는 어떤 글자가 쓰여 있을지 궁금했다.

시오는 극장에 갔을 때 입었던 옷을 하나씩 기억하며 옷 주머니마다 손을 넣어보았다. 어떤 날엔 24, 어떤 날엔 39, 그리고 'S' 라고 적힌 표는 다섯 장. 시오의 'S' 인지 스페셜의 'S' 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범구에게 시오는 순서대로 나열된 숫자가 아닌 'S'였다.

매표소 장부에 적혀있던 글씨체가 떠올랐다. 범구의 흔적만 보아도 심장이 아리던 감정이 갑작스레 거친 들짐승처럼 시오의 심장을 물었다. 그간 잊으려 노력했던 이성적인 행동들이 모조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범구가 자신을 가볍게 생각했다면 오히려 망설일 이유가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쉽게 취했던 여자들처럼 대했을 것이다. 범구가 극장에 앉아 'S'라는 글자를 몇 번 썼을까.

"남자 몸 처음 봐요?"

“그 새끼랑 있는 거 또 한 번 내 눈에 띄면 죽여 버린다.”

“애기야, 여기 뭐 있는지 아니? 궁금하지 않아?”

"미쳤냐 내가 너 같은 년이랑”

"남자 고추가 여기에 들어가는 거 알아?”

"엄마 잠옷 찢은 게 누구야?"

"저질이네, 너."

시오는 상처가 되었던 말을 모조리 떠올려 봤다.

'각자의 산에 둘 다 고립되어 있구나.'

그동안 자신을 함부로 다뤘던 남자들 생각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채워졌지만, 미움과 원망 같은 것들이 눈물에 모조리 쓸려 나왔다.

'산에서 내려가고 싶어.'

화재경보기가 울리자 다급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뛰어왔던 범구의 표정이 눈앞에 가장 먼저 떠올랐다. 시오는 면접 장소에 가지 않고 서둘러 준비를 하고 오션시네마로 달려갔다.

'상처 안 주면 되잖아요. 줘도 내가 줄 거야.'

극장 앞에 '공사중'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사 중인 인부도 없었다. 매표소에는 빈 의자 두 개가 체념한 노인처럼 우두커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말 모든 게 다 꿈이었나.' 일시적인 혼돈을 느꼈다.

범구가 일을 그만두었다는 생각이 들자 한기가 몸에서 느껴졌다. 천천히 상영관 문을 열어보았다. 시오가 열어 재낀 문틈으로 스민 불빛이 스크린에 반사됐고 무표정한 시오의 커다란 그림자가 시오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정말 어딘가로 갔다면 범구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시오는 범구의 전화번호를 받아두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하나씩 밟기 시작했다. 범구와 어둠 속에서 한참 서로 마주 보며 서로를 느끼던 자리는 하얀 페인트 위에 거뭇거뭇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마법이 풀린 동화 속을 걷는 듯 기시감이 느껴졌다.

옥상에 남아있는 건 도시를 떠도는 먼지 삼킨 바람이었다. 의미 없는 듯한 거리의 소음이 다시 시오의 귓가에 가득 찼고 허탈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철컥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초췌해진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오는 저 사람이 누구지 하고 한참 얼굴을 바라보았다. 범구임을 확신하자 오한을 느끼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머리가 하얗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범구도 시오를 발견하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몹시 생기를 잃은 얼굴이었다. 어둡던 범구의 표정이 해맑아지며 천천히 시오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시오는 범구에 대한 원망과 북받쳤던 그리움에 범구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범구는 귀엽게 인상을 찡그리며 시오를 살짝 포옹했다.

"잘 지냈어요?"

"잘 지낸 것 같아요?"

그대로 범구는 시오를 안고 키스를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만큼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에 깊게 몰입했다. 그러다 천천히 입술을 떼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커피 한잔 안 줄 거예요?"

시오의 입에 가볍게 뽀뽀하고 범구가 대답했다.

"뭐든 다 해줄게요."

범구는 시오의 손을 끌고 방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범구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물을 끓이고 잔을 꺼냈다. 눈앞에 범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시오는 애드벌룬을 타고 머나먼 둘만의 세계로 떠나는 듯했다.

키스하느라 턱에 자란 수염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로의 안부를 물은 뒤, 한동안 둘 사이엔 더 이상 대화가 없었다. 범구는 키스를 하던 모습과 달리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이대로 범구가 또 물러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시오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해봤잖아요."

"시오 씨 생각 많이 했어요. 나도."

시오의 이야기가 끝나고 한참 지나서 시오에게 한 대답이었다.

"원래 겁 많아요?"

"시오 씨는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요."

"나 좋잖아요."

"많이요."

"겁쟁이 맞잖아요."

"......"

시오는 차를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잔을 입에서 떼고 고개를 떨구니 양말을 뚫고 엄지발가락이 시오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오는 은근슬쩍 숨기려고 했지만, 시오를 바라보던 범구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모른 척해야지 웃으면 어떻게 해요! 민망하게."

좀 전에 보인 의기양양한 태도가 부끄러워 무릎을 감싸고 괜한 투정을 부렸다. 범구는 옆으로 다가가 시오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한 팔에 안기는 시오의 어깨 곡선과 굽은 등이 팔에 감기자 범구는 정말 오래전에 안겨봤던 어머니의 온기가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충동적으로 행동하던 치기 어린 소년이 어느새 꿈틀거렸다. 마음의 반대 방향에서 소년이 손짓했다. 범구는 소년을 달래고 시오의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새초롬한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시오는 고개를 돌리고 범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입술이 닿았고, 바위에 나란히 앉은 부드러운 말미잘처럼 서로의 바다에 깊이 빠졌다. 마룻바닥에서 장난에 심취한 새끼 강아지들처럼 귀엽게 뒤엉켰다. 체취가 밴 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고, 시오는 범구의 스웨터 안으로 손을 넣어 긴장한 젖꼭지의 색깔을 상상했다.

범구가 시오의 굴곡을 느끼려 팔을 움직일 때, 범구의 근육은 날씨처럼 자꾸 모양을 바꿨다. 시오는 움직이는 범구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따뜻한 가슴 위에 손가락을 폈다 오므렸다가, 등을 쓰다듬고 좁은 소매로 손을 넣었다. 온몸의 스위치에 불이 들어온 듯 모든 감각이 환해졌고 맨살을 닿고 싶어 서로를 더 세게 안았다. 시오의 손길이 범구 안에 있던 소년을 자꾸 일으켰다.

범구의 세월이 만든 따뜻한 팔 근육이 시오를 더 자극했다. 상처받은 소년이다가 어른이 된 남자, 그리고 부드러운 피부는 범구에 대한 허기를 더 증폭시켰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더 가까이 범구를 느끼고 싶었다. 스웨터에서 손을 꺼내 범구의 벨트를 더듬었다.

그때, 범구는 되짚으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던 연화 방에서의 감각이 거칠게 자극하는 걸 느꼈다. 범구는 시오의 손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제지했다. 입술을 떼내 어느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시오는 이대로 범구가 저만치 도망쳐버릴 것 같아 몽롱한 눈빛으로 범구의 눈을 애절하게 바라보며 절박한 목소리로 범구의 귀에 속삭였다.

"그만두면... 죽어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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