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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충성, 항의, 탈퇴의 길목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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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 훈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 훈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운명의 날 아침, 필자의 소망은 독자들과 다르지 않다. 필자 역시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 이후에는 그동안 우리네 삶을 헝클어 놓았던 분투, 격앙, 대립이 정돈되길 바라고 있다. 우리 모두는 최종 심급으로서의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후속 조치들이 차분히 진행되길 희망한다.

오늘의 헌재 선고 이후 #민주적 절차에 대한 충성 혹은 #충성에 바탕을 둔 항의 선택해야 #우리 공동체에 희망이 있다 #민주 절차로부터 탈퇴 유혹에 #빠져들면 분열하고 표류한다

하지만 소망과 분석, 기대와 해설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정치현상을 사회과학자의 논리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필자로서는 탄핵 판결 이후 나타날 몇 가지 흐름을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탄핵 찬반 세력은 오늘 오전 11시 헌재 선고가 내려지면 그 결정을 충성(loyalty)스럽게 받아들이거나 아예 탈퇴(exit)를 감행하거나 혹은 헌재 결정에 대해 항의(voice)하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될 것이다. 이 선택지의 향배에 따라 우리 민주주의는 진전과 퇴행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게 된다. 시민들의 절차적 충성심이 폭넓게 발휘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로 복귀할 수 있다. 하지만 탄핵을 지지하는 다수파이든, 탄핵을 반대하는 소수파이든 헌재 결정에 대한 탈퇴 전략을 고집한다면 우리 민주주의는 대혼란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먼저 헌재 결정에 대한 시민들의 납득과 수용으로서의 충성(loyalty).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민들의 선택이자 의무는 제도적 절차에 대한 충성이다. (1)박근혜 정부의 중대한 일탈→(2)촛불시민들의 저항과 대통령 탄핵 요구→(3)대의기관으로서의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4)최종적 권위를 지닌 기관으로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라는 일련의 전개가 헌법과 법 절차의 테두리에서 진행되었음을 인정하고 그 결과를 찬반 여부에 상관없이 승복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곧 민주주의에 대한 충성이다. 탄핵 인용이라는 결과가 나올 경우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충성의 짐은 소수파인 탄핵 반대파에게 지워진다. 탄핵 반대세력이 인용이라는 헌재의 결정을 수용하고 제도와 절차에 대한 충성심을 보인다면 우리 민주주의는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다. 만일 탄핵소추가 헌재에서 기각될 경우(그 가능성이 크지는 않겠지만) 탄핵을 지지하는 다수 시민의 승복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 과정은 훨씬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다수파이든 소수파이든 기대와는 다른 결과에 대해 승복의 문턱을 넘지 못할 때 탈퇴(exit)라는 치명적 유혹에 빠져들게 된다. 일부 극단적 그룹에서 벌써부터 거론되고 있는 헌재 결정에 대한 불복종 운동이 바로 탈퇴 전략이다. 다수파이든 소수파이든 불복 운동은 단지 최종 판결자로서의 헌법재판소의 권위를 부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불복 운동은 헌법재판소뿐만 아니라 대의기관으로서의 국회의 역할, 헌법이라는 최고규범, 민주적 절차의 정당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중대한 일탈이다. 민주주의는 단지 제도를 선택하고 운영하는 것만으로 정착되지 않는다. 민주적 제도와 절차가 시민들에게 생활화되고 그것이 공동체의 유일한 게임의 규칙(the only game in town)으로 내면화될 때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가 비로소 공고화되었다고 평가한다. 달리 말하자면 헌재 선고에 대한 불복 운동은 우리가 1987년 민주화 이전의 거칠고 불안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수파와 소수파 모두에게 승복이 그다지 여의치 않고, 탈퇴는 민주주의가 용인하는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면 남는 선택지는 항의(voice)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헌재 결정에 대한 항의는 탈퇴를 염두에 둔 항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충성을 염두에 둔 항의(voice with loyalty)여야만 한다는 점이다. 탄핵 기각이 이뤄지는 경우 이에 대한 다수파의 항의는 민주적 절차 내에서 이뤄져야만 한다. 탄핵을 요구했던 다수파 시민들이 박 대통령의 복귀를 인정하면서도 준법의 테두리에서 촛불시위를 재점화하고 국회가 탄핵소추를 다시 추진하도록 압박하는 것이 곧 충성스러운 항의일 것이다.

탄핵 인용이 이뤄질 경우 소수파의 항의 역시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충성 위에서 이뤄져야만 한다. 박 대통령의 퇴진과 이후 치러지는 조기 대선이라는 절차의 정당성을 받아들이면서 소수파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찾아야 한다. 탄핵 반대론자들은 대선 국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내고 세력을 다시 결집할 기회를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오늘의 선고 이후 다수파와 소수파 모두가 민주적 절차에 대한 충성 혹은 적어도 충성에 바탕을 둔 항의를 선택할 때에만 우리 공동체에 희망이 있다. 다수파든 소수파든 민주적 절차로부터의 탈퇴라는 유혹에 빠져든다면 우리는 험난한 분열의 바다를 표류할 수밖에 없다.

장 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