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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백남준은 나의 욘사마 … 14년 매달려 결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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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구보타 여사가 3일 미국 뉴욕 장례식장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뉴욕=연합뉴스]

"나는 늘 그에게 목말라했지요. 그는 나에게 '욘사마' 같은 존재였습니다."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68). 백남준과 40여 년을 함께한 그는 남편의 반려자이자 예술적 동지였다. 남편의 그늘에 가려 크게 빛은 못 봤지만 그 역시 잘나가던 비디오 예술가였다. 그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남편을 꼬박 10년간 돌봤다. 무척이나 자유분방하고 바빴던 백씨였기에 아내는 남편이 쓰러지기 전까지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에 늘 목말라했다. 그래서 구보타는 주변 사람들에게 "남편이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가 된 느낌"이라고 털어놓곤 했다. 슬픔에 젖은 그를 3일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지금 심정은.

"남편은 2012년까지는 꼭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2012년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 존 케이지(그와 같이 활동했던 미국의 유명 전위 음악가:1912~92년)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남편은 2012년에 케이지를 위해 음악회를 열고 퍼포먼스도 하겠다고 되뇌었다. 그 집념이 너무 강해 그때까진 살 것으로 믿었다. 남편이 자신의 기념관조차 보지 못하고 그렇게 빨리 갈 줄은 솔직히 몰랐다(경기도가 광주에 짓고 있는 '백남준미술관'은 2008년 개관 예정이다). 일전엔 남편에게 "당신이 몸져누운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살아 있으니 축하한다"고 했다. 4월엔 뉴욕으로 돌아가 코리아타운의 단골 한국음식점에서 그 10년을 축하하자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못했다. 그가 너무 보고 싶다."

-플로리다에서 별세했는데 그곳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뉴욕의 겨울은 너무 추워 우리 부부는 남편이 쓰러진 96년부터 겨울만 되면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바닷가로 내려가 살았다. 남편은 86년 마이애미 국제공항의 요청을 받고 자신의 작품을 설치했다. 그때 3만5000달러가량을 받았는데 그걸로 바닷가에 작은 아파트를 사뒀다."

-최근 마이애미에서의 생활은.

"남편은 몸이 아팠지만 그래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했다. 오전 8시면 일어나 동네 카페에 가 아침을 먹었다. 아침 식단은 늘 커피.바나나.요구르트였다. 그는 식성이 좋아 점심때는 레스토랑에 가 많이 먹었다. 마이애미에선 설치 작업은 못했지만 그림과 스케치, 그리고 글쓰기도 했다. 또 아무도 모르게 때때로 시를 쓰곤 했다."

-그 외 여가 시간엔 주로 뭘 했나.

젊은 시절 일본 도쿄 작업실에서 함께한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부부.

"그가 심심해할까 봐 집에 케이블TV를 설치했는데 한국 방송이 나왔다. 그런데 남편이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아주 좋아했다. 나 역시 한국에 그렇게 좋은 드라마가 있는지 몰랐다. 그전엔 '겨울연가'를 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남편은 "겨울연가도 괜찮지만 대장금이 훨씬 좋다"고 말하곤 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똑같은 프로를 두 번 보기도 했다. 아프기 전엔 TV 모니터로 작품을 만들었어도 시청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아파 눕게 되자 TV를 가까이했다. 한국 방송을 보면서 향수를 달래는 것 같았다. 그는 또 마이애미 해변에 가는 것도 무척 좋아했다. 젊고 예쁜 여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름다운 여자들과 함께 있는 걸 즐겼다. 그것은 남편의 병을 다스리는 약이기도 했다. 그는 여자의 몸을 자주 작품 오브제로 쓸 정도로 이성을 좋아했다. 내심 불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만나 결혼했나.

"63년 일본 도쿄에서 처음 만났다. 그가 독일에서 막 도쿄에 왔을 때인데 일본에선 이미 상당히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신문엔 '미친 한국인이 희한한 퍼포먼스를 한다'는 식의 기사가 크게 실리곤 했다. 피아노를 부수는 괴짜 예술가로 통했다. 결혼은 처음 만난 지 14년 만인 77년에 했다. 지난 얘기지만 나는 남편을 다룬 기사를 처음 보면서 반드시 그와 결혼해야겠다고 작심했다. 어머니에게 신문기사를 보여주면서 "이 사람과 꼭 결혼할 거야"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뉴욕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그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마라톤을 잘한다. 쫓고 쫓아서 결국 남편을 차지했다."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나.

"그는 명석한 철학자이고 훌륭한 재담가였다. 아주 지적이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전혀 지겹게 만들지 않는다. 또 내 일도 잘 도와줬다. 그러니 결혼 생활 하루하루가 즐거운 기억이었다. 그뿐 아니다. 남편은 5개 국어를 할 정도로 똑똑했다. 나는 영어와 일어밖에 못한다. 그래서 우린 영어와 일어를 그때그때 섞어 썼다. 한국어를 배워볼 생각도 했지만 너무 어렵다. 지금 한류가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안 그랬다. 요즘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가 뜨면서 일본 여자들이 '욘사마, 욘사마'라고 한다는데 나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나의 욘사마'를 찾았다. 백남준은 나의 욘사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수십 년을 앞선 '선구자'였다. 적지 않은 한국 사람이 나를 미워한다는 것을 안다. 내가 당대의 천재이자 한국의 영웅인 백남준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병든 뒤 내가 잠시라도 그의 곁을 비우면 주변의 한국인들이 시게코는 어디 갔느냐고 힐난조의 소리를 하곤 했다. 한국인들의 성격은 김치처럼 화끈하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한국 사람 같지 않다. 그는 예의바르고 조용한 사람이다. 되레 내가 가끔 어떤 일에 대해 '당신은 한국 사람이니 한번 과감하게 도전해 보라'고 채근하곤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뉴욕 등에 있는 스튜디오를 개조해 그의 기념관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나 플로리다엔 다시 가고 싶지 않다. 거기서 그를 잃었기에 슬픈 곳이다. 가능하면 일본으로 돌아가려 한다. 니가타가 고향이어서 그런지 나는 눈이 좋고 더운 나라는 싫다. 한국 언론과 이런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돼 기쁘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구보타 시게코는

동양가치 추구한 ‘부창부수’ 비디오 아티스트

남편 백남준과 같이 1960년대 '플럭서스(Fluxus)'운동에 심취한 뒤 70년대 이후 비디오 예술에 몰두해 온 전위예술가다. 플럭서스란 '흐름, 끊임없는 움직임'을 뜻하는 라틴어. 예술계에선 60~7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국제 전위 예술운동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것이 의외성을 수반하는 다양한 퍼포먼스인데, 피아노를 때려 부수는 것 같은 과격한 행위예술이 단적인 예다.

구보타는 플럭서스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언론을 통해 백씨를 처음 알게 됐다. 그러곤 반했다. 그는 63년 백씨가 도쿄에서 '피아노 때려 부수기' 퍼포먼스를 벌인 후 파티를 연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친구의 도움으로 그 자리에 참석해 첫인사를 나눴다. 그 뒤 뉴욕이 플럭서스의 메카로 떠오르자 두 사람은 64년 각각 뉴욕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자연스레 재회가 이뤄졌다.

이후 구보타는 눈물겨운 구애작전을 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격의 백씨는 결혼을 원치 않았다. 재정적 후원자였던 형 백남일씨도 두 사람의 결합에 반대하는 바람에 구보타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첫 만남 후 14년이 지난 뒤 구보타는 백씨를 지아비로 맞았다.

결혼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 뒤에도 두 사람의 관계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백씨는 2002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작품의 오브제로 등장했던 첼로 연주자 샬롯 무어만과 승용차 안에서 진한 사랑을 나눴다고 실토해 분란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어쨌든 백씨만큼의 명성을 얻진 못했지만 구보타도 수십 차례 개인전을 연 화려한 경력의 비디오 예술가다. 남편이 비디오 조각과 설치, 위성방송 등 다양한 양식을 개발한 반면 그는 비디오 테이프 작업과 비디오 조각에 치중해 왔다. 대표작은 '뒤샹의 무덤'. 20세기 현대미술의 상징적 인물인 마르셀 뒤샹의 삶을 비디오로 형상화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서울올림픽미술관도 '조깅하는 여인'이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서구 문명의 각종 미디어를 동양적 관념으로 승화시킨 게 많다. 그래서 아시아인으로 예술적 정체성을 추구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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