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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귀환 노랑, 反트럼프 파랑 … 소리 없는 외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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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호 07면

공감과 연대의 상징 리본

1 지난달 열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배우 루스 네가가 단 파란색 리본. 정의를 상징한다.

1 지난달 열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배우 루스 네가가 단 파란색 리본. 정의를 상징한다.

2 네팔 성 인신매매 희생자 센터에서 밝힌 붉은 리본 모양의 촛불. 에이즈에 대한 관심과 투병을 의미한다.3 국내에서 열린 핑크 리본 행사. 유방암에 대한 치료 등을 뜻한다.

2 네팔 성 인신매매 희생자 센터에서 밝힌 붉은 리본 모양의 촛불. 에이즈에 대한 관심과 투병을 의미한다.3 국내에서 열린 핑크 리본 행사. 유방암에 대한 치료 등을 뜻한다.

4 세월호의 노란 리본을 단 헐크 마크 러팔로. 노란색은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AP=뉴시스·중앙포토]

4 세월호의 노란 리본을 단 헐크 마크 러팔로. 노란색은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AP=뉴시스·중앙포토]

3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친 한 남자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는 옛 애인이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인에게 “나를 기다린다면 노란색 리본을 집 근처 오래된 참나무에 묶어두라. 만약 나무에 리본이 없다면 집을 그냥 지나쳐 다른 곳으로 가서 새 삶을 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터였다. 버스를 타고 집에 다가갈수록 사내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차마 참나무를 직접 볼 수 없었다. 그는 버스 운전사에게 대신 나무를 봐달라고 부탁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버스 속에서 승객들의 환호가 터졌다. 그 참나무엔 100개의 노란 리본이 달렸다.

인질 남편 둔 미국 주부 노란 띠 #무사귀환 염원 세월호 리본에 영향 #빨간색 리본이 에이즈 인식 바꿔 #윽박지르지 않는 세련된 변화 운동 #단체·질병마다 만들어 수백 개 난무 #“핑크 축제 대신 유방암 방지 행동을”

1973년 토니 올랜도가 부른 팝송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색 리본을 묶어두오(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 가사 내용이다. 노래는 발매 3주 만에 미국 라디오에서 300만 번 방송됐고 그해가 가기 전 910만 장 이상의 음반이 팔렸다. ‘이종환의 디스크쇼’나 ‘황인용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국내 라디오에서도 수없이 흘러나와 국내 올드 팬들에게도 익숙한 곡이다. 이 노래는 73년 빌보드지 ‘올해의 노래’에 선정됐다. 노란 리본은 이 노래와 함께 미국인의 삶에 뿌리를 내렸다.

중세 기사들 소속 알리려 띠 매고 다녀

리본은 끈이나 띠 모양의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머리·모자·선물·훈장 따위의 장식에 쓴다고 사전에 나와 있다. 표식으로 이용되는 리본은 서양에서 중세 시대부터라고 알려졌다. 기사들이 자신의 정치적 소속을 알리려 문장 비슷한 띠를 매고 다녔다고 한다. 1642년 영국 내전에서 왕당파에 대항하는 의회파 군은 통일된 군복이 없었다. 삼국지에서 노란 두건을 쓴 황건적처럼 그들은 피아 식별을 위해 노란색 띠를 맸다. 청교도군을 조직화한 올리버 크롬웰은 그의 철기군에 노란색을 상징으로 썼다.

노란색은 왕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됐다. 미국 독립전쟁 행군가에도 노란색 리본 가사가 등장했다. 남북전쟁과 서부개척 시대에 군인 부인들은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으로 노란색 머플러 등을 매는 풍습이 있었다. 73년 ‘참나무에 노란색 리본을 묶어두오’라는 히트곡이 나온 배경이 된다.

이 노래가 나온 후 6년이 지난 79년, 이란 혁명이 터졌다.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에 미국인 52명이 인질로 잡혔다. 남편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한 인질의 부인은 팝송에 나온 대로 나무에 노란색 리본을 묶어뒀다. 다른 인질들의 가족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동참하면서 전국적인 캠페인으로 발전했다. 노래는 국민가요가 됐고, 리본은 메시지가 됐다. 리본은 어떤 가치에 대한 자각, 주의 환기, 지원, 동참, 공감 등을 상징하는 인식 리본(Awareness Ribbon)으로 승화됐다.

이후 노란 리본은 미국에서 해외로 파병된 군인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뜻으로 쓰인다.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사건에서 노란색 리본을 쓴 것도 이 영향으로 보인다. 실종된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민들은 노란색 리본을 달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호의 노란 리본은 추모·분노·저항으로 의미가 변해갔다. 세월호 사건 이듬해인 2015년 중국 양쯔강에서 둥팡즈싱(東方之星)호가 침몰해 442명의 사망자를 냈다. 중국인들도 세월호 사건처럼 노란색 리본을 썼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빨간 리본이 등장했다. 에이즈 환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미국의 예술가 단체인 ‘비주얼 AIDS’가 밝은 적색 띠를 거꾸로 된 V자 모양으로 만들어 가슴에 패용하는 운동을 벌였다. 나무에 걸던 띠가 현재의 작은 리본으로 축소된 것은 이때부터다.

빨간색은 피와 열정, 또 분노와 사랑을 상징해 채택됐다. 91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배우 제러미 아이언스가 빨간 리본을 가슴에 달고 나왔다. 당시 에이즈는 방송 중 입에 담아서도 안 되는 터부였다. 그래서 아무도 아이언스의 빨간 리본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궁금증이 증폭되면서 화제가 됐고 유행이 되어 들불처럼 번졌다. 우피 골드버그 같은 셀레브리티들이 각종 수상식마다 빨간 리본을 달고 나왔다. 영국 웸블리 경기장에서 열린 록 콘서트에는 7만5000명의 관람객이 리본을 달았다. 뉴욕타임스는 “십자가는 그 상징을 퍼뜨리는 데 2000년이 걸렸는데 빨간 리본은 단 1년 만에 퍼졌다”며 “92년은 리본의 해”라고 보도했다.

“십자가는 2000년, 리본은 1년 만에 퍼져”

이전 에이즈 환자 인권 단체의 상징은 해골이 들어간 문양이었다. 거부감이 컸다. 사람들은 여전히 에이즈를 두려워했지만 빨간 리본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비주얼 AIDS는 아무나 사용할 수 있도록 일부러 빨간 리본에 특허를 내지 않았다. 리본은 널리 퍼졌고 에이즈 환자들에 대한 인식 개선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리본은 정치는 물론 패션의 아이콘으로서도 큰 몫을 했다. 디자이너 아이작 미즈라히는 당시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너무 튀는) 빨간색 리본은 패션을 엉망으로 만든다. 헤어스타일도 죽인다. 그러나 인간의 따뜻한 감정을 드러낸다. 빨간 리본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다음 순서는 분홍색이었다. 유방암으로 인해 많은 여성이 생명을 잃었지만 유방암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던 92년 핑크 리본 운동이 시작됐다. 이 캠페인을 주도한 화장품 회사 에스티로더 컴퍼니즈의 한국 지사 이지원 이사는 “6500만 달러의 기금을 모금했고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25년간 이어 온 가장 성공적인 캠페인이 됐다”고 평했다.

핑크 리본의 달인 10월이 되면 연필부터 속옷까지 수백 개의 제품이 분홍색 리본을 달거나 분홍색 포장으로 나왔다. 핑크는 서양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 아름다움, 선함, 협력 등의 여성성을 상징했다. 페미니스트들은 핑크 리본을 여성운동의 아이콘으로 확대했다. 리본을 통한 여성운동은 정치적으로 안전하고 사회에 침투하기에 좋았다.

이후 인식 리본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고 우후죽순처럼 다양한 색깔의 리본들이 등장했다. 각종 운동 단체 등이 앞다퉈 리본을 만들었다. 유방암 퇴치 목적의 핑크 리본 영향으로 각종 암, 질병 관련 단체들도 상징 리본을 냈다.

리본을 만드는 단체에 비해 색상의 수는 턱없이 적어 한 색깔을 여러 단체가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오렌지색 리본은 기아, 백혈병, 문화적 다양성, 인종적 인내, 오토바이 안전, 자해, 다발성 경화증, 가자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지지 등 수십 가지를 의미하게 됐다. 노란색도 군대 지원, 자살 방지, 미아 방지 등 수십 가지의 뜻을 갖게 됐다. 빨간색은 에이즈는 물론 알코올 및 약물 남용, 심장병 등등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그래도 부족했다. 리본에 구름, 퍼즐 등 문양도 들어갔다. 두 가지 색깔을 결합한 리본도 부지기수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95년 오클라호마시 폭탄 테러 장례식에서 보라색, 노란색, 검은색 리본을 주렁주렁 달고 나왔다. 각각 사망자, 실종자, 어린이를 상징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너무 헤픈 리본은 공허하다”는 비판을 들었다.

리본의 장점은 싸고 쉽다는 것이다. 반대로 특별한 의무도 없다. 기금을 내거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달 수 있다. 세라 E H 무어는 『리본 문화』에서 “리본 운동이 사람들 생각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리본을 다는 행위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패션 소품 역할을 하는 데 그치는 경우도 많다”고 평했다.

핑크 리본 달린 속옷 많이 팔리기도

리본 운동의 상업성도 지적됐다. ‘핑크 리본으로 세탁한 상품’이라는 뜻의 핑크 워싱(pinkwashing)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일부 회사가 환경오염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암을 유발하는데 핑크 리본 행사를 지원하면서 원래 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핑크 리본을 이용해 돈을 벌면서 연구기금을 거의 내지 않는 회사도 있고, 심지어 무기와 포르노 상품에도 핑크 리본을 달아 논란이 됐다. 핑크 리본 운동이 확산됐지만 미국에서 1년에 4만 명에 이르는 유방암 사망자가 나오는 등 실효성이 없다는 비난도 있다.

비판자들은 “10월마다 열리는 핑크 리본 축제를 그만두고 유방암을 없애는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핑크 리본이 달린 속옷 판매도 많았다. 리본은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연대를 드러내는 것인데 보이지 않는 속옷에 리본을 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라는 불평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본은 효과적이며 세련된 의사 표현의 수단이 됐다. 91년 제러미 아이언스 이후 26년 동안 각종 시상식에 배우들은 리본을 달고 나왔다. 최근 기후변화 방지를 뜻하는 녹색 리본이 유행이었는데, 올해 아카데미상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항의해 법정투쟁 중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상징인 파란 리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ACLU는 연간 리포트 등에도 정의를 상징하는 파란색을 기본색으로 쓴다. 리본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문화평론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리본 운동은 소박하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정도의 지지와 연대다. 그러나 커다란 피켓 시위, 시끄러운 확성기 시위에 비해 문명화됐다. 리본 운동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동참의 폭이 넓어지고 작은 도움으로 시민정신을 실천하는 수단이 된다. 한국에도 상대를 윽박지르는 시끄러운 시위 대신 다양한 인식 리본 문화가 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지난 1일 광화문광장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태극기에 노란색 리본을 달았다. 촛불집회의 3·1절 태극기와 보수단체 태극기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리본은 세련된 시위 문화지만 양쪽 연단 위의 발언은 아직은 거칠고 격렬했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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