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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2월 당선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장원>

동주* 

-박주은


박제된 그림자를 허리춤에 감고 엮은

빗장 걸린 어둠이 푸드덕,날아 왔다

한 여자 늑골 속으로

폭설이 쏟아질 때

결빙의 강 휘몰아온 남자의 북소리에

스물여덟 공명음 온몸으로 받아들인

2017년 2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2017년 2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맑아진 텃새 한 마리

겨울을 걷어낸다

*동주: 윤동주

◇ 박주은

1962년 김천 출생. 초등학교 방과 후 독서논술 교사.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지면, 지인이 추천한 이교상 시인의 『시크릿 다이어리』로 공부.

<차상>

까치밥 홍시
- 차용길

첩첩이 눈이 쌓인 길 잃은 외딴집에

발 묶인 황소바람 문풍지를 뒤흔들고

냉기가 감도는 방안 꺼져가는 화롯불

암사슴 한 마리가 오롯이 길을 내고

허기진 날갯짓에 파드닥 놀란 대숲

가지에 쌓인 흰 눈발 털어내는 감나무

앞마당 터줏대감 하 늙은 가지에는

제 몸을 얼고 녹인 쪼그라진 홍시 한 알

언 발로 아침을 쪼는 붉은 까치 한 마리

<차하>

배꼽
- 강영선

인주 없이 찍어놓은
어머니의 사랑 줄을

사는 게 힘겨울 때
가만히들여다 봐

괜찮아, 배시시 웃던
첫 웃음을 떠올려

이 달의 심사평

겨울 추위가 너무나도 혹독했던 것일까? 이번 달에는 질과 양의 양면에서 근래에 보기 드문 흉작이었다. 게다가 형식을 갖추지 못한 작품도 적지 않게 뒤섞여 있어서, 시조의 형식에 대한 대중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케 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들이 대부분이어서 응모자의 물갈이가 크게 이루어진 것은 대단히 다행스러웠다.

이번 달의 장원으로는 박주은씨의 ‘동주’를 뽑았다. ‘동주’는 윤동주의 시와 삶을 소재로 한 영화 ‘동주’에서 착안하여, 흑백의 캄캄한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뽑아 올리는 건강한 서정을 보여준 작품이다. 응모자들 가운데 시적 역량이 가장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시조의 형식에 대한 이해와 가락을 부릴 줄 아는 솜씨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다만 응모해온 5편 모두가 작품 내적 필연성과 관계없이 다소 난해하게 느껴졌는데, 이점을 극복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 차상으로는 차용길씨의 ‘까치밥 홍시’를 뽑았다. 흔히 다루어온 평범한 소재라서 기시감(旣視感) 같은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극한 상황에 처한 한겨울의 정취를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하고, 따뜻하게 버무려 내는 솜씨를 사기로 했다. 차하로는 강영선씨의 ‘배꼽’을 뽑았다. ‘어머니의 사랑 줄인’ ‘배꼽’을 보며 힘겨운 삶을 다독이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을 단아한 형식 속에 담아낸 소품이다.

벌써 남쪽에서는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제 머지않아 맨발로 뛰어나온 온갖 꽃들이 한 바탕 큰 잔치를 벌이게 될 게다. 다음 달에는 시조의 힘찬 개화를 예감케 하는 빼어난 응모작들이 한바탕 큰 잔치를 벌여주기를 기대하면서, 절차탁마의 내공을 빈다.

심사위원: 박권숙·이종문(대표집필 이종문)

초대시조

냉이

-한분옥

귀하면 귀한 대로 천하면 천한 대로

한분옥

한분옥

묵고 가라앉아 켜켜이 앙금인가

아프고 서러운 데를 들추듯이 봄은 오고

봄 오면 그 발아래 다시금 돋아나는

쇠끝에 싹을 틔운 이름인가 싶은 것을,

오는 이 가는 이 없는 한 칸 띠집을 짓고

◇한분옥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시조 등단. 울산예총 회장, 울산시조시인협회 회장 등 역임. 가람시조문학신인상, 한국문협작가상, 연암문학대상, 울산광역시문학상 수상. 시집 『꽃의 약속』 『화인』, 산문집 『모란이 지던 날』 『부용만향』 『진홍가슴새』.

냉이의 봄이다. 땅을 일으킨 냉이는 납작한 얼굴로 씩씩하고 야무지게 봄 한 철을 끌고 간다. 가득히 꽃 핀 날들이 그 몸에 실려 가파른 시간의 언덕을 넘을 것이다. ‘아프고 서러운 데를 들추듯’ 봄은 오고 ‘봄 오면 그 발아래’ 약속처럼 돋아나는, ‘쇠끝에 싹을 틔운 이름인가 싶은’ 만큼 냉이는 혼자서도 힘이 세다. ‘한 칸 띠집’을 오가는 이 없다 해도, 봄의 맏딸답게 겨울의 침울을 앞장서서 걷어낸다. 가난한 날을 먹여 살리며 세상의 숨을 살려내는 그 첫 나물이 노지에 지천이다. ‘켜켜이’ 묵은 ‘앙금’의 시간 위로 찾아든 햇살 한 움큼, 비 한 모금의 은혜가 푸짐하다. 차가움으로 따뜻함을 밀어올린 냉이가, 세상의 입맛을 길어 올리며, 봄을 맞는 시의 움도 함께 틔운다. 춥고 어두운 현동(玄冬)의 끝자락을 벗어난다. 우수 지나 경칩으로 간다. ‘안녕’의 계절이어야 할 겨울은 품은 식생들을 다독이며 안녕히 잘 쉬어온 것인가. 핏발 서는 몸으로 불면의 날이 많았을, 떨이목숨이거나 혹은 무녀리목숨 같기도 한 안쓰러운 이월, 그러나 겨울을 이겨내느라 마르고 닳아버린 그 길 끝에서 바라보는 삼월의 들목이 한껏 푸르다. 

박명숙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해 그달 말 발표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게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전 응모자격을 줍니다.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100-814) 또는 e메일(kim.soojoung@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e메일로 응모할 때도 이름·연락처를 밝혀야 합니다. 02-751-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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