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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크리스틴 스튜어트, 문제적 스타? 그 이상의 뮤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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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총아에서 유럽 거장 감독의 뮤즈로. 크리스틴 스튜어트(26)의 행보는 동세대 배우들과 확연히 갈린다. ‘트와일라잇’ 시리즈(2008~2012)의 세계적 성공으로 2012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한 최고 수입 여성 배우 1위에 올랐던 스튜어트. 그는 최근 프랑스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를 만드는 동기가 돈이 되어선 안 된다”는 소신을 밝힌 바 있다.
연예계가 사랑한 ‘스타’에서 예술의 세계를 열망하는 ‘배우’로. 프랑스 거장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퍼스널 쇼퍼’(원제 Personal Shopper, 2월 9일 개봉)는, 스튜어트의 진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 2014년 12월 18일 개봉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 2014년 12월 18일 개봉

‘퍼스널 쇼퍼’는 1인극에 가깝다. 주인공인 스튜어트의 역량에 전적으로 기댔다는 뜻이다. 지난해 제69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공개됐을 때 작품성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의 연기에 대해서는 “필모그래피에 한 획을 그을 작품”(버라이어티)이라는 상찬이 쏟아졌다. 귀신을 보는 영매(靈媒)이자,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야 하는 퍼스널 쇼퍼(고객 취향을 고려한 맞춤형 쇼핑을 대신해 주는 직업) 모린. 극 중에서 스튜어트는 예쁜 화장을 걷어 내고, 고독하고 피폐한 영혼의 모린으로 변신한다. 특유의 무심한 눈빛과 보이시한 매력은 이 영화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완성한다.

영화 '퍼스널 쇼퍼'.

영화 '퍼스널 쇼퍼'.

모린은 스펙트럼이 넓은 캐릭터다. ‘퍼스널 쇼퍼’의 서사는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날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으냐”는 문자 메시지를 받은 모린. 그는 그 존재가 시키는 대로 자신을 바꾼다. 남의 옷을 입어 보며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모습을 점층적으로 표현해 낸다. 스튜어트는 “체력적·감정적 소모가 심해 살도 많이 빠졌다. 다른 배우들까지 모두 귀신으로 느껴져 그 어떤 캐릭터와도 교감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모린이란 캐릭터에 깊이 몰입했다는 뜻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부터 '퍼스널 쇼퍼'까지

특히 낯선 문자 메시지를 처음 받은 후 이어진 20분간의 기차 시퀀스는 스튜어트의 재능을 한껏 드러낸 장면이다. 미지의 존재가 보낸 문자 메시지 때문에 사시나무 떨듯 긴장하던 그는, 이내 복잡한 심경을 자신의 얼굴에 드러낸다. 내재된 욕망을 누군가에게 들켰다는 불안감과 욕망의 고삐를 풀고 싶은 이중적 마음을 표정에 담아낸 것이다. 짧은 순간 무수히 많은 얼굴이 스튜어트를 지나쳐 갈 때, 관객은 영화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간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로 인연을 맺은 아사야스 감독의 차기작에 다시 출연한 스튜어트는 “아사야스 감독님과 제작진 덕분에 배우로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고 말한다. “할리우드가 돈을 벌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면, 프랑스 영화는 위험을 감수해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열망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더 좋아하는 작업 방식을 찾기 위해 프랑스 영화를 택했다.

퍼스널 쇼퍼 / 사진=영화사 제공

퍼스널 쇼퍼 / 사진=영화사 제공

소녀들의 판타지에서 살아 숨 쉬는 배우로

트와일라잇(사진-영화사 제공)

트와일라잇(사진-영화사 제공)

스튜어트를 대형 스타로 키운 것은 다섯 편의 ‘트와일라잇’ 시리즈였다. 뱀파이어와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 벨라는 동시대 소녀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대상이었다. 그는 이 시리즈를 통해 엄청난 돈과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한편으로 ‘얼굴만 예쁘고 연기는 못하는 배우’라 평가받기도 했다. 2013년 제33회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브레이킹 던 part2’(2012, 빌 콘돈 감독)와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2012, 루퍼트 샌더스 감독)으로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받는 수모도 당했다. 대중의 지나친 관심은 스튜어트를 가십거리로 전락시키곤 했다. 그는 항상 파파라치의 표적이었고, 각종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스튜어트는 ‘박제된 인형(영화 속)’ 같거나 ‘비뚤어지고 엇나가는 스타(영화 밖)’ 같았다.

그가 배우로서 재평가를 받은 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 출연하면서다. 원래 이 영화에서 스튜어트는 클로이 모레츠가 연기한 스캔들 메이커 배우 조앤 역을 제안받았다. 하지만 “그건 이미 내가 잘 알고 있는 삶”이라며 출연을 고사한다. 그 대신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으나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연기하고 싶다”며 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슈)의 매니저 발렌틴 역에 도전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완급 조절이 돋보이는 안정적 연기를 선보였다. 공기처럼 자연스럽되 힘 있는 연기로 극에 긴장감을 부여한 것. ‘프랑스의 아카데미 시상식’이라 불리는 세자르영화제는, 2015년 스튜어트에게 미국 여성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안기며 재능을 인정했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 2014년 12월 18일 개봉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 2014년 12월 18일 개봉

이후 스튜어트는 필모그래피를 다양한 장르로 채우기 시작한다. ‘스틸 앨리스’(2014, 리처드 글랫저·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에선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좇는 막내딸로 분했고, SF 멜로 ‘이퀄스’(2015, 드레이크 도리머스 감독)에선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캐릭터를 맡았으며,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2016, 팀 블레이크 넬슨 감독)에선 타인과의 관계로 인해 절망에 빠진 철학과 대학원생을 연기했다. 줄리엣 비노슈, 줄리앤 무어 등 쟁쟁한 배우들과 호흡하며 그의 연기력도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스튜어트는 감정의 폭이 정말 넓다. 놀라울 정도의 성숙함과 연민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 ‘스틸 앨리스’에서 모녀 관계로 나온 무어의 평이다. ‘카페 소사이어티’(2016, 우디 앨런 감독)와 ‘퍼스널 쇼퍼’로 제69회 칸영화제를 찾은 스튜어트는, 과거의 오명을 벗고 지난해 칸에서 가장 바쁜 배우가 됐다.

당당한 소셜테이너

한 배우의 변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스튜어트의 연기 행보는,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제외한 나머지 이력에서도 감지된다. 방송·영화계에 몸담았던 부모의 영향으로 아홉 살 때 배우 활동을 시작한 그는, 스릴러영화 ‘패닉 룸’(2002, 데이비드 핀처 감독)에서 조디 포스터에 밀리지 않는 연기를 펼치며 주목받았다. 저예산 영화 및 독립영화에 꾸준히 출연하며 반항적인 로커(‘런어웨이즈’(2010, 플로리아 시지스몬디 감독)), 스트립 걸(‘웰컴 투 마이 하트’(2010, 제이크 스콧 감독)), 군인(‘캠프 엑스레이’(2014, 피터 새틀러 감독)) 등 매번 다른 스타일의 배역을 소화했다.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

그는 할리우드의 편협한 여성 인식에 대해 당당히 반대 입장을 밝히며 ‘소셜테이너’로서 자리매김했다. “할리우드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은 최악”이라 공공연히 말해 왔고, 2015년 패션지 ‘하퍼스 바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꽤 자리 잡은 여성 배우가 영화에서 결국 가슴을 드러내는 신을 찍고야 마는 것에 의문을 가진다”고 꼬집었다. 지난 2월 5일(현지 시간) 미국 TV 예능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1975~, NBC)에 출연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소수자 폄하 발언을 비판하며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선언해 박수받기도 했다. 스튜어트의 갈망은 배우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지난달 열린 제33회 선댄스영화제에서 직접 연출한 17분짜리 단편영화 ‘컴 스윔’(원제 Come Swim)을 발표한 것. 그는 이 영화의 주요 장면을 인상주의 화풍 이미지로 업그레이드하는 디지털 소프트웨어 실험을 했고, 이 결과를 미국 코넬대가 운영하는 공개형 학술 논문 데이터 베이스 사이트 ‘아카이브(arXiv)’에 짧은 논문으로 올리기도 했다.

SNL

SNL

‘퍼스널 쇼퍼’에서 모린이 자신의 본모습을 찾기 위해 벌인 탐색과 여정은, 결국 스튜어트 자신에게로 회귀한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은 스튜어트에게 건네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이 영화의 촬영이 끝난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반짝이는 것에 매료된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사람이다. 지금까지 내 삶의 좋았던 시간은 결국 늘 재난을 몰고 왔다. 평안과 성취의 순간에 비극적 사건들이 따라온 것이다. 이 영화의 끝에서 모린은 비록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반짝이는 것에 매달리지 않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 그게 스튜어트의 선택이었다. 그의 차기작은 이안 감독의 전쟁 드라마 ‘빌리 린스 롱 하프타임 워크’(원제 Billy Lynn’s Long Halftime Walk, 2016)와 스릴러 ‘리지’(원제 Lizzie, 후반 작업 중, 크레이그 윌리엄 맥네일 감독)다.

박지윤 인턴기자 park.jiyo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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