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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가 피로 덮인다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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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호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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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라는 TV프로그램에 한때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라는 코너가 있었다. 가치판단이 두 개로 갈리는 사안에서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일을 하는 남자다. 개그의 소재라서 가볍게 보았지만, 현실에서는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었을 때 다른 한 쪽이 겪는 충격은 크다. 그래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일 자체도 어렵지만, 선택받지 못한 당사자들이 흔쾌히 승복하는 것도 쉽지 않다.


법원은 법리에 기초해 매일 선택하는 일을 한다. 일종의 갈등 해소 기능이며, 이를 통해 각자가 자신의 권리를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는 야만적 상태를 제어한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해 승패를 명확히 가르는 것을 1급의 정의, 그리고 양자가 승패를 가름이 없이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보는 것을 2급의 정의라고 한다. 요즘에는 승패가 주는 부작용이 커서 적절한 선에서 합의를 보는 조정제도가 발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조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이 있다. 헌법재판도 그 중 하나이다.

원로 법조인 무책임한 발언 충격적 #폭력 행위 정당화 빌미 줄 수 있어 #탄핵재판 압력 위한 법정 권위 부인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 훼손하는 것

헌법재판이 가지는 의미는 민주적 기본질서를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사자가 헌법을 어겼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위반행위를 한 사람에 대한 제재적인 측면도 있지만, 헌정질서 속에 교훈을 남기도록 해 향후 민주주의 질서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예방적 효과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진행되는 탄핵재판을 두고 자꾸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다. 우려스럽게도 촛불이든 태극기이든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언사로 헌법재판소의 재판에 압력을 넣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기도 했고, 재판 진행 도중 변호인단과 재판관 사이에서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최근 대통령 측 대리인단의 일원인 원로 변호사가 재판정에서 발언한 내용이 문제되고 있다. 재판관에 대한 인격모독성 발언부터 소송지휘권에 대해 수위가 높은 원색적인 표현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

재판과정에서 변호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불만을 제기할 수 있다. 소송전략상 필리버스터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제는 법정의 권위를 인정하고 법조인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이다. 근본적으로 재판관 구성의 다양성과 소송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향후 헌법과 법률 개정을 통해 고쳐나가야 할 일이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시가전과 아스팔트가 피로 덮일 것”이라는 변호인의 말이었다. 탄핵심판을 앞두고 국론은 크게 분열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든 만큼,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의 대치국면에서 재판결과에 따라 피를 흘릴 수도 있다고 이야기 한 것은 매우 무책임한 발언이다. 사법시스템 자체를 부인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러한 발언이 미칠 반향은 크다. 원로 엘리트 법조인이 한 이야기는 실제로 폭력적 행위에 나서고 싶은 이들에게 그들의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빌미를 줄 수 있다.

우리가 법원의 권위를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극적인 목적은 그 권위를 통해 결과에 승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오래된 사법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은 법원의 권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중세에 전문재판관 제도가 들어서기 전에 재판은 왕 또는 영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때 법정의 권위는 군주 또는 영주가 가지는 지배권에 기초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듯이 그때의 법정에서는 재판받는 이의 무릎을 꿇리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헨리 2세 이후부터 왕립교육기관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전수받은 재판관들이 각지에 파견되어 재판을 하면서부터 지배권에 기초했던 권위는 전문성과 중립성에 기초한 권위로 점차 변화한다. 전문재판관을 각지로 내보낸 숨은 목적은 중앙집권적 사법시스템을 구축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늘날 전문법관제도의 기반이 되었다.

이렇게 쌓아진 영국법원의 권위는 17세기 초 제임스 1세와 커크 대법관의 일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임스 1세는 산책 도중 왕립법원을 지나게 된다. 제임스 1세는 법정을 배경으로 장난을 치고자 커크 대법관에게 법정에서 쓰는 가발과 법복을 빌려달라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커크 대법관은 왕의 요구를 거절한다. 당시 절대왕권시대에 왕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커크 대법관은 비록 왕의 이름으로 설립한 왕립법원이라고 할지라도 법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이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법정의 권위가 개인으로서 재판관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권위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적어도 형식적으로라도 재판관에 대해 존중의 모습을 표하는 것은 법정의 권위를 지켜나가기 위한 요소이다. 법정의 권위는 재판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재판결과에 대한 수용성을 확보하는 기반이 된다. 교회와 절에서 성직자나 스님들에게 예를 갖추는 것은 그들 자체를 존경해서가 아니다. 교회와 절이 가지는 그 자체의 신성과 경건함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개별적 헌법재판관의 재판상 독립과 양심을 불신하다고 해서 법정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을 훼손하는 것이다.

우리가 법을 만든 이유는 만인과 만인의 투쟁을 종식하기 위한 것이다. 결과에 대해 승복하지 못한다고 해서 피를 뿌린다면 우린 문명의 시대에서 야만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역사를 뒤로 되돌리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최승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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