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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樂] 흑단 악기 같았던 목소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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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호 27면

알 재로의 음반 ‘Tenderness’.

알 재로의 음반 ‘Tenderness’.

개인이 소유한 음반의 숫자는 몇 장 정도가 적절할까. 다다익선이라고는 하지만 “음반이 너무 많다”며 적정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 음반을 내놓는 애호가들을 보곤 한다.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미는 음반 아카이브지만, 나 역시 소장 음반을 하루 1장씩 듣는다 치더라도 수 년은 족히 걸릴게다.

미국 가수 알 재로를 추모함

하지만 음원 파일이나 스트림 시대에는 이런 고민 자체가 무의미하다. 이제 음반은 한 장 두 장이 아니라 ‘바이트’로 채워진다. 그래서 앞선 질문도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죽을 때까지 몇 TB를 다운 받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음악에 관한 한, 이는 풍요 속 빈곤이다. 음악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음반이라는 물성 자체가 사라지면서 음반에 담겨 있던 사연들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예전에 음반을 살 때는 실패를 막기 위해 사전에 정보를 연구해도 매장에 가서는 몇 번씩 들었다 놨다 했다. 이런 과정은 음반 구매의 제의(祭儀)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음악 소비를 양말 사는 것과 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몇 번의 클릭이면 다 해결된다. 음악은 음반이라는 물성을 거부하면서 무정형의 전기처럼 되어버렸고, 소중함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음반의 마지막 파르티잔이 되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렇다고 시대 흐름에 눈 감고 살지는 않는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유투브나 SNS를 통해 음악을 듣는다. 주로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나 과거 지나쳐 버렸던 연주자들을 접하기 위해서다. 거기서 괜찮은 음악을 만나면 온오프라인에서 음반을 찾는다. 몇 년 전 이런 과정을 통해 얻은 음반이 최근 세상을 떠난 알 재로 (Al Jarreau)의 ‘텐더니스(Tenderness)’다.

1940년생인 알 재로는 그래미상에서 팝·리듬 앤 블루스·재즈 세 분야에서 최우수 보컬상을 받은 전설적인 가수다. 그의 목소리는 흑단으로 만든 목관악기다. 사람의 몸 자체가 악기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음색 자체도 금관과 목관악기 사이를 오가고 음역 자체도 넓어서 알토에서 베이스를 넘나든다. 가창 테크닉은 실용음악과에서 연구서를 써야할 수준이다. 자유롭게 노래하는 즉흥적인 스캣은 마술사의 변신술을 보는 것 같다. 봄날 하늘을 나는 종달새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 뱀의 혀처럼 독기를 품고 날름거린다. 편안한 리듬 앤 블루스에서는 연인을 현혹시킬 달콤한 향수 냄새도 풍긴다.

이 앨범은 그가 그래미 리듬 앤 블루스 최우수 보컬상을 받고 난 후 만든 라이브 음반이다. 유명한 베이스 연주자 마커스 밀러가 프로듀싱하고 피아노 조 샘플, 기타 에릭 게일, 그 외 데이빗 샌본, 마이클 브레커 등 쟁쟁한 음악인이 참여해 만들었다. 이 앨범에는 기존의 유명한 곡을 알 재로 스타일로 바꾼 곡들이 많다.

첫 곡은 업 템포의 삼바 명곡 ‘Mas que nada’이다. 주문처럼 시작하는 여성 코러스에 이어 등장하는 재로의 보컬과 조 샘플의 피아노 연주가 귀를 즐겁게 한다. 간주가 끝나면 알 재로는 가성과 진성을 오고가면서 보컬 교과서의 머릿말을 써내려 간다. 다음 곡은 관객들에게 인사말로 시작하는 ‘Try a little tenderness’. 60년대 오티스 레딩이 히트시킨 노래다. 재로는 사람의 목소리가 파도처럼 넘실거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음과 저음의 낙차를 한 소절 사이에서 풀어내는 완급조절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어지는 곡은 팝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러브송이라고 생각하는 엘튼 존의 ‘your song’이다. 피아노 반주의 단출한 원곡에 비해 알 재로 버전은 이브를 유혹하는 뱀처럼 은밀하다. 간주 부분의 신디사이저와 이중창하는 스캣은 기계장치를 입에 장착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곡 후반부 에릭 게일의 기타 진행도 아름답고 바흐의 멜로디를 차용하면서 끝나는 엔딩도 귀엽다.

4번째 곡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줄리 앤드류스가 아이들과 침대 위에서 불렀던 ‘My favorite things’이다. 소프라노 캐서린 배틀과 재로가 멜로디와 화음을 주고받는다. 원래 배틀의 목소리는 검은 몽돌처럼 매끄럽고 윤기 넘친다. 역시 재즈 풍으로 편곡한 이 곡에서 둘의 호흡은 환상적이다. 그 외 비틀즈의 ‘She’s leaving home’이나 펑키한 리듬의 ‘summertime’ 등 알 재로와 베테랑 뮤지션들의 실력을 만끽할 수 있는 곡들로 넘친다.

알 재로의 부고를 듣고 그를 추모하며 이 음반을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우연히 유투브에서 앨범 녹음 당시 촬영한 라이브 영상을 발견했다. 참으로 없는 게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만화 ‘슬램덩크’의 대사를 패러디하자면 음악에 있어서 ‘동영상은 거들뿐’이었다. 여전히 내게 ‘진료는 의사가, 약은 약사가, 그리고 음악은 음반’이다. ●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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