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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붕괴 #14. 잠입 (9)

중앙일보

입력

“놔! 놓으란 말이야!”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래. 이거 못 놔!”

화염방사기를 두고 김원섭과 박금옥이 옥신각신 다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무슨 일인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화염방사기를 잡고 밀고 당기는 두 사람 사이로 걸어 들어가서는 박금옥에게 조용히 말했다.

“현실을 직시하세요.”

“말도 안 돼. 그래도 살아있는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그럴 수 있어. 이러지들 마.”

울고 있던 박금옥은 그럴 수 없다며 화염방사기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나까지 가세한 두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물이 고인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박금옥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하염없이 울었다. 김승리가 울고 있는 박금옥을 위로해주는 사이 나와 김원섭은 화염 방사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힘드시면...”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뿌린 씨앗이니까요.”

화염방사기를 뺏어든 김원섭은 둘둘 말린 포대기를 벗겨내고는 알몸뚱이 아이를 탁자 위에 눕혔다. 투명한 아이의 몸통과 팔다리에는 푸른색 혈액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웩웩거리며 구역질을 했고, 다른 누군가는 신을 찾았다. 노란 다이얼을 돌려 화염을 최대한 키운 김원섭은 손발을 꿈틀거리는 아이의 몸통에 화염방사기를 대고는 방아쇠 모양의 철사 고리를 잡아당겼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온 붉은 화염은 한순간 아이를 잿더미를 만들어버렸다. 고통이나 울부짖음 대신 소멸만이 찾아왔다. 종잇장처럼 타버린 아이는 방금 전까지 누워있던 책상 위에 한 줌의 푸른색 재 만 남기고는 증발해버렸다. 매캐한 검은 연기가 어둠 사이로 희석되어버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사람들은 훌쩍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손등으로 훔쳐낸 김원섭이 품속에서 작은 복주머니를 꺼냈다. 안에서 작은 금반지를 끄집어내서 호주머니에 넣은 김원섭은 책상 위에 조금 남은 재를 조심스럽게 움켜쥐고는 복주머니에 넣었다. 몇 번이고 재를 쥐어서 복주머니에 넣은 김원섭은 허탈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원래 오늘이 이 아이 첫돌이었습니다. 잔치할 형편은 아니고 반지나 선물하자고 해서 준비했던 건데...”

박금봉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서 있던 박금자가 다시 털썩 주저앉고는 통곡을 했다.

“아이고, 어린놈 불쌍해서 어쩌나!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얘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제 다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잘 아셨겠지요. 지금이라도 돌아가시고 싶은 분들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차재경의 말을 흐릿하게 받아들였다. 죽음을 눈앞에서 본 사람들은 들뜬 것 같으면서도 체념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실험체로 넘겨진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간병하던 사람이라도 데리고 나가야겠습니다. 설마 환자 가족들한테까지 손을 댄 건 아니겠지요?”

나는 울고 있는 김원섭의 등을 토닥거리며 차재경을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당장 달려가 그의 발목에 매달려서 듣고 싶었다. 내 아들은, 제발 내 아들은 저런 괴물이 아니라는...

“엑토플라즘을 다른 생명체에게 주입하는 건 현재까지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추출해낼 수 있는 엑토플라즘의 양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얘긴...”

“계속해서 실패했던 실험 방식에 사용할 만큼 넉넉하지 않다는 뜻이죠. 덧붙여 엑토플라즘의 배양에는 실험체의 가족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호기심이 정말 넘치시는군요. 당신 부인이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었죠. 세상에 대해 무관심해 보이지만 그건 단지 가면일 뿐이라고요. 십 년 동안이나 살을 맞대며 살았지만 그 무관심의 가면 안에 어떤 얼굴이 숨어있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내 얘기를 한 차재경은 껄껄대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차재경은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흔들렸으며, 좌절했지만 그럴수록 차재경이란 그림자는 더 독하게 사람들을 덮어씌웠다. 심지어는 이 지독한 어둠보다 더 독하게 말이다.

사람들은 차재경이 내뻗은 보이지 않는 끈에 걸려서 하나둘씩 그의 흔적을 뒤따라갔다. 눈빛을 주고받은 두 덩치들까지 사라져버리자 남은 건 나와 이대백, 김승리와 김원섭뿐이었다.

“지금 몇 시나 됐습니까?”

내 물음이 갑작스럽거나 어울리지 않았다고 느꼈는지 곤혹스러운 눈길로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보던 그가 말했다.

“열시 사십칠 분, 아니 사십팔 분입니다. 왜 시간이 너무 안 가는 것 같습니까?”

“우리가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이대백은 곧장 대답하지 못한 채 코끝을 찡그렸다.

“두려우세요?”

곁에 있던 김승리가 끼어들었다.

“지금 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씁쓸하게 웃으며 얘기해주자 김승리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한 건...”

말을 끊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이대백이 덧붙였다.

“오늘 밤이 정말 기나길 거라는 겁니다. 지나왔던 그 어떤 날들보다도 말입니다.”

말을 마친 이대백이 익살스럽게 눈알을 굴리는 바람에 방금 전까지 울던 김원섭까지 키득거리고 말았다.

“자, 어서 갑시다. 이러다 우리만 뒤처지겠어요.”

기운을 약간 차린 것 같은 김원섭을 가운데 두고 우리들도 물과 죽음들이 흘러넘치는 그 방을 빠져나왔다. 병원이 붕괴된 지 여섯 시간 사십칠 분 만에 우린 두 종류의 죽음을 경험했다. 어느 쪽이 더 지독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어느새 소화전이 고장 나 있는 것 같은 북쪽 통로로 접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붕괴 후 여섯 시간 사십칠 분 경과 지하 3층

차재경이 붉은색 핸들을 천천히 돌리자 먹이를 찾아 헤매는 뱀처럼 머리를 꿈틀대며 물을 뿜어내던 소화전의 물줄기가 차츰 약해졌다가 그쳤다. 사람들은 어둠에 불길함을 더해주던 물줄기가 죽어버리자 자그마한 환성을 질렀다.

“자, 이제 나머지 방들을 수색합시다.”
차재경의 말에 사람들은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우리들은 3층의 나머지 구획과 방들에서 두 개의 실패한 인간형 피 실험체와 세 마리의 원숭이, 그리고 고양이만큼 커져 버린 쥐 한 마리를 사제 권총으로 쏘거나 화염방사기로 태워버리거나 창으로 찔러서 죽였다. 죽은 실험체들은 인간을 닮은 것이나 동물들 모두 형광색 액체를 잔뜩 쏟아내고는 증발해버렸다. 어느 틈엔가 뒤로 빠진 우리 네 사람은 점점 살육에 취해가는 다른 사람들과 점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런 우리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심지어는 김승리에게 추근거리던 최민우까지 은근슬쩍 그들에게 가담해버리자 우리들의 고독감은 더욱 커졌다. 결국 3층의 소탕 작전이 완전히 끝나고 중앙 정원에 모여서 초콜릿과 육포로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 내내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두고 나누어졌다. 차재경과 사제는 경기를 관장하는 심판처럼 둘이 나누어져 버린 공간을 차지한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주고받았다.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깨웠다. 단지 눈동자를 가리고 있던 눈꺼풀을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무의식과 혼돈의 세계에 젖어있던 의식을 깨웠다. 그는 의식을 찾고도 한순간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지배당했던 탓일까? 푸른 세상은 혼탁했고, 젖은 먼지 같은 것들이 떠돌았다. 경직되어있던 근육에 그의 의지가 주입되면서 팔과 다리가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온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짜릿한 전율이 돌아온 그의 의식을 한층 더 정교하고 거대하게 만들어주었다. 처음보다는 좀 더 신경질적으로 움직이는 눈동자로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그가 세상이라고 느꼈던 푸른 질감은 단지 그를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유리관 안에 채워진 물이라는 사실을, 푸르고 지저분한 물 너머에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뿌옇게 일그러진 세상 사이로 언뜻 비춰졌다.

-이제 일어나.

그는 머리에 천둥처럼 울리는 또 다른 의지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의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의지는 전류처럼 머릿속을 찌르르 울렸고, 단지 그것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시간만큼만 그를 괴롭혔다.

-해야 할 일이 있어.

좀 더 명확하게 강렬한 의지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푸른 세상의 끝이 닿았다. 차갑고 딱딱한 질감을 손가락 끝으로 한껏 맛보는 아주 잠깐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빠직거렸다.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 너머로 격렬한 외침이 스쳐 지나갔다. 질주하는 듯 헉헉대는 숨소리와 함께 마구 흔들리는 이미지까지 조각난 이미지들은 푸른 세상 너머에서 또 다른 의지가 속삭일 때까지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우리들을 구해줘.

천천히 뒤쪽으로 물러난 그의 손이 단단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앞으로 뻗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에서부터 아픔이라는 것이 피어났다. 다시 어깨 뒤로 물러난 주먹이 화살처럼 앞으로 날아갔다. 다시 한 번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며 푸른 세상에 약간의 균열이 생겼다.

-어서, 서둘러.

다시 한 번, 이제 균열은 눈에 띌 정도로 거대해졌다. 균열은 파괴로 이어졌고, 결국 붕괴로 이어졌다. 균열을 이기지 못한 세상은 무너져 내렸고, 그는 깨진 유리 사이로 빨려 나간 물과 함께 또 다른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푸른 세상과는 달리 또 다른 세상은 숨쉬기가 너무 힘들었다. 입과 코를 벌리고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격렬한 통증과 함께 기침만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의식이 흐려지려는 순간 부드러운 힘이 그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닿은 근육이 이완되면서 호흡이 한결 편안해졌다.

-시간이 없어. 앞쪽 문으로 나가!

그는 채찍질처럼 후려치는 의식을 쫓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의식이 어느 정도 또렷해지자 그가 갇혀있던 세상이 보였다. 둥근 유리관은 푸른 용액으로 가득 차 있었고, 옆에는 온갖 색깔의 불빛들이 나지막하게 껌뻑거리는 기계들이 거미줄 같은 선으로 유리관을 감쌌다. 그는 방금 자신이 부수고 나온 거대한 유리관이 방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는 묘한 두려움을 느꼈다. 푸른 물이 가득 찬 유리관 안에는 방금 전의 그처럼 의식이 없는 존재들이 보였다. 여자, 남자, 아이, 동물... 그리고 기괴한 조합들.

-그들이 오기 전에 빠져나가야 해. 어서 움직여...

다시 한 번 의식이 그를 재촉했다. 아찔한 현기증을 참아내며 작고 둥근 유리창이 달린 문을 밀자 차가운 어둠에 싸여있는 또 다른 공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라커들이 보일 거야. 아무거나 열고 옷을 챙겨 입어.

그제야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부끄러움이나 의아함보다는 다급한 의식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철제 라커를 열자 차곡차곡 포개진 트레이닝 복과 하얀 수건들이 보였다.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대충 닦아내고 트레이닝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었다. 짧은 순간 찾아온 불균형이 그를 비틀거리게 만들었고, 무심코 뻗은 젖은 손길은 철제 라커에 붙어있지 못했다. 쭉 미끄러진 그는 옆으로 넘어졌고,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퍼졌다.

-이제 그만, 어서 라커 안으로 들어가! 서둘러!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그는 좁디좁은 라커 안에 몸을 숨겼다. 어깨를 바짝 좁히고 두 다리를 끌어모은 그가 라커의 문짝을 당겨 스스로 안에 갇혀버린 것과 함께 어둠 한쪽에서 빛의 균열이 생긴 것은 거의 동시였다. 라커의 작은 구멍으로 미친 듯이 요동치는 불빛들이 들어왔다. 묘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그의 호흡소리를 키워나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면 안 돼. 절대로!

다급하다기보다는 애절한 의식이 그를 붙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린 그는 작은 구멍에 눈을 바짝 가져갔지만 강렬한 빛이 그의 시선을 차단했다. 두려움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그의 몸속을 채워나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외침들이 한동안 방 안을 맴돌다가 차츰 사라져갔다. 그가 문을 열고 나왔던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 빛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라커 바깥은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곧 구해줄게, 날 믿어.
그는 처음으로 머릿속을 파고드는 의식이 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뢰감에 그는 처음으로 응답했다.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작가 소개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기업 샐러리맨을 시작으로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를 거쳐 길을 쓰고 있다. 소설과 교양서를 비롯해서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쓴다.
장편소설 『폐쇄구역 서울』 『마의1, 2』 『쓰시마에서 온 소녀』 『김옥균을 죽여라』 『바실라』 『명탐정의 탄생』 등을 썼으며,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시리즈에 〈불의 살인〉을 비롯한 단편추리소설들을 발표했다.
역사 교양서 『연인, the lovers』 『혁명의 여신들』 『조선의 명탐정들』 『조선전쟁 생중계』 『고려전쟁 생중계』 『조선직업실록』 『조선백성실록』 등을 펴냈다.
2013년 제1회 직지소설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NEW 크리에이터 상을 받았다.
현재 한국미스터리작가모임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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