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문 닫는 식당까지 넣어 “벤처 62% 3년 내 폐업한다니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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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하선영산업부 기자

하선영산업부 기자

“창업꽃길 지나니 성장흙길…3만 벤처시대라지만 62%가 3년 내 중도탈락”

대한상의 25페이지 벤처 보고서 #생존율 비교도 잘못된 수치 인용 #중소기업청·벤처협회 즉각 반박 #“3년 생존율 77%, 스웨덴보다 높아”

지난 15일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보도자료는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한국 벤처기업의 생존율을 경고하고 있다. 같은 날 보도자료와 함께 배포한 25페이지 분량의 보고서 ‘통계로 본 창업생태계 연구’도 마찬가지다. “벤처기업 수는 양적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절반 이상의 창업기업이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넘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스웨덴ㆍ영국ㆍ미국 등 OECD 국가의 벤처기업 3년 생존율을 비교하는 그래프도 함께 나와있다. 이 그래프에 따르면 한국의 벤처기업 생존율(38%)은 1위 스웨덴(75%)의 절반 수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한상의의 지적은 틀린 주장이다. 첫째, 보고서가 말하는 ‘우리나라 기업 생존율’은 벤처기업이 아닌 전체 창업 기업의 생존율이다. 소상공인 생계형 창업을 포함한 각종 음식점ㆍ숙박업 등 ‘창업기업’의 생존율인 것이다. 대한상의가 인용한 수치는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기업생명 행정통계’로 벤처기업과는 별 관련이 없다.

그러나 보고서의 서두는 “2015년 벤처기업이 3만 개가 넘었다”로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3만 개는 현행 벤처특별법에 따른 벤처인증을 받은 기업들을 말한다. 보통 혁신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창업한 기업들이 벤처 인증을 신청한다. “혁신 기술을 가진 IT 벤처기업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보고서가 갑자기 피자집의 생존율이 낮다고 지적하는 것은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대한상의가 15일 발표한 보고서는 창업기업 생존율을 벤처기업 생존율로 잘못 표기했다. [보고서 캡처]

대한상의가 15일 발표한 보고서는 창업기업 생존율을 벤처기업 생존율로 잘못 표기했다. [보고서 캡처]

둘째, 대한상의가 인용한 OECD 그래프 역시 전체 기업의 생존율에 관한 것이다. 대한상의는 보고서 발표 후 이같은 지적을 받고 ‘벤처기업 3년 생존율’이라는 그래프 제목을 ‘창업기업 3년 생존율’로 수정했다.

이쯤되니 대한상의가 보고서를 통해 지적하고자 하는 현실이 소상공인 창업에 관한 것인지, 벤처기업에 대한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 문서는 ▶벤처기업의 판로개척 ▶투자자금을 조기에 회수할 수 있는 환경 조성 등 벤처기업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과 현실에 대해 25페이지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창업기업과 벤처기업이라는 용어를 섞어서 시작한 보고서는 결국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을 주장하며 끝난다.

보고서가 발표된 15일, 30여곳의 언론사들이 대한상의 보고서를 인용한 기사를 발표했다. “3만개 벤처시대의 슬픈 자화상”, “허울 좋은 3만 벤처시대”, “국내 벤처기업 생존율 OECD 최하위, 왜?”. 애매하게 잘 못 쓴 보고서 한 개가 잘못된 기사 수십여개를 양산해냈다.

중소기업청과 벤처기업협회는 즉각 반박 자료를 냈다. “벤처 확인을 받은 기업의 3년 생존율은 77.4%”(중기청), “국내 벤처기업의 생존율은 스웨덴(75%)의 생존율보다 높다”(벤처기업협회)며 대한상의의 보고서를 질타했다. 주영섭 중기청장도 16일 이동근 대한상의 상근부회장에게 문제의 보고서에 대해 항의했다. 이 부회장은 “대한상의의 실수”라고 인정하면서도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주 청장에게 해명했다.

벤처기업들을 대표하는 이들 기관에서는 이번 해프닝을 조용히 넘기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벤처기업협회 관계자는 “보고서랑 기사를 본 사람들이 ‘그래 역시 벤처는 안돼’라고 생각할 것은 너무나도 뻔하다. 보고서는 수정했다지만 이미 나간 기사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중기청도 “강소기업ㆍ벤처기업들에게 힘 실어주기 위해 몇년을 노력했는데 보고서 하나로 중기청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호소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얘기를 들어봤다. 보고서를 만든 경제정책팀 관계자는 “중기청이나 벤처기업협회는 벤처 인증을 받은 기업을 벤처기업이라고 부르지만, 해외에서는 벤처기업을 스타트업과 비슷한 개념으로 혼용한다”고 말했다. ‘벤처기업’ 정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죽음의 계곡’을 넘기 힘든 국내 벤처기업들의 현황과 지원방안에 대해 지적하고 싶었다”고 해명했다.

대한상의는 논란이 된 보고서를 수정해서 홈페이지에 올려둔 상태다. 그러나 잘못 배포한 보고서와 보도자료에 대해 해명 자료를 발표하지는 않았다. 전경련이 해체 수순을 밟고 있는 가운데 사실상 경제단체의 맏형이 된 상공회의소가 왜 이런 아마추어같은 실수를 했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선영 기자 dynami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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