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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플러스] 거장 다니구치 지로 별세 … '고독한 미식가'냐 '신들의 봉우리'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만화 『고독한 미식가』로 혼밥·혼술의 지평을 연 다니구치 지로(谷口治郞)가 2월 11일 별세했다. 69세. 순문학과 SF를 넘나들며 한 컷 한 컷 속에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았다. 세밀하고 극사실적인 화풍은 흡입력이 크다. 『고독한 미식가』 외에 다니구치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긴 작품은 『신들의 봉우리』다. 제목에서도 보듯, 산에 오르는 이야기다. 동시에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마음이 몸을 움직여 산에 들고 몸이 마음을 움직여 산서를 펼쳐들게 되는 순례의 과정은 산꾼들의 업보다. *앨버트 머머리의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 *라인홀트 메스너의 『검은 고독, 흰 고독』, 산악 바이블 『마운티니어링』 등 고전적인 산서라는 루트에서 발길을 돌려보자. 산악 만화가 있다. 등산화 끈 고쳐 매고 한 걸음 한 걸음 가보자. 한 컷, 한 컷 색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신들의 봉우리(다니구치 지로, 애니 북스, 각권 9,500원)

신들의 봉우리

신들의 봉우리

조지 맬러리. 1924년 6월 8일, 그는 앤드류 어빙과 함께 영국의 3차 원정대로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있었다. 예정보다 시간이 지체됐지만 진행은 순조로웠다.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1차 대전 뒤의 무기력감을 떨쳐버리려던 영국의 숙원이 풀어지는 듯 했다. 돌연, 정상에 구름이 일더니 그들은 베이스캠프에서 지켜보던 대원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70여 년 뒤, 카메라 한 대가 네팔 카트만두의 작은 상점에서 발견된다. 일본인 후쿠마치 마카토는 이것이 맬러리가 정상을 공격할 때 가지고 간 카메라임을 확신한다. 그런데 필름이 빠져있다. 그들은 정상에 올랐을까? 그것을 확인해주는 필름만 발견된다면 등반의 역사는 바뀐다! 일본 산악계에서 이단아로 찍힌 천재 클라이머 하부 조지를 만난 후쿠마치. 둘은 맬러리의 흔적을 찾아 에베레스트에 오른다. 미스터리에 미스터리가 히말라야의 고산준령처럼 이어지며 그 전개는 자못 흥미롭다.

이 만화, 『신들의 봉우리』는 『음양사』로 이름을 날린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실제, 맬러리의 시신은 1999년 5월 1일, 정상 245m 밑에서 발견됐다. 총 5권. 200년 세계 최대 만화축제인 프랑스 앙굴렘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작화상을, 2011년 이탈리아 루카코믹스 페스티벌에서 최고상인 만화거장상을 받았다. 다니구치는 “일본 만화에 오락성뿐 아니라 수수하지만 문학성이 높은 작품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지난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작가의 또 다른 산악 만화로는 『K』가 있다. 히말라야에서 구조 활동을 벌이는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남자, K라는 인물을 그렸다. 포터지만 산악인들을 구하면서 초지일관 삶과 산을 바라보는 그윽함이 넘쳐난다.

산(이시주카 신이치, 학산 코믹스, 각권 3700원 혹은 4,200원)

산

이 책의 에피소드들은 얼개가 비슷하다. 그 진행은 다음과 같다. 각 에피소드들의 주인공들은 산에 든다. 그리고 산 아래의 일을 떠오른다. 조난당한다. 다시 산 아래의 일이 떠오른다. 회한에 사무치거나 새로운 결심을 한다. 구조 된다(아니면 죽는다). 그리고 독자에게 교훈을 일깨워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식상하지 않다. 훈훈함이 단순함을 뒤덮어 버리니까.

여기, 산포라는 사내가 있다. 그는 일본의 북알프스 산악 구조대를 돕는 자원봉사자다. 쾌활하나 심각하고, 어수룩하지만 진중하다. 그의 등에는 무거운 배낭이 들려있는 게 아니라 얼기설기 엮인 낙관의 덩어리가 묶여있다. 그 긍정의 힘이 오롯이 그의 등반 실력으로 승화했다. 그는 정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기부터 정상까지 쭉 에베레스트인 걸요!” 그리고 정상 몇 미터 앞두고 다른 팀 대원을 구하기 위해 등정을 포기하고 돌아선다.

산포는 신참 구조대원 쿠미와 산에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 나오타와 인간미 넘치는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나오타가 아버지를 잃고 “싫어! 싫어!”를 외치는 장면은 감정의 비등점을 격상시킨다. 산포는 나오타를 진심으로 돌본다. 덕분에, 나오타는 아버지를 삼켜버린 산에 대해 적개심을 갖지 않는다. 산에 빠지고 산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산과 함께 큰다.

산포는 조난자가 살았건 죽었건 인사말을 건넨다. '잘 견뎌냈어요.' 산에 텐트를 치고 홀로 지내며 바나나와 커피를 즐기는 산포. 자신을 내버리고 구조에 헌신하는 이 친구는 이렇게 물어본다. 우리가 산에서 버리고 올 수 있는 건 뭘까요. 그게 뭘까.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피크(그림 임강혁, 이야기 홍성수, 영상노트, 각권 1만2000원)

피크

피크

“첫 산행에서 받은 느낌이 산에 대한 태도를 만든다.” 북한산 경찰산악구조대장의 말에 신참 다섯 명의 눈이 반짝인다. 그 말은 그들의 가슴에 박히고 몸으로 구체화한다.

개성 남다른 다섯 명이 훈련소를 갓 나와 도착한 곳은 북한산 도선사 광장. 인수봉 밑 구조대로 향하고 있다. 제대를 앞둔 고참이 마중 나왔다. 그런데 이 분의 공력이 장난 아니다. 뛰고 뛰어도 잡히지 않는 고참. 주인공 류연성은 비법을 알아챘다. 아하, 짧은 보폭으로 리듬을 타듯 가야하는 구나. 책 곳곳에 이런 산행 지식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팽팽한 피부가 갑자기 바위에 부딪히면 십자나 별모양의 상처가 나지’ ‘다리가 부러지면 스프레이 파스를 뿌린 뒤 탄력붕대로 1차 고정, 부목을 대고 탄력붕대로 2차 고정해야 해’라는 식이다.

이 만화의 백미는 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느끼는 뿌듯함이다. 인생의 ‘피크(Peak)’를 맞은 한국의 아들들이, 산이라는 ‘피크’에서 사람을 구하며(혹은 못 구하며) 한 단계 한 단계 또 다른 피크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다. 연성은 모처럼 어머니와 통화를 한다. 어머니는 눈이 동그래진다. “그 북한산? 인수봉이 있는?” 그리고 흐느껴 운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반갑다. 한국에서 나온 본격 산악만화다. 포털 다음에서 연재된 것을 책으로 펴냈다. 한해 사고 건수 200여건이 발생하는 북한산. 군인이자 경찰이자 산악구조대인 이들이 벌이는 훈훈한 이야기. 작가는 실제 1990년대 중반 북한산 경찰산악구조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

고고한 사람(그림 사카모투 신이치, 글 요시오 나베타, 대원씨아이, 각권 4500원)

고고한 사람

고고한 사람

앞서 소개한 『산』의 쾌활 사나이 산포와 달리, 세상의 모든 고독을 씹고 있는 주인공 모리 분타로. 갓 전학 온 이 고교생은 홀로를 추구한다. 왜 제목이 ‘고고한 사람’이겠는가.

그는 자기를 귀찮게 하는 동급생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건물을 오른다. 장비도 없이. 그리고 처마에 닿는다. 턱이 져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 그는 런지(훌쩍 몸을 날려 이동하는 행위)를 감행한다. 성공한다. 그가 외친다. 나는 지금 살아있다! 심연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의 본능이 꿈틀대더니 날갯짓을 하기 시작한다. 위기 극복, 그리고 생(生)의 찬미. 이 묘한 모순에 의해 그는 삶을 지탱한다. 등반을 위해 그는 최악의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수시로 굶고, 비오는 날 한뎃잠을 자고, 배낭에 페트병을 꽉 채워 넣고 시내를 활보한다. 그리고 동계 북알프스(최고 해발 3190m, 거리 105km) 종주. 대원들을 모두 잃으면서도 종주에 성공해 ‘단독행 모리’라는 명성을 얻는다.

홀로를 추구하던 그는 짝을 만난다. 산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후배 타케무라가 끈질기게 유혹한다. 결국 모리는 아무도 오르지 못한 K2 동벽 앞에 선다. 아이스바일(얼음도끼)을 두 손에 꽉 쥔 채…. 실시간 동영상으로 전해지는 그의 등반. 아내는 주저주저하다 결국 컴퓨터를 켠다. 암흑 또 암흑. 돌연, 놀란 표정의 모리가 등장한다. 무슨 일일까.

니타 지로의 소설이 원작이다. 단독 등반을 고집하며 산화한 카토 분타로라는 산악인이 실제 모델이다.

* 앨버트 머머리(1885~1895) : 영국의 등산가. 정상에 오르는 ‘등정주의’ 대신 코스 자체의 난도에 의미를 두는 등반 경향인 ‘등로주의’의 창시자.

* 라인홀트 메스너(1944~) : 최초의 히말라야 14좌 등정자. 1986년 로체 등정을 마지막으로 8000m급 14개 봉우리에 모두 올랐다. 절대 고독과 내면 고백적인 산악문학으로 상을 여러차례 받았다. 『검은 고독 흰 고독』 외에 『벌거벗은 산』 『정상에서』 등이 있다.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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