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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간은 묵묵히 견뎌야 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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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일러스트 김옥

나탈리. 나 여자 생겼어.그걸 왜 나한테 말해? 혼자 감춰둘 순 없었어?그 사람이랑 살 거야.언제부터 그랬어?조금 됐어.학생이야?아니야.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야.평생 날 사랑할 줄 알았는데. 내가 등신이지!평생 사랑하기야 하지. 그건 맞아.집어치워.

백영옥의 심야극장 <41> #영화 '다가오는 것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메인 카피(“왜 그걸 말해? 혼자 감춰둘 수는 없었어?”)를 보고 난 후, 내가 상상한 영화 속 대사는 이런 것들이었다. 대학교수인 중년 남자와 고등학교 철학 교사인 여자. 그들의 오랜 사랑이 끝장나고 난 후의 이야기라면 이렇게 흘러가지 않을까.

1. 여자의 평온한 삶은 남편의 외도를 계기로 붕괴된다.
2. 여자는 혼란스러움을 뒤로 한 채 자아를 찾아 먼 곳으로 떠난다.
3. 그곳에서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

영화의 첫 장면. 샤토브리앙의 무덤으로 가는 배 안에서 주인공 나탈리가 보고 있던 학생의 리포트 제목이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걸 보니, 내 짐작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내 예상을 빗나갔다. 이 영화에선 누구도 불시에 벌어진 ‘그 사건’ 때문에 다치지 않는다. 칼을 들었던 남편도, 칼에 찔렸던 부인도, 아버지의 외도를 ‘미리’ 알고 있었던 아이들 역시 말이다.

나탈리는 남편의 외도로 붕괴되지 않는다. 자신의 메모가 가득한 레비나스와 부머의 책을 남편이 새집으로 가져갔을 때조차 “너무 하네!”라고 혼자 분노할 뿐 그에게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자부심을 가지고 집필했던 철학 총서의 개정판 작업이 끝내 물거품이 됐을 때 역시 그녀는 담백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애제자인 파비앵이 자신이 추천한 테러리즘에 관한 책을 혹평할 때도, 집회에 참가하거나 서명하는 것만으로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비겁하다며 말할 때조차,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다. 나탈리는 “제게 실망하셨죠?”라고 묻는 파비앵의 질문에 “네가 나한테 실망한 거 아니니? 아니라면 다행이고”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녀는 갑자기 (없던) 자아를 찾겠다고 돌연 일상을 탈출해 먼 곳으로 떠나지 않는다(이 부분이 내 마음을 가장 강하게 흔들었다!). 그녀는 살던 집을 바꾸거나 머리 스타일을 바꾸지도 않는다. 버스 안에서 울다가 남편의 외도 상대를 우연히 목격하거나, 침대에서 엄마의 늙은 고양이를 끌어안고 울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선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시간은 묵묵히 ‘견뎌야 한다’라는 것을 직관하는 여자다. 그녀는 여자 나이 마흔 이후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안다. ‘쓸모없음’에 대한 그녀의 정의는 지극히 비관적이지만 실용적이다.

우정은 사랑에 비하면 얼마나 달콤한가
이쯤에서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이 영화를 단지 ‘위기의 중년 극복 프로젝트’라고 말하면 행간을 전부 다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것들’은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있고, 고양이를 정말 싫어하는 여자가 고양이와 동거하는 이야기라고 말해 볼 수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연정을 품어볼 만한 섹시하고 똑똑한 ‘제자’를 일평생 토론할 수 있는 ‘지적 동반자’로 다시 호명해 부를 줄 아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사랑에 비해 우정은 얼마나 다정한가. 우정 때문에 자신이 아끼는 화병을 창문 밖으로 집어 던지거나, 함께 쓰던 침대의 절반을 톱으로 잘라 버리는 흉폭한 커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영화 속 나탈리의 행동들이 내게 하나하나 놀랍고 새롭게 다가온 것은 그것이 ‘어른’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탈리의 말이 가진 지극한 실용성에 한 번 더 놀랐다. 가령 자신이 직접 가꾼 여름 별장의 정원에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꽃을 손질한 후,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새로 사귀었다는) 그 여자가 꽃을 좋아했으면 좋겠네. 안 그러면 정원이 너무 아깝잖아.

왜 그런 소릴 해?
당신은 바뀐 게 없는 것처럼 말하잖아. 정신 좀 차려!

‘다가오는 것들’을 보며 나는 요즘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프레임 바꾸기 전략’이 절망에 빠진 우리를 구원할 묘책이란 생각을 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사건을 불륜남 고영태의 탐욕으로 바꿔 버리는 몰염치, 즉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다면 메신저를 공격하라 따위의 너저분한 전략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나탈리는 남편의 불륜 사건과 빈 둥지 증후군, 엄마의 죽음을 이렇게 말할 줄 안다.

“20년 동안 남편과 나는 브람스랑 슈만만 들었어. 지긋지긋해. 이런 생각을 해. 애들은 떠나고, 남편은 가고, 엄마는 죽고, 나는 이제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완벽한 자유. 놀라운 일이야.”

가장 자유로우면서 가장 안전한 삶은 없다
물론 그녀는 갑자기 찾아온 자유 앞에서 휘청거린다. ‘자유롭다’는 동사가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말이 ‘안전하지 않다’라는 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전하면서 자유로운 삶 같은 게 세상에 있을 리 있나? 인간 존재의 불안정성은 이런 이율배반적인 욕망 때문에 발생한다. 같이 있고 싶지만 같이 있고 싶지 않은 마음, 떠나고 싶지만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의 충돌들.

다만 나탈리에겐 세상에 없는 자신만의 무기가 있다. 이 영화에선 ‘그것’이 독특한 리듬을 부여하며 아름답게 부유한다. 영화의 모든 장면에는 루소와 파스칼, 아도르노와 쇼펜하우어, 알랭의 ‘책들’이 스치듯 등장하는데, 내겐 그 모든 것들이 자코메티의 조각상만큼이나 도드라져 보였다. 나탈리는 어디에서건 책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골초들의 ‘담배’처럼 그녀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다. 공원에서, 기차 안에서, 길 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카페에서, 세상의 모든 공간은 그녀에겐 서재이며 도서관이다.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약 행복이 오지 않는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환영의 매력은 그것을 준 열정만큼 지속된다. 이 상태는 자체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라. 그는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그녀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루소의 『신 엘로이즈』의 문장을 읽으며 이렇게 말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 쥘리는 지난날의 열정을 회상하다가 꿈을 현실로 대체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기서 상상력이란 순전히 정신적인 쾌락을 통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상쇄하는데, 비현실적이지만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이다. 

나탈리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가상의 만족이 진정한 위안을 주고, 그 위안은 관능적 쾌락을 보충하고 대체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억제된 것이 증폭시키는 쾌락의 양을 알고 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욕망과 금지를 연결시켰다. 만약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해 고통스럽다면, 그것을 가지게 하는 게 아니라, 금지 자체를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치는 게 그들이 생각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었다. 욕망의 대상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자신을 바꾸지 않고 보존하는 것으로 생의 위기를 돌파하는 의연함이란 어떤 것일까. 상상으로 결핍된 것을 채우는 충만한 삶은 또 무엇일까. 나는 그런 의연함과 충만함이 책을 읽으며 그녀가 알게 된 통찰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이때, 철학은 단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라는 편견을 뒤엎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실용적인 자기계발서가 된다. 자신이 읽을 것이 곧 나 자신이 되는 삶을 떠올릴 때, 당분간 이 영화의 나탈리를 떠올릴 것 같았다. 언젠가 나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다가오는 것들’을 본 후, 내 멋대로 이 영화에 양립 불가능한 제목을 붙여보고 싶었다. 책 읽는 여자는 자유롭고 안전하다고.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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