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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국민적 지혜와 의지로 국난 극복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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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우리의 5000년 역사는 국난 극복의 역사였다. 지금 우리는 또다시 심각한 국난의 징조에 부닥치고 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란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국내외 사정이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는 이 촉박한 위기 극복을 위해 국민의 지혜와 의지가 모아져야겠다.

헌법과 선거법 개정 촉진해
광장의 외침과 국회 연계시키는
한류 민주주의 새 틀을 짜보자
협치와 창의적 역할 분담으로
재벌 개혁은 보수가,
노동 개혁은 진보가 앞장서기를

무엇보다 먼저 각자의 꿈이나 아픔에 집착한 나머지 모두를 쓸어가고 삼켜버린 역사의 큰 파도를 보지 못한 채 나라와 공동체의 파멸을 초래했던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19세기 말 제국주의시대의 압력 앞에서 우리는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갑론을박으로 사분오열돼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이데올로기 시대에 추진한 독립운동과 해방정국에서도 역시 역사의 대세를 보는 공동의 시각을 갖지 못한 나머지 끝내는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다.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역사의 전환점은 또 한 번의 위기임에 틀림없다. 대통령 탄핵 등 심각한 정치·사회 분열로 인해 앞으로 대비해야 하는 4차 산업혁명이며 국제 정치의 긴장 고조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나침반 없이 표류하는 국가 운영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민주화 실험에서 그 한계를 노출한 한국 정치의 파탄은 촛불과 태극기의 대결로 상징되는 국민 분열의 위기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돌이켜 보면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대통령직선제와 5년 단임제 개헌으로 대통령중심제의 민주국가를 제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과도한 낙관론에 의존한 결과였다. 여러 번 지적된 바 있지만 한국 정치문화의 전통에선 대통령책임제는 무책임제로 흘러버릴 여지가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사실 올해로 30년을 맞는 87년 체제의 전반부 15년이 무난하게 운영된 데는 여소야대 국회와의 협치에 성공했던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란 큰 정치인들의 무게와 역량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특히 지난해 4·13 총선과 작금의 탄핵 정국에 이르러서는 현행 대통령제를 비롯한 국정의 틀은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국민적 합의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민적 판단은 단순히 한국 정치의 제도적 대개혁뿐 아니라 이제 한국 정치도 새 시대로 진입해야한다는 인식에 더해 정치권은 조속히 이에 상응하는 변화와 개혁을 실천할 것을 강력히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장훈 교수가 지적한 대로 한국 정치에서 근대화와 민주화를 표방했던 시대는 끝났으며 다음 시대에 맞는 보수와 진보의 형성이 당면한 과제임을 모두 인정해야만 한다. 87년 체제의 출범으로 막을 내려야 했던 국가중심주의의 박정희 시대는 2013년 박근혜 정부의 출범으로 맥을 이어가는 듯 싶은 환상을 자아냈지만 지금의 탄핵 정국이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한국의 보수는 뒤늦게 그 공백을 메울 새 출발의 과제를 떠안게 됐다. 한편 박정희식 권위주의 체제와의 투쟁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두었던 한국의 진보 또한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그들 특유의 자세와 전략에 집착해 왔기에 탄핵 정국 이후에 직면할 4차 산업혁명시대에 걸맞은 이념, 정책 플랫폼, 조직과 운영의 틀을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혁신의 과제와 맞부닥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대전환의 시점에서 국난에 처한 한국 정치는 과연 대개혁을 통한 위기 극복을 시도할 수 있을까. 지난 반세기, 세계를 놀라게 한 추진력으로 산업화·민주화·세계화를 이루고, 디지털혁명을 가져온 3차 산업혁명의 앞줄에 동참한 한국인의 돌파력이 있지 않은가. 고질적 내부 갈등을 봉합하고 정치 선진국으로 도약하려 다함께 지혜와 의지를 모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한 번 더 밝게 빛나게 될 것이다.

며칠 전 국회의장과 4당 원내대표가 헌재의 탄핵심판 결과에 승복하기로 합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정치권의 헌법 절차를 따르겠다는 당연한 결정이 핵심 뉴스가 될 정도로 한국 정치는 민주정치의 궤도에서 이탈할 증세를 보여 왔다. 이왕 정상적 궤도에 따라 전진하기로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헌법과 선거법의 개정 작업도 촉진시켜 광장에서 나타난 시민들의 목소리를 의사당과 연계시키는 한류 민주주의의 새 틀을 짜보기로 하자. 그리고 협치와 역할 분담의 창의성을 발휘해 온 독일 못지않은 한국 정치의 저력을 보여주자. 재벌 개혁은 보수가, 노동 개혁은 진보가 앞장서는 날을 기대해 본다.

결국 우리 모두가 국난을 극복하겠다는 역사적 소명에 부응하는 주인의식이 확고해야만 한다. 이 큰 과업을 이루려면 서로서로 너그럽게 이해하며 포용하는 공동체의식을 실천하는 길 외에 더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한 국민적 지혜와 의지로 뭉쳐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