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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리포트] 한국 경제의 성장잠재력 왜 약화되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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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은 통화·재정정책을 적극적으로 확대해 운용하는 등 저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런데도 세계 경기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지속적인 성장잠재력 하락과 ‘장기정체(secular stagnation)’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돼 왔다. 한국의 경우에도 대외 여건 변화에 대내적 요인마저 가세하면서 성장잠재력 약화 조짐이 커지고 있다.

낮은 성장률이 장기간 지속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산능력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성장률의 단기적 변화가 소비, 투자, 수출입 등 총수요 변동에 주로 기인했지만 성장률이 장기간 낮은 수준을 지속하는 것은 노동ㆍ자본 등 요소 투입 축소, 생산성 하락 등 공급 측 요인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금융위기 이후에는 수요 측 요인도 저성장을 장기간 지속시킬 수 있다는 견해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 금융위기는 대공황 이후 처음으로 은행위기, 신용경색, 주택·주식가격 폭락이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난 대규모 위기였다. 이로 인해 경기 침체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한 데다 위기로 인한 충격은 총수요 측면에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생산요소나 생산성에 장기간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구체적으로 높은 경제 불확실성, 실업률, 노동소득 분배율 하락, 소득 불균형 심화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대규모 악재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경제여건의 불확실성이 높은 수준을 지속했다. 불확실성에 대응해 기업이 미래보다 현재 상황을 중시해 투자를 결정하면서 과잉 저축 현상이 나타나고 자본축적도 위축됐다. 금융위기 이후 높아진 실업률이 경직적 노동제도 운용 등으로 장기간 지속하면서 많은 노동자가 경험학습(learning by doing)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가계소비는 노동소득 분배율 하락,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심화한 소득 불균형 등에 기인해 약화했다. 특히 노동소득 분배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여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이 구조적 요인에 기인했음을 시사한다.

한국 경제로 눈을 돌려보면 여타 국가보다 금융위기의 충격이 크지 않았으나 경제성장률이 추세적으로 낮아지는 모습이다. 금융위기 이전 5% 정도였던 잠재성장률이 최근 3%대 초반 수준으로 하락한 것으로 추정됐으며, 최근 들어 대내외 요인들의 부정적 영향이 커지면서 성장잠재력이 이보다 더 약해졌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 경제도 세계 경제와 마찬가지로 수요 요인과 공급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성장동력을 약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수요 측면에서는 인구 고령화, 가계부채 누증 등으로 소비가 부진한 데다 불확실성 지속, 비용 상승 등으로 투자가 둔화됐다. 공급 측면에서는 인구 고령화 등으로 노동 공급이 부정적 영향을 받고 있으며 투자 부진으로 자본축적이 정체되고 생산요소의 생산성이 낮아졌다.

주요 요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저출산·고령화 추세는 총수요와 총공급 양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성장잠재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한국의 2015년 출산율은 1.24로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거의 꼴찌에 가까운 수준을 기록했다. 인구 고령화도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노후 부담이 급속히 증가하는 한편 평생 기대소득이 정체되면서 사람들은 현재 소비를 꺼리고 미래를 대비해 저축을 확대하고 있다. 아울러 인구 고령화는 생산성이 높은 핵심 생산인구(25~49세) 비중을 빠르게 낮추면서 전체 생산가능인구를 지난해 이후 감소로 전환시켜 노동공급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으로 가계부채 부담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소비를 위축시키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가계부채가 축소된 주요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선 가계부채가 증가세를 지속했다. 소득 증가율이 가계부채 증가율에 미치지 못하면서 원리금 상환부담이 높아졌고 이는 특히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소비를 약화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투자는 경제 성숙화, 대내외 불확실성 증가, 투자비용 상승 등으로 둔화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물적 자본은 고도성장 과정에서 빠르게 축적되면서 소득 수준이 비슷한 국가보다 작지 않은 수준에 이르렀고 대내외 경제여건의 불확실성 확대는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한국 기업의 설비 투자를 위축시켰다. 인건비 등 투자 비용이 경쟁국에 비해 높아짐에 따라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외국인직접투자가 정체되고 있는 반면 해외직접투자는 크게 늘어났다.
총요소생산성 둔화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잠재성장률 하락의 주요 요인이었다. 노동, 자본 등 요소 공급이 둔화된 가운데 노동은 서비스부문으로, 자본은 제조업 부문으로 집중되면서 전체 생산성이 약화됐다. 더욱이 노동이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저부가가치 산업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노동생산성이 하락하면서 경제양극화도 심화될 우려가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통화·재정정책의 운용만으로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경제체질 강화를 위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사회·경제 구조개혁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연유이다.

산업구조 조정, 노동 및 재화·서비스시장 개혁, 기술혁신 등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적극적인 구조조정 추진으로 기업 진입·퇴출의 유연화를 도모해야 한다. 특히 창업 실패의 비용을 낮춰 혁신적 중소 신생기업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정책은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높일 것이다.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 정착, 최저임금제 준수율 제고 등으로 노동시장 관련 법률의 실효성을 높이고 노사정간 협의를 통해 노동시장 유연화 법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원활한 신기술 도입을 위해 법률 제도를 선제적으로 정비하고 구체적인 규제완화 로드맵을 작성하는 한편 공정한 기술거래 문화를 구축하고 지식집약적 서비스업 지원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기술 혁신을 위해 기업의 투자 환경을 개선하는 한편 긴 안목으로 연구개발 활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 제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신성장동력을 발굴하는 데 한층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장기적인 시계에서 소비의 원천인 가계부문의 소득을 골고루 증대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근로자의 임금·고용 조건의 불균형 완화, 소득 재분배 정책, 사회 안전망 확충 등으로 가계부문의 안정적인 소득·소비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저소득계층이나 실업자에 대한 재교육 정책 등 교육기회를 확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가계소득 증대는 경제 불확실성 충격에 대한 대응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에 대한 포괄적인 대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립 및 시행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노동시장의 약자인 청년, 여성인력 등의 경제참여를 활발하게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출산율 증가를 위한 인센티브를 강화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인적자본 축적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육아·복지 정책, 교육부문의 정책, 기업의 여성 고용 관련 정책 등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과 함께 인구문제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을 전환해 나가야 할 것이다.

김용복 한국은행 조사국 모형개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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