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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19금’ 투표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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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사회2부장

이상언
사회2부장

성(性)적 표현이 비교적 노골적인 영상물이나 노래, 술과 담배는 법적으로 만 19세 미만 국민이 접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제공하는 사람은 처벌 대상이다. 이른바 ‘19금’이다. 그 이상 나이를 먹은 사람들에게도 좋을 것이 없으나 국가가 금지하지는 않는다. 개인 책임 영역에 속한 일이라고 본다.

“다른 OECD 국가의 만 18세는 고교 졸업생”은 거짓말
학교에서 생각의 다양성과 싸우지 않는 대화법 배워야

공직자를 뽑는 투표도 현행법상 19금이다. 뒷날에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자괴감을 느끼는 사람이 꽤 있고(특히 최근에 그렇다),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이렇다 할 효용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충동에 지배될 때도 있다는 점에서 외설적 동영상, 술, 담배 따위와 투표가 비슷하기는 하다. 물론 이런 이유로 투표가 19금 목록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정치적 판단을 하기에 19세 미만은 미숙하다”는 게 공식적 이유다.

1차적 팩트는 이렇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중에서 선거권이 19금인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대개 만 18세 이상에게 투표권이 부여된다. 16세 이상으로 돼 있는 나라(오스트리아)도 있다. 전 세계의 230여 나라 중에서 만 18세가 공직 선거에 참여할 수 없는 곳은 32개국 정도인데, 가봉·세네갈·캄보디아·콜롬비아·파키스탄·필리핀 등이 속해 있다. 한국인이 본받아야 할 나라로 꼽는 곳은 찾기가 힘들다. 3년 전 스코틀랜드에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할 때 16세 이상(일반 선거 기준은 18세 이상)이 유권자로 정해졌다.

OECD에서 ‘나홀로’ 19금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보수적 교육계에서는 선진국에선 학생들의 고교 졸업이 일러 만 18세면 대학생이거나 사회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거짓말이다. 영국은 만 16, 17세에 중등교육(중·고교) 과정을 마친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한국 외교부의 자료 ‘영국 개황’에는 ‘영국은 6-5-2-3 학제를 택하고 있다. 중등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구분 없이 5년간 운영되며, 중등학교와 대학 사이에 대학준비 과정 또는 직업교육 과정인 후기중등 과정 2년이 있다’고 적혀 있다. 이 후기중등 과정은 통상 ‘A-레벨’이라고 불리는데 이를 거쳐야 대학에 갈 수 있다. 한국의 고교 과정에 해당한다. 학생들이 이를 마치는 때는 만 18세 또는 19세다.

OECD 회원국인 영국·프랑스 등에서는 만 18세에 이미 고교를 졸업한 상태라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이들 나라 대학으로 진학한 학생들은 해당 나라 출신 동급생들보다 평균적으로 나이가 한 살 많아야 한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학령 기준이 한국은 3월, 영국·프랑스 등은 9월이라 같은 때 태어나도 학년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지만 만 18세의 고교생은 그곳에도 많다.

일각에서는 만 18세 이상으로 유권자를 확대하면 교실에서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한다. 이런 생각에는 학생들이 세상 일엔 관심을 끊고 공부만 해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국무장관 출신으로 미국 대선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의 이력을 보면 17세(1964년)에 고교 역사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공화당 대선주자 베리 골드워터 선거 캠프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영국 보수당 대표와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윌리엄 헤이그는 16세(1977년)에 영국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학생 대표로 연설했다. 고교생을 일찌감치 정치가로 키우자는 얘기가 아니다. 해외 고교에서는 정치 토론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고교생들이 정치에 대한 지식과 의견을 갖는 것을 금기시하는 시각이 보편적이지는 않다는 의미다.

대개의 한국인들은 대학에 가고, 직업인이 된 뒤로는 학력과 소득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크게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과 속내를 드러내는 생각을 교환할 일이 많지 않다. 고등학교는 세상에는 다른 의견과 주장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생각이 달라도 화내거나 싸우지 않으며 말하는 법을, 싸웠다고 해도 원수가 되지는 않는 법을 체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히 필요한 부분이다.

이상언 사회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