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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과시적 테크닉” vs "음악과 지독한 사랑앓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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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기다리게 하고 놀라게 하라.” 피아니스트 임현정이 독주회 프로그램 노트에 쓴 연주 철학이다. 4일 그의 음악은 해석의 범주를 벗어났다. [사진 박상윤 작가]

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임현정(31)은 대중이 사랑하는 피아니스트다. 26세에 낸 첫 음반은 빌보드와 아이튠스의 클래식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왕벌의 비행’을 연주한 유튜브 동영상은 조회 55만을 기록했다. 파격적인 연주 스타일 덕분이다. 대중이 열광하는 사이 비평가는 외면했다. 속도는 유례없이 빠르고, 해석은 자의적이다. 슈만·브람스·라벨·프랑크를 연주한 이번 독주회에도 반대와 지지가 공존했다. “음악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 깨졌다”는 비판과 “지독한 사랑과 같은 예술”이라는 찬사가 동시에 나왔다. 어쩌면 현재 가장 논쟁적일 이 연주를 전하기 위해, 양쪽의 의견을 모두 소개한다.

경이로운 속도에 묻혀버린 음표들
음악의 본질적인 아름다움 깨뜨려

박제성(음악칼럼니스트)

논쟁적 피아니스트 임현정 독주회 리뷰

임현정은 슈만 카니발의 첫 화음을 누르자마자 경이로운 스피드로 건반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드럼 스틱으로 때리는 듯한 타건, 악센트와 화음에 묻혀버리는 리듬, 미처 소리를 내지 못한 채 다음 음에 묻히는 음표들, 속주의 음향 덩어리 가운데 실종되어버린 내선율들과 구조를 위협하는 옥타브들로 점철된 25분여가 지나갔다. 그녀가 기존 음악의 상투성과 보수성을 타파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 것에는 동의하지만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 속주(速奏)를 선택하여 피아노 음악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깨뜨리려는 것은 명백한 무리수로 보였다. 속주는 청중을 흥분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테크닉임은 분명하지만 임현정의 경우에 있어서는 슈퍼 비르투오소들의 첨예한 완성도에 미치지 못했고 테크닉을 넘어선 음악적 설득력(브람스)과 서사적 요소들의 개연성(프랑크) 또한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연주자가 해석에 개입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고 자신이 연마해 온 라벨 ‘거울’ 만큼은 완성도 높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생각해보면 자기과시적인 테크닉과 충격적 음향효과로 청중의 몰입도를 높인 앙코르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자족적 세계의 출발점이 아닐까 싶다.

뚜렷한 직관, 달리 해석하려는 몸짓
뭘 말하려는지는 아직 가늠할 수 없어

홍형진(소설가)

좋은 음악회였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일단 우리가 익히 기대한 무언가를 사실상 무시하다시피 한 연주였다.

그런 측면은 특히 브람스에서 두드러져서 만약 연주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연습 부족을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동안 지켜본 임현정의 행보를 볼 때, 게다가 이번 프로그램을 스스로 “먹고 싶어서 선택한 군것질”이라고 표현한 점을 감안할 때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론할 뿐이다.

그동안 발매한 앨범과 두 차례의 리사이틀을 통해 난 편견에 가까운 확신을 가지고 임현정을 바라보고 있다. 요약하자면 ‘뚜렷한 직관을 바탕으로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연주자다. 한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도통 가늠할 수 없다’가 되겠다. 즉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왜 그렇게 연주하는지는 헤아리지 못한단 뜻이다. 만약 다시 찾을 의향이 있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이겠다. 그가 어떤 음악을 빚어내고자 하는지 읽어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관객을 이 정도로 혼란스럽게 하는 연주자는 흔치 않다. 콩쿠르로 다져진 제도권 연주자에게선 보기 힘든 면모다. 나름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 연주자라는 점은 존중한다.

사랑하는 곡을 향한 거침없는 질주
지친 삶에 위로와 응원 같은 연주

이단비(무용·공연칼럼니스트)

그녀의 폭발적인 에너지에 관객들은 이따금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이번에 슈만과 브람스를 듣고 놀라는 관객들도 꽤 많았으리라.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슈만과 브람스가 아니었다면, 이건 저 연주자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연주는 창공을 가로질러 폭죽을 터트리는 불꽃놀이다. 때로는 정신을 빼놓을 정도로 빠른 템포와 강렬한 소리가 지친 삶에 큰 위로와 응원이 되는 법이다. 라벨 ‘거울’을 연주할 때는 그 곡과 작곡가와 지독하게 사랑에 빠진 한 연주가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술이란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임현정 자신이 한 말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곡 하나를 위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모습. 그것은 사랑에 빠진 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관객과 아티스트는 예술을 통해 대화하고, 또 함께 늙어가는 평생의 친구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은 없다. 임현정 스타일 그대로 그녀의 예술을 마주대할 때 이제까지 듣지 못했던 새로운 음악이 당신의 귀에 들릴 것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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