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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의 맛집] 점·선·면 추상화로 태어난 요리…입에서 감도는 황홀한 리듬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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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 약사 정재훈의 ‘보트르 메종’

소테른 사바이용 소스의 아스파라거스.

소테른 사바이용 소스의 아스파라거스.

“종이에 미리 그려보고 플레이팅”
미쉐린 별 하나 받은 프렌치 레스토랑
먹고 나면 아이디어 샘솟는 느낌

반드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가야 직성이 풀리는 날이 있다. 글을 쓰다 고민에 빠졌을 때 특히 그렇다. 대단한 음식을 먹고 나서야 머릿속에 뒤엉킨 생각이 정리될 것만 같은, 그럴 때 내가 찾는 곳 중 하나가 신사동 ‘보트르 메종(‘당신의 집’이라는 의미)’이다.

아뮤즈 부슈(식전에 먹는 한 입 요리)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까망베르 크림 치즈 볼을 중앙 아래에 두고 부채꼴 모양으로 숭어알 크림 미니콘을 꽂은 카눌레, 가지 슬라이스로 감싼 훈제연어, 라즈베리소스를 입혀 적포도처럼 보이는 청포도알, 프로슈토 햄 에끌레어가 차례로 놓여있는 걸 보고 있으면, 접시에 놓인 스푼이 마치 화가의 붓처럼 느껴진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이렇게 감상했더라면 큐레이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음식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매니저 이현준씨의 설명을 듣는다. 작고 정밀하게 만들어진 프랑스식 한 입 요리는 보고만 있어도 곧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듯하다. 시간과 비용을 더 들여가며 찾을 가치가 있다.

실제로 보트르 메종의 박민재 셰프는 메뉴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먼저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가느다란 흑임자 튀일(비스킷 종류)로 만든 직선이 아스파라거스를 대각선으로 교차하고 그 양쪽에 대칭으로 사바용 소스를 살포시 얹는다. 사각형 베이컨칩과 파마산 치즈조각이 선에 면을, 그 가운데 놓인 오세트라 캐비어가 점을 더한다. 접시 위에 음식을 어떻게 플레이팅할 것인가, 생각을 미리 종이로 옮겨보고 색칠도 해보고 나서야 그것들을 진짜 음식으로 구현해내는 게 박 셰프의 스타일이다. 진정한 쾌감은 지금부터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바라만 봐야하지만, 내 눈앞의 음식은 직접 맛볼 수 있다. 나는 음악에는 문외한이면서도 맛의 리듬을 느낄 때는 황홀해진다. 셰프가 그려낸 음식은 그렇게 그 음식을 먹는 이에게는 음악이 된다.

보트르 메종의 외관.

보트르 메종의 외관.

작년 11월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이 처음 발표됐을 때 보트르 메종이 별 하나를 받았다는 소식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식 평가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재현성이다. 내가 추천한 레스토랑에 친구가 방문했더니 하필 그날따라 맛이 형편없다면 낭패다. 개인에게도 그러한데 세계인이 둘러보는 미식 가이드에서야 ‘일관성 있는 음식’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사시사철 식재료 자체의 컨디션도 변하는 데 일정한 톤의 맛을 유지하는 게 어디 쉬운가. 그러려면 연구가 필요하다. 하나의 메뉴도 계속해서 조건을 바꿔가면서 실험하고, 실패할 경우 스태프와 함께 원인을 탐구하는 습관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보트르 메종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훌륭한 셰프는 실험에 매진하는 과학자와 비슷하다. 열린 자세로 계속 더 나은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바꿔나간다. 내가 보트르 메종을 좋아하는 이유다.

십 수 년 전 한 미식평론가가 지금은 문을 닫은 박민재 셰프의 이전 레스토랑에 대해 비판적으로 쓴 적이 있다.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듯 치즈를 차갑게 낸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맞는 말이다. 치즈의 향과 질감을 제대로 느끼려면 미리 꺼내두어 상온에 맞추는 게 좋고, 가급적이면 손님 앞에서 썰어내는 게 낫다. 보트르 메종에서는 그렇게 한다. 어제의 음식과 오늘의 음식은 일관성 있게 재현되지만, 십년 전과 지금의 음식은 다르다. 수많은 실험과 개선을 통해 더 멋진 모습으로 변화해왔다. 국내 프렌치 셰프 1세대로 불리지만 박민재 셰프의 얼굴에서는 늘 겸손함이 묻어난다. 글이 안 써져 마음이 답답한 날, 내가 그의 음식을 맛보며 무언의 격려를 받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파슬리·마늘소스를 곁들인 에스까르고.

파슬리·마늘소스를 곁들인 에스까르고.

그의 부지런함과 겸손함은 시종일관 드러난다. 3시간 가까이 걸리는 긴 코스지만 좀처럼 늘어지지 않는다. 코스 후반에도 계속해서 입맛을 돋우도록 잘 설계된 메뉴를 주방과 홀의 직원이 한 팀으로 기민하게 움직이며 제때 제때 내놓기 때문이다. 코스 중간에 서빙이 뚝 끊겨서 기다리게 되는 법이 없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 마지막에 정점을 찍는 시그니처 메뉴 수플레다. 반드시 맛보기를 추천한다.

부드러움 속에 강함을 숨긴 셰프처럼, 수플레의 토대는 달걀 흰자를 휘저어 만든 단단한 거품이다. 오븐의 온도와 혼합물의 농도를 세밀하게 조절해줘야만 보트르 메종의 수플레처럼 직각에 가깝게 부풀며 솟아오른 모양이 된다. 크고 깊은 그릇을 사용하면 중심까지 골고루 익은 수플레를 만들기 무척 어렵다. 거품이 겨울철 창문에 붙이는 에어캡(뽁뽁이)와 같은 원리로 단열재 역할을 해서 안쪽으로 열전달을 막기 때문이다. 박민재 셰프의 수플레는 10년 전보다 더 우묵한 그릇을 사용하면서도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원기둥 모양으로 부풀어 올라있다. 장인의 수플레를 맛보며 나 역시 어제와 오늘은 동일하지만, 과연 10년 뒤와 오늘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보길 권한다.

보트르 메종

주소: 강남구 신사동 645-1(언주로168길 16 히든하우스)
전화번호: 02-549-3800
영업시간: 정오~오후 10시, 휴식시간 3시~6시
주차: 가능
메뉴: 런치코스(3만7000원/5만7000원), 디너코스(10만원/13만원). 디너코스엔 네 가지 한 입 요리를 모둠으로 내놓는 아뮤즈 부슈를 비롯해 차가운 애피타이저 2종, 더운 요리 1종, 메인요리 스테이크(또는 양고기), 프랑스 모둠치즈, 바닐라수플레 등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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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약사. 음식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탐구한다. KBS 1TV ‘대식가들’을 비롯해 TV·라디오·신문·잡지 등의 매체에 출연중이다. 저서로는 『생각하는 식탁』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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