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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갑질은 유구한 전통 … 그 야만성이 광화문 함성 일게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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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자전적 요소를 녹인 장편 『공터에서』를 출간한 소설가 김훈. 아버지 세대와 자기 세대가 겪은 고통스러운 현대사를 다룬 작품이다. “주택과 주택 사이 버려진 공터의 가건물 같은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에 제목을 그렇게 달았다. 나무라지 말고 어여삐 봐달라”고 했다. [사진 해냄]

자전적 요소를 녹인 장편 『공터에서』를 출간한 소설가 김훈. 아버지 세대와 자기 세대가 겪은 고통스러운 현대사를 다룬 작품이다. “주택과 주택 사이 버려진 공터의 가건물 같은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에 제목을 그렇게 달았다. 나무라지 말고 어여삐 봐달라”고 했다. [사진 해냄]

우리 시대의 문장가 김훈(69)이 자신의 아버지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을 썼다. 『공터에서』(해냄)라는 작품이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아버지에 관한 소설을 쓰겠노라고 공언해왔다. 그의 아버지 김광주(1910∼73) 역시 신문기자였고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무협소설 작가로 『정협지』라는 작품을 써서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고 전해지고, 중앙일보에 1969∼71년까지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고'라는 제목으로 무협소설을 연재하기도 했다. 기자이거나 소설가였다는 점도 겹치지만, 대학을 중퇴했다는 점도 부자가 같다. 김광주는 상하이 남양의대를 다니다 그만뒀고 그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떠도는 바람에 아들 김훈은 고려대 영문과를 중퇴해야 했다.

새 장편『공터에서』펴낸 김훈
절망 속에서 세상 바꾸려다 미친
내 아버지 세대 쓰는 게 평생의 짐
조카들은 촛불, 친구들은 태극기
양쪽서 오라는데 감기 핑계로 빠져

막상 책장을 펼쳐 보니 소설은 아버지에 대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아버지 세대, 그리고 그 아들 세대가 겪어낸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 초점을 맞춘 느낌이다. 소설 속 부자로 등장하는 마동수-마차세는 가령 생년, 아버지를 병구완하는 에피소드 등이 실제 김훈 부자와 겹치지만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점이 많다. 김씨에 대해 잘 아는 한 출판사 대표는 "싱크로율로 따지면 5% 정도"라고 평했다.

그런 김씨의 소설을 읽는 일은 일반적인 소설을 읽는 일과 다르다. 김씨 소설이 독자가 기대하는 평균적인 소설의 모습과 사뭇 달라서다. 사뭇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면 어쨌든 상당히 다르다. 아마 김씨 특유의 문체가 승하다보니 벌어지는 일일 텐데, 고도로 민감한 감광지 같은 그의 '인식 기계'를 거쳐 뽑아져 나오는 그의 문장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내부의 상처를 통해 재편성된 외부 풍경을 옮긴 것이다. 김씨의 한껏 충전돼 시퍼런 문장들은 그런 탓이기도 하다는게 기자의 생각이다. 이번 소설에도 그런 문장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렇다보니 정교한 플롯이나 극적인 기승전결 없이도 소설은 굴러간다.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의 내면, 그들의 세상 이해를 전지적 시점에서 그리고 있지만 실은 이들의 시점은 김훈 한 사람의 시점으로 수렴된다. 그런 점에서 『공터에서』를 읽는 일은 현대사에 대한 김씨의 격한 산문을 읽는 것과 같다.

6일 기자간담회 자리. 서울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이 빈 틈이 없을 정도로 신문·방송 취재진이 빼곡히 몰렸다. 김씨는 약속시간 2시를 한껏 채워 나타났다. 그런데 오른쪽 눈 주위에 반창고를 붙인 모습이 건너 편에서도 뚜렷이 보였다. 궁금증은 곧 풀렸다. 작가의 말을 듣는 순서. 주섬주섬 일을 뗀 김씨는 "오늘 여기 오기 힘들었다. 돌아다니다가 빙판에 넘어져 이마가 깨쪘다. 그래도 이 자리에 나왔다. 졸작 소설에 대해 여러분들이 많은 관심이 매우 두렵게 생각된다"고 했다.

작가의 말뿐 아니라 꼬박 1시간 동안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김씨는 특유의 선굵고 호소력 있는 말솜씨로 취재진의 마음을 돌려 '작가 김훈'에 공감하게 만들었다.

그의 말들을 가급적 고스란히 전한다.

"이번 소설은 내가 살아온 시대에 관한 소설이다. 내가 올해 70인데 돌아가신 아버지는 1910년 나라가 망해 없어지던 해에, 나는 정부수립하던 48년에 태어났다. 1910년과 1948년이라는 숫자가 우리 부자의 생애에 운명적인 좌표처럼 찍혀버린 것이다. 거기에서 결코 도망갈 수 없는, 피해서 달아갈 수 없는 한 시대의 운명, 나나 내 아버지나 그 시대의 참혹한 피해자다. 내 소설은 피해자의 이야기다. 영웅이나 저항하는 인간은 나오지 않았다. 역사의 하중을, 시대가 개인에게 가하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도망다니고 시대를 부인하고, 결국 미치광이가 되서 바깥을 떠돌고, 그런 인간들이 모습을 그렸다.

희망은 아주 조금밖에 말하지 못했다. 아주 사소한 것 속에 들어 있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말하다가 미수에 그친 것 같다. 미수에 그친 게 너무 사소하고 무력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협소한 시야와 협소한 세계관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전망이나 시대 전체의 구조, 통합적인 시야가 내게는 없다. 나는 쓰고 싶은 것, 써야 마땅한 것을 쓰는 게 아니고 내가 쓸 수 있는 것들을 겨우겨우 조금씩 쓸 수 밖에 없다. 이런 글쓰기로 내 생애를 마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쓰고 싶은, 써야만 하는 목표나 당위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목표를 향해 내 언어를 몰고갈 장인적 기법 확보되지 않는 한 나는 글을 쓸 수 없다. 괴로운 고백인데 이 고백에는 거짓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시대의 여러가지 모습을 담으려 했지만 쓰지 못한 것이 훨씬 많다. 그걸 너무 나무라지 말고 겨우 쓴 부분을 어여삐 연민 가지고 보아주기를 부탁드린다. 나는 어떤 일생 전체를 전체로서 묘사할 수 없다. 고심참담해서 도입한 기법이, 전체를 통괄할 수 없는 자로서는, 디테일에 갑자기 달려들어 날카롭게 찍어 버리는 스냅적인 기법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디테일을 통해 큰 것을 드러내 돌파하려 생각이다. 그런 디테일을 그리되 펜의 스피드를 매우 빠르게 해 그 골격만을 그려내고 세부 사항을 그려내지 말자, 크로키 같은 기법을 써야겠구나, 생각했다. 전체를 말할 수 없는 자의 전략적 기법으로 말이다. 스냅과 크로키 데셍법을 내 글쓰기 전략으로 세웠다. 내 전략은 부분적으로 성공하고 많은 부분에서 실패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지금의 세 배 정도 되는 분량을 썼다가 스냅이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걷어내고 남은 부분만 인쇄한 거다. 등장인물들은 이념이나 사상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것보다 생활의 바탕 위에서 이념과 사상이 건설, 전개되어야 옳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소설 안에 전망이나 희망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아마 내가 쓴 다른 모든 작품에서도 발생하는 문제일 텐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너의 한계라고 하는 것 들었다. 그것은 나의 한계다.

그것뿐 아니고 모든 문장 하나하나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한계에 부딪쳐 갈팡질팡 살고 있다. 이번 소설에서 내 아버지 세대인 1910년생들은 만주에서 떠돌다 돌아와 여기서 한국 전쟁, 이승만·박정희 치하 겪었고 나는 이승만 때 태어나 박정희 시대를 살았다. 소설 속 아버지는 상해를 떠돌았고, 어머니는 흥남부두에서 월남한 피난민으로 부산에서 만나 결혼해 낳은 자식들이 장세와 차세다. 이런 설정은 매우 도식적일 테지만 어쩔 수 없다.

장세는 한국이 싫어 도망간 패륜아다. 2년 후에 태어난 차세는 어떻게든 조국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려고 하다. 결국 여러 고초를 겪는 과정을 그렸다. 마차세는 생활인으로서 발붙이는 데 거듭 실패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다. 어떤 분들은 이 소설이 내 아버지 김광주를 모델로 한 게 아닌가 질문하는데 나의 아버지와 다른 아버지를 합성한 것이다. 내 아버지처럼 만주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말투가 매우 크고 몽롱했다. 가파른 말을 사용하는 언어의 협객들이었다. 현실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 그 사람들이 술 먹고 떠드는 그런 모습 많이 봤다. 나는 그 사람들이 싫었다. 그 분들이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겉돌고 헤매는 여러가지 모습들 말이다.

상해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 과장된 것들이다. 과장해서 허장성세 말하는 많은 것들이 그대로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김구 선생과 연관된 독립운동가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냥 나라 잃고 방랑하는 유랑 청년 중 하나다. 그 유랑이 모습이 내 소설에 그려져 있다. 김구 선생이라는 거대한 캠프의 먼 외곽에 배치돼 있던 젊은이로, 김구 선생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지극히 멀리 있는 유랑의 청년 중 하나였다. 그런 아버지, 아들의 삶을 그리려 했는데 쓰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

이 땅에 70년을 살면서 내가 소름 끼치게 무서웠던 것은 우리 시대 야만성, 한없는 폭력과 업악, 한없는 야만성이었다. 그런 것들이 지금 악의 유산으로 세습되고 있다. 소설 쓰려고 지난 시대 신문 사회면 많이 봤는데 우리 사회의 70년 동안 유구한 전통은 갑질이더라. 뿌리 깊은 악이 유습으로 내려오는. 피난민들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50만 명이 줄 지어 추운 겨울날 피난가는데 이 나라 고관대작들이 군용차, 관용차 징발해서 군용트럭에 응접세트, 피아노 싣고 먼지 날리며 피난민 사이를 남쪽으로 질주하곤 했다. 국방부 정훈관이 제발 이런 짓 좀 하지 말라고 낸 성명이 부산일보 톱 기사로 나온 걸 봤다. 그걸 보고 내가 태어난 조국이 이런 나라였구나, 깨달았다. 이런 나라의 후예로구나, 이런 나라에 태어나 글을 쓰고 있구나. 그런 야만성이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 그래서 광화문에서 분노의 함성 일어나고 있는 거다. 앞으로 그런 문제에 대해 내 나름대로 매우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글쓰기를 하게 될 것 같다. 저 사람은 본래 저런 사람이구나, 받아들여주길 바란다."

최근 국정농단 사태를 어떻게 보나.
"어려운 질문인데, 초등학생 아이들을 둔 장성한 조카들이 있는데 광화문 집회에 나가 아이들과 깔깔거리며 찍은 사진을 내게 보내온다. 내 또래 친구들은 태극기 집회에 나간다. 양쪽에서 모두 가자고 하는데 감기 걸렸다는 핑계 대고 안 나갔다. 나랑 같이 자란 친구들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시대에 사춘기를 보냈고 국민학교 들어갔을 때 130달러 정도였다.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최빈국 수준이었고, 필리핀의 원조를 받았다. 친구들은 종합무역상사 해외주재원으로 베를린이나 파리에 가서 우리 여학생 생머리를 잘라 만든 가발, 비닐 원단, 미역, 김 등을 팔아 한 줌의 달러라도 국내에 송금한 사람들이다. 이 친구들이 연말에 술 먹으면 꼭 한탄하면서 우리 쌓은 것 무너져 간다, 그런다. 이들에게는 기아의 정서가 있다. 기아의 두려움 말이다. 제일 무서운 게 기아와 적화다. 그런 잠재된 근원 정서 때문에 아마 저렇게 됐구나 생각한다. 난방 펑펑 때는 세상에 살면서도 기아와 적화에 대한 공포 그런 생각 드는 것이다. 태극기 집회에 나타나는 성조기, 십자가, 태극기, 이것들은 내가 어렸을 때 이 나라의 반공 패턴과 완전히 똑 같은 것이다. 실은 광화문 집회에 혼자 갔다. 참가자라기보다 관찰자로서 이쪽 저쪽을 다 봤다. 내가 어렸을 때 반공이라는 것은 항상 기독교 우파와 결탁했다. 공산주의는 기독교 부정하는 거기 때문에. 그걸 보며 내가 참 어디 와 있나, 70년 지났는데, 그런 생각 들었다. 우리 어려서 이승만이나 박정희 대통령이 외국 갈 때 강제 동원되서 태극기 흔들었다. 도심지 학교 얘들은 지금 사람들이 시위하는 장소에 나가 대통령이 오기를 한 나절 기다려야 했다. 아이들이 오줌 마려우면 남학생들은 가로수 뒤에서 일을 보지만 여학생들은 발을 동동 구른다. 겨울에 언 도시락 까먹고 대통령 지나면 만세 불렀다. 바로 광화문 시위 자리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저렇게 태극기 들고 데모한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거 아닌가. 서 있는 자리 어딘가 싶다."
두 가지 질문이다. 지난해 5월 한 강연에서 세월호에 관한 신작을 쓴다고 했는데 어떻게 됐나. 또 평소 소설보다 에세이가 쉽다고 말하곤 하는데 어떤가.
"세월호 얘기는 그 사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자료는 많이 읽었다. 아주 많이. 학문 자료는 별 재미 없고, 기자들이 현장에서 쓴 글을 좋아한다. 다큐나 르뽀, 보고서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실록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좋아한다. 세월호는 소설로 쓰자면 이야기를 변형시킬 수밖에 없는데, 세월호 참사 다음날 자살한 안산고 교감, 인솔 책임자였는데 애들 버리고 혼자 탈출해서 다음날 아침에 나무에 목매달고 죽었던 분 말이다, 너무 끔찍했다, 이걸 뭐라고 써야 하나. 그 교감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어쩌면 종교의 영역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두 번째 질문, 에세이와 소설 중에서는 역시 에세이가 편하다. 주인공 없이 무책임한 정서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어서다. 소설은 반드시 등장인물을 통해 말해야 하는데 특히 3인칭 만든다는 게 무척 어렵다. 내 소설에 3인칭을 쓰지만 아직 3인칭에 도달하지 못한 1인칭의 아류들일 것. 존경하는 황석영 선배 같은 분은 3인칭을 정말 잘 만드는데 나는 3인칭 만들기 어렵다."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나. 인상적인 후배 소설가가 있나.
"젊은 소설가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안목이 내게는 없다. 내가 필요한 것만 골라 읽는다. 젊은 작가들은 우리 세대 못 보는 것들을 보고 있더라. 우리 세대가 구사할 수 없는 언어도 구사하는데 그건 놀라운 발전이다. 우리 노인들은 장님처럼 못 보고 지나는 게 많다. 다만 걱정은 대개 사소한 것들, 트리비얼한 것들에 치우치는 느낌이다. 사소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지엽말단이나 트리비얼에서도 큰 의미 찾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새로운 시선은 매우 경이롭게 바라본다. 젊은이들이 문체에 관한 고민이 없는 점도 걱정스럽다. 문체에 관한 한 나는 매우 신중하다. 어떤 글을 쓰려고 할 때 그 목적에 맞는 장인적 기법을 찾는 일은 내게 무척 중요하다. 그게 없는 한 나는 그 목표를 향해 갈 수 없다. 그렇게 기법을 중시할 때 '조사'는 아주 중요하다. 한국어 논리 작업에 있어서 조사가 없으면 안 된다. 한국어로 하는 사유는 조사를 연결한다는 것이다. 우리 조사는 '은, 는, 이, 가' 등 대여섯 가지다. 그걸 뗐다 붙였다 하면서 가난한 언어의 삶을 사는 거다. 조사는 모호한데 그 모호함 속에 모국어의 힘이 있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와 '비는 내린다'는 다른 느낌이지만 그 차이를 문법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다르다. 그런 걸 문장마다 하나하나 따지려면 진이 빠진다. 하지만 그런 노력 없이는 문체를 만들 수 없다. 나는 법전 읽는 거 좋아하는데, 우리 순수한 한국어는 조사나 종결형 어미밖에 안 나온다. 지시어나 개념어, 주어·동사·술어는 모두 한자로 돼 있다. 그걸 한글로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100년 지나도 법전의 한글화는 불가능할 거다. 가령 '땅'만 해도 대지, 택지, 공한지 등 여러 종류인데 그걸 그냥 땅이라고 했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정범, 종범, 미필적 고의, 이런 말도 한글로 표현할 수 없다. 한자는 우리나라 글자다. 수 천 년 쓴 글자다. 우리 글자라고 해도 손상 없는 것이다. '달아 노피곰 도다샤', 이것 만이 한글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소설에 한자 도입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자 필요하면 반드시 넣는다. 그게 우리 모국어를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역시 두 가지 질문이다. 시대 전체를 조망하는 이 시대 큰 작가가 있다면 어떤 분들인가. 광화문 집회에서 촛불, 태극이 어느 편인가.
"내가 한국문학 전체를 놓고 통찰력 있는 시각을 내놓을 입장이 아닌데 아무래도 조정래나 황석영 선배 같은 분들 아닐까. 한 시대의 억압적인 구조나 역사적인 틀, 그 전체를 보면서 주물러 가면서 인물을 배치하고 소설을 쓴다. 나는 그런 시각보다는 디테일 통해 좀 더 큰 걸 말해보고자 하는 그런 생각 있다. 구조나 전체를 들여다보녀 작품을 쓰는 작가들을 한 없이 존경하지만 내가 그 분들 뒤를 따라가지는 못할 것 같다. 이건 내 정직한 고백이다. 광화문 집회는 아무 데도 안 간 건 아닐 것이다. 양쪽 다 기웃거렸다. 해방 후 70년이 지나도 자동차 공회전 하듯 나는 같은 자리, 외국 나가는 박정희에 태극기 흔들었던 그 자리에 아직 서 있다는 게 너무나 서글픈 마음이었다. 위정자들이 저지른 난세를 광장의 군중들의 함성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크나큰 불행이지만 그 안에 희망의 싹이 있을 거다. 분노의 폭발을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동력으로 연결하기를 바라는데 그 연결은 역시 정치 지도자들의 몫일 것이다."
당신에게 현대사가 특별한 이유는.
"내 아버지 세대와 내 세대가 살아온 일들을 다섯 권 정도 분량으로 쓰려고 했다. 한데 기력이 미치지 못했고 싹 다 버렸다. 결과는 초라하게 됐다. 내가 쓴 것보다 못 쓴 게 더 많다. 내 평생 짐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세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저런 아버지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누구나 자기 아버지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저런 삶을 살면 안 되겠구나. 그게 이 작품을 쓴 동기다."
희망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고 했는데.
"희망적인 내용을 쓰고 싶었는데 잘 안 돼 미수에 그친 느낌이다. 아주 사소한 희망이다. 아이가 태어나는 일은 순수한 생명의 원형이 드러나는 일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여자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걸 희망이라고 하자니 좀 한심하지 않나. 그렇다고 어떤 이념이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희망은 생활 위에서 건설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 바탕에서 갑질을 쳐부수는 거다."
소설 제목 '공터에서'의 의미는. 또 소설책 표지에 말이 그려져 있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
"아버지가 내게는 말의 인상이었다. 소설 속에 말 타는 얘기도 나오는데 비루 먹은 불쌍한 말 말이다. 그 말에 투사한 아버지를 투사한 거다. 표지의 말은 너무 경마장 말처럼 됐다. 제목은, 공터는 주택과 주택 사이 버려진 땅인데 아무런 역사적 구조물이나 시대가 안착될 만한 건물이 들어있지 않은 공간이다. 나와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를 공터로 가정한 거다. 나는 평생 가건물에서 산 것 같다. 광화문의 태극기집회 보고 내가 계속 철거되는 가건물에 살아왔구나, 또 헐리겠구나, 그런 생가 들었다. '공터에서'는 그런 나의 비애감과 연결되는 제목이다."
아버지 이름이 왜 하필 마동수인가.
"마씨는 우리 아버지가 말이니까…. 동은 동녁 동, 수는 지킬 수다. 동쪽을 지킨다는 애국적인 이름인데 결국 애국과 관련 없이 세상을 떠도는 존재다 됐다. 장세, 차세는 잘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를 다뤘다고 하면서 정작 70년대 얘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동안 저조했다. 그 이유는 몸이 많이 안 좋아서다. 지금은 좋아졌다. 특별한 건 없는데 노화현상인 것 같다. 글을 쓰기가 싫었다. 단편을 가끔 쓰거나 에세이를 쓰며 살았다. 올해부터 정신 차려서 쓰려고 한다. 닭이 알 낳듯. 70년대에 대해서는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80년 당시 한국 언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다 안다. 완전히 안다. 그건 어느 언론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후에 생긴 언론사는 예외다. 그 후에 생긴 많은 언론사는 80년대로부터 자유롭지만. 어쨌든 70년대, 80년에 있었던 일을 나는 다 안다. 내 선배들은 더 잘 알 테고. 한데 우리 사회는 그 문제에 대해 총제적으로 반성하거나 되묻지 않는다. 단 한 번도. 그리고 그래도 흘러간다. 그것을 이제 말할 때도 된 거 아닌가. 나는 74년에 언론사에 입사해 5년 반쯤 된 기자였다. 80년 전후의 일을 내가 소설로 써야 하나, 자신이 없다. 내가 소설을 쓰는 것보다 그 시대에 언론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다 모여 왜 그렇게 됐는지 애기라도 좀 했으면 좋겠다. 내가 짐작하기에 그 시대 언론들이 역사라는 것은 민주적 법칙에따라 전개되고 진화한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이 얘기는 맞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압도적인 사회 전체의 공포 분위기에 짓밟혀 있었던 거다. 그 시대 그런 언론 행위로 출세해 권력의 정상까지 간 사람들 아마 지금도 있을 거다. 다 모여 얘기했으면 좋겠다. 그걸 내가 소설로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독자들에게 한 마디 한다면.
"책 많이 사보라고 해야 하나(웃음). 여러분들 이렇게 많이 올 줄 몰랐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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