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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고의 산실 ‘요괴 마을’ 연 관광객 300만명 홀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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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일본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시, 관광명소 된 비결

일본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의 ‘미즈키 시게루 로드’는 일명 요괴 거리로 불린다. 만화 『게게게의 기타로』의 등장 요괴들. [MIZUKI Productions]]

일본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의 ‘미즈키 시게루 로드’는 일명 요괴 거리로 불린다. 만화 『게게게의 기타로』의 등장 요괴들. [MIZUKI Productions]

연 관광객 2만 명(1993년)→372만 명(2010년).

쇠락한 도시 살리려 요괴 동상 설치
주민들 처음엔 “밤에 무섭다” 반발
파손·분실 사건 보도돼 유명세

열차·상점·은행·빵까지 온통 요괴
작가 미즈키, 저작권 무상으로 양도
돗토리현도 ‘만화 왕국’ 내걸고 지원

포켓몬스터·디지몬 캐릭터로 진화
“전통 요괴를 대중들이 좋아하게
매력적 콘텐트로 만드는 데 성공”

일본 돗토리(鳥取)현 사카이미나토(境港)시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관광신화를 창조했다. 이 소도시가 개발한 관광 아이템은 ‘요괴 체험’. 도시 일부를 요괴 테마파크로 만들어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관광객으로 가득 찬 거리 전경. [MIZUKI Productions]]

관광객으로 가득 찬 거리 전경. [MIZUKI Productions]

지난달 22일 찾은 이 도시의 ‘미즈키 시게루(水木しげる) 로드’는 요괴들로 가득했다. 좀비를 주제로 큰 인기를 끌었던 미국 폭스채널의 TV시리즈인 ‘워킹 데드’에 나오는 한 장면과 흡사했다. 테마파크행 기차를 타기 위해 자동발권기에서 표를 뽑은 지 7분 만에 ‘요괴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섰다. 열차 외부는 온통 요괴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다. 어깨에 도롱이를 두르고 지팡이에 몸을 기댄 할아버지 요괴를 비롯해 갖가지 요괴들이 아우성치듯 기차에 들러붙어 관광객들을 맞았다.

요괴 그림이 전면에 그려진 요괴 열차. [MIZUKI Productions]]

요괴 그림이 전면에 그려진 요괴 열차. 김준영 기자

열차 내부에도 형형색색 요괴로 채워져 있었다. 여섯 정거장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하니 빨간 핏줄이 선 눈알 모양의 가로등이 눈에 들어왔다. 관광객을 기다리는 택시의 지붕에는 ‘TAXI’라는 표시등 대신 눈알 모양의 요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기차역과 연결된 800m 남짓한 거리에 나서자 열 걸음에 한 개 꼴로 요괴 동상과 마주쳤다. 거리의 상점들은 물론 은행과 파출소 등 모든 건물의 외벽과 내부가 요괴로 장식돼 말 그대로 ‘요괴 거리’였다. 거리 중간쯤엔 요괴들을 모시는 신사(神社)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앞 커다란 그릇 안엔 지름 30㎝ 크기의 대형 눈알 모양의 돌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여기가 요괴신사임을 알렸다. 바람을 타고 온 빵 냄새를 따라 빵집 안에 들어서자 심지어 빵 모양도 요괴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뜻 한 입 베어 물기에는 주저함이 앞섰다. 빵집 창 밖으론 인간 몸에 생쥐 머리를 달고 있는 요괴가 팔자걸음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연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요괴 천국에 빠져들었다.

사실 인구 3만5000명에 불과한 사카이미나토시는 20여 년 전만 해도 쇠락한 지방도시에 불과했다. 인구는 감소했고 지역 경제는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이 도시를 살린 것은 만화였다. 지역 출신 만화 작가인 미즈키 시게루(2015년 작고)의 대표작 『게게게의 기타로(ゲゲゲの鬼太郞)』에 등장하는 요괴들이 도시를 부활시켰다.

미즈키 시게루 로드에 설치된 요괴 동상들.

미즈키 시게루 로드에 설치된 요괴 동상들. 김준영 기자

1993년 시청의 문화담당 공무원이었던 구로메 도모노리(黑目友則)가 요괴 동상을 설치하자는 제안을 냈다. 하지만 초기엔 순탄치 않았다. 요괴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주민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밤에 거리에서 요괴 동상을 만나면 무서워 어떻게 다니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구로메는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섰다. 결국 한 할머니가 집 앞에 요괴 동상 설치를 허락하면서 93년에 총 23개의 요괴 동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동상이 파손되거나 없어지는 사건이 잦았다. 이 작은 소동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 소도시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얻게 됐다.

주민들은 생각을 바꿨다. “요괴를 잘 활용하면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겠다”며 모금을 통해 동상을 늘렸다. 만화 작가 미즈키는 고향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캐릭터 저작권을 무상 양도하고 거액의 기부금도 냈다.

미즈키 시게루 로드에 설치된 요괴 동상들. 주인공 기타로.

미즈키 시게루 로드에 설치된 요괴 동상들. 주인공 기타로. [MIZUKI Productions]

상급 지자체인 돗토리현은 아예 사카이미나토시 인근에 있는 요나고(米子) 국제공항의 이름을 ‘요나고 기타로 공항’으로 바꿨다. 만화 주인공(기타로)을 공항명에 넣은 것이다. 또 ‘만화 왕국 돗토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홍보에도 적극 나섰다. 요괴 동상은 153개로 늘었고 매년 200만~3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기타로의 친구 네즈미오토코.

기타로의 친구 네즈미오토코. [MIZUKI Productions]

미즈키 작가의 아내를 소재로 한 드라마 ‘게게게의 여보(ゲゲゲの女房)’가 NHK에 방영됐던 2010년에는 관광객이 372만 명을 기록했다. 도시 인구의 100배가 넘는 사람이 방문한 셈이다.

첫 동상을 허락했던 할머니의 딸은 현재 요괴 거리에서 ‘기타로 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아이디어를 냈던 구로메는 공직에서 은퇴한 뒤 요괴물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요괴 관련 기념품. [MIZUKI Productions]]

요괴 관련 기념품. 김준영 기자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장인 쇼지 유키오(庄司行男)는 “사카이미나토시의 부흥은 민관이 함께 일궈낸 기적”이라며 “좋은 아이템만 제대로 개발한다면 지방 소도시도 큰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라고 말했다.

지난달 한국에도 출시된 증강현실(AR) 게임 포켓몬고 속 캐릭터들도 미즈키 작가의 만화 요괴들을 본떠 만든 것이다. 김용의 전남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는 “포켓몬스터, 디지몬 어드벤처, 요괴 워치 등 수많은 요괴물들은 모두 『게게게의 기타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며 “미즈키 작가는 일본 요괴를 대중화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미즈키 작가는 『게게게의 기타로』의 주인공인 기타로를 1933년에 처음 만들었다. 이후 그는 일본 전역에 산재한 요괴 민담을 취재해 요괴 만화로 펴냈다.

기타로의 친구인 ‘잇탄 모멘(一反木綿)’은 길이 11m의 하얀 무명천 요괴다. 인간의 목을 죄어 질식사시킨다는 가고시마(鹿兒島)현의 민담에서 유래했다. 머리 뒤에도 입이 달린 두 입 여자 ‘후타쿠치온나(二口女)’는 에도시대의 기담집 『그림책 백가지 이야기(繪本百物語)』에서 따왔다.

요괴 모양 빵. [MIZUKI Productions]]

요괴 모양 빵. 김준영 기자

미즈키 작가의 초기 작품에 등장하는 요괴들은 주로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였다. 요괴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과 일치한다. 그러다 70년대 초 어린이 잡지인 『소년 매거진』에 연재하면서 친근한 요괴로 변신했다. 인간을 해치던 기타로는 사악한 요괴들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캐릭터로 변모했고, 주변 요괴들도 주인공을 돕는 친구 역할을 했다. 요괴들이 인간 친화적으로 바뀐 첫 사례였다.

미즈키 시게루 로드에 설치된 요괴 동상.

미즈키 시게루 로드에 설치된 요괴 동상. 김준영 기자

요괴 캐릭터의 변신으로 미즈키 작가의 요괴들은 현재 노년층부터 아이들까지 폭넓은 팬을 확보했다. 실제 미즈키 시게루 로드를 찾는 관광객은 손주의 손을 잡고 온 노인부터 젊은 커플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초등학생 자녀 둘을 데리고 히로시마(廣島)현에서 온 무라카미 마사코(村上昌子·46)는 “어린 시절부터 미즈키 작가의 요괴들을 보고 자랐다”며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도 『게게게의 기타로』를 알고 있을 만큼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쇼지 관장은 “요괴 만화 거장인 미즈키 작가의 작품들은 조상들이 갖고 있던 요괴에 대한 인식을 후세에 전달할 수 있는 민속학적 가치도 있다”고 말했다. 김종대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일본은 만화를 만들 때도 민속학자의 자문을 구할 만큼 철저히 준비한다”며 “이런 노력으로 일본은 전통 요괴를 대중이 좋아하는 매력적인 콘텐트로 재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S BOX] 한국 전통 도깨비 그림은 한 장뿐

최근 화제 속에 종영한 TV 드라마 ‘도깨비’로 한국의 대표적인 정령(精靈)인 도깨비가 연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도깨비(공유 역)에 대한 ‘공유 앓이’만 늘었을 뿐 정작 전통문화 속 도깨비에 대해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지난 30여 년간 도깨비 연구를 해 온 ‘도깨비 박사’ 김종대 교수는 “현재 남아 있는 전통 도깨비 그림은 1869년 소치 허련이 그린 ‘귀화전도(鬼火前導·사진)’가 유일하다”며 “우리가 알고 있는 뿔 달린 도깨비 이미지는 일제강점기 때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의 일제 통치 방식)의 요량으로 전파된 일본 전통 요괴 오니(おに) 의 형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 오니가 광복 이후 현재까지도 여전히 우리의 도깨비로 여겨지고 있다. 체계적으로 요괴학을 발전시킨 일본과 달리 한국은 전통문화 콘텐트에 대한 관심이 적고 배타적이기까지 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실제 미즈키 시게루 로드를 벤치마킹해 조성된 전라남도 곡성의 ‘섬진강 도깨비 마을’은 일부 기독교 단체의 강한 반발로 무산될 뻔했다. 김종대 교수가 교편을 잡았던 중앙대 비교민속학과는 2013년 구조조정의 미명하에 폐지되기도 했다.

사카이미나토=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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