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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이야기 해줄까 #11. 기이 - 이야기 해줄까 (3)

중앙일보

입력

진행이 끝났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뭐가 달라지나?”

“특별한 건 없어. 완전체가 된 거니까.”

기이의 모습은 다른 여자들과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이상하지.
엉덩이의 볼록한 빛을 잃어 평범해진 기이가,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함께 머물며 안개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기이가 이제 그만 지겨워졌다. 갑자기 생겨났으니 갑자기 사라져버려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가만두었다. 내 공간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게 내버려 두었다. 자판에 얹은 손가락 끝이 뜨겁기만 했다.

“당신이 계속 고독한 건 아름다운 소설을 쓰려 하기 때문이야. 매혹적이지 못한 일이야. 널린 이야기일 뿐이야.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속지 않아.”
리모컨 버튼을 뽁뽁, 누르며 텔레비전 세상을 구경하던 기이가 말했다.
분명 소파에 있었는데 어느새 내려다보는 자세로 내 앞에 있다. 기묘한 이동이지만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화가 나지 않는다. 내 소설에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네던 윤에게처럼 길길이 날뛰지 않았다. 모욕적인 말을 쏟아부으며 비겁하게 굴지도 않았다. 기이를 빤히 보며 살포시 웃기까지 했다.

“가령…”

가령…. 나는 오목하게 오므려지는 입술을 따라 했다. 이야기를 조르는 아이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기이가 내 쪽으로 서서히 몸을 구부렸다. 표정의 변화 하나하나까지 다 보였다. 완전하구나, 기이는. 자잘한 주름과 솜털까지 있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야기해줄까?”

파도처럼 밀려온 바람이 귓바퀴에 고였다.
몸의 감각들이 푸르게 날을 세우며 일어섰다. 발가락이 툭툭 튀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의식이 아니다. 유혹하는 것을 향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호기심이 만든 반응이다. 얼마든지 매혹적인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완전체라 했으니 오직 기이만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근거 없는 믿음이 순간의 모든 것으로 차오른다. 오줌이 마려웠으나 참을 수 있었다. 뿌우, 찻주전자에서 물이 끓었다. 뭉글하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사이로 눈 내리는 창밖 풍경이 보였다. 겨울의 해는 쉽게 졌다. 사방에 곧 어둠이 깔릴 거였다.
기이가 입을 벌렸다.
도톰하게 아름다운 입술이 만드는 곡선들을 가만히 들었다. 바람이 눈을 휘모는 숲속으로 스며들었다. 사물의 수없는 그림자가 눈앞을 지나쳐갔다.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나는 만들지 못할 이야기 숲이 저만치 달아나는 것을 맥없이 보았다. 보기만 했다. 내 손은 자판 위에 있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한 줄의 문장도 받아쓰지 못했다.

“입 좀 다물어.”

기이의 말했다. 자판 위의 내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기이는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수직의 시선이 불편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있었다.

“비켜 봐.”

기이가 의자에 앉은 나를 검지 하나로 밀었다. 엉거주춤 일어나 옆으로 비켜났다. 무언가에서 떨어져 나온 곤충처럼 다리 근육이 방정맞게 팔랑거렸다. 바람이 후두두 거실 창을 흔들며 지나가고 이내 잠잠해졌다.
기이가 의자를 책상 쪽으로 바짝 당기고 자판에 손을 올렸다.
마른 손가락들이 바다생물의 촉수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의 커서가 촘촘한 문장의 그물을 그렸다. 나는 역시나 엉거주춤 서서 불완전한 자음과 모음이 결합해 만든 글자들을 눈으로 읽었다. 장면들이 휙휙 지나가며 숲속 풍경이 입체 그림으로 솟아올랐다. 안개가 스민 듯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길게 오줌을 누었다.

눈이 흩날렸다.
몇 줄 쓰지 못하고 손을 멈춘다. 괜히 어깨가 무너질 듯 아팠다. 시작은 내가 했지만 기이가 중간중간 끼어들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비켜 봐.”

기이가 민다. 아니다. 손가락이 닿기 전에 내가 먼저 일어났다.
지난 이틀 내내 소설에 매달렸다. 내가 아닌 기이가.
나는 오렌지색 스탠드가 쏟아내는 불빛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들었다. 내 자리를 스토리존이라 불렀고, 그건 기이가 정한 규칙 같은 거였다.
매번 밤은 깊어져 곧 아침이 다가올 기세였지만 듣다 보면 자꾸 이끌려 고개를 끄덕였다. 기이는 창밖의 계속되는 눈처럼 끝없이 이야기를 생산해냈고, 기존의 것들에 장면을 덧대 다른 모양으로 조립했다. 말도 안 되거나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더하기도 했다. 충분히 독특하고 새로운 세계들. 조립자처럼 끊임없이 문장들을 솟아 올리고 덧댄다. 내가 쓰다 놓았던 두 편의 소설을 일주일 만에 완성했다. 나라면 생각도 못했을 유려한 문장이, 결말의 장면이, 새로운 시선이 녹아들었다. 내가 하는 일은 인쇄된 종이에 새긴 글자들을 가만 쓰는 것뿐이었다. 손끝에서 기이의 문양이 꿈틀거렸다. 소설은 살아있었다.

모든 비밀은 깊고 어두워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비밀의 본질이다.
기이와 함께했지만 까만 덩어리를 삼키는 건 내 몫이었다. 문학계간지로부터 투고했던 소설이 실린다는 연락이 왔다. 그토록 인색하고 무심하게 굴던 사람들이 손을 내밀었다. 받지 않는데도 출판사 편집자가 다섯 차례나 전화를 했다. 나는 비밀의 덩어리를 삼킬 때마다 아프도록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계간지에서 청탁이 왔다. ‘다시 떠오른 목소리’ 표제로 내 소설이 다루어졌다.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부러 받지 않는 네 번째 전화다.
푸르게 깜박이는 빛이 물감처럼 몸으로 번져왔다. 발신인을 확인하려 집어 들다 액정을 만졌다. 실수였다. 당신들은 나를 버렸잖아. 한순간에 손을 놓아버렸잖아. 더 기다려. 아직은 아니지.

“아직은 아니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지내?”

윤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얼마 전에 문학상을 탔다. 변변치 못한 건 비슷하다 싶었는데 나를 떠나자마자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그래.”

“이상한 대답을 하는 건 여전하구나.”

윤이 작게 웃었다. 작은 소리로 웃는 건 그녀답지 않다.

“소설 읽었어. 너무 변해 깜짝 놀랐다.”

“…….”

“좋더라. 독특하고 기이해. 변신이라도 한 거야?”

거실에 엎드려 있던 기이가 몸을 흔들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주 천천히 걸어 관절이 따로따로 움직이는 인형 같다. 내가 물고 빨아 거봉만 해진 검고 동그란 젖꼭지가 유난히 크게 닿는다. 안 그러고 싶어, 안 그럴 거야 하면서도 눈을 떠보면 젖꼭지를 물고 있었다. 내 방에 누워 잠들어도 일어나면 기이 옆이었다. 거실이든 소파든 어디든. 사실 기이의 분홍빛 젖꽃판은 아름답다. 첫맛이 비릿한 액체가 뭔지 모르면서 한 모금이라도 목으로 넘겨야 편안했다. 허기진 갓난아기로 늘 젖꼭지 곁을 맴돌았다.

“대답 잘 안 하는 건 여전하네. 잘 지내.”
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등단 동기였고 바라보는 곳이 같았다. 그토록 갖고 싶던 걸 가진 윤이, 절대 뒤돌아보지 않던 윤이 왜 전화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손이 아리도록 휴대폰을 꽉 쥐었다.

“할 수 있겠어?”

기이가 바짝 다가왔다.

“옷이나 좀 입어.”

지겹다. 엉덩이의 빛도 꺼진 주제에.
젖꼭지를 물고 빨면서도 그랬다. 매혹적인 분홍빛 젖꽃판이, 거봉만 한 젖꼭지가, 비릿한 하얀 액체가.
기이는 샐쭉 입을 내밀더니 거실 창으로 가 누웠다. 벽에서 떨어져 나온 후부터 완전하게 무례해졌다. 함부로 내 안을, 소설 속을 들락거렸다. 묻지 않고 헤집어 분해하고 섞고 조립했다. 아무 때나 귓속으로 이야기해줄까, 이야기해줄까 바람을 밀어 넣었다. 비켜 봐, 하면 나는 머리를 긁으며 옆으로 비켜난다. 이제 그런 방식은 지겹다. 독특하고 새롭고 기이한 건 인정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설명할 수 없지만 소설은 그런 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온전히 내가 구상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랬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이의 새로운 것들로, 기묘하고 독특한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소설은.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그 숭고하고 진중한 세계는.


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단편 『아칸소스테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창작소설집 『마리 오 정원』
테마소설집 『2012신예작가』
12월 테마소설집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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