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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서 여덟 손가락 잃었지만 다시 갑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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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2년 만에 히말라야 등정에 나서는 박정헌씨는 이번엔 아마추어 산악인들과 함께 산을 오른다. [중앙포토]

12년 만에 히말라야 등정에 나서는 박정헌씨는 이번엔 아마추어 산악인들과 함께 산을 오른다. [중앙포토]

손가락·발가락 없이 히말라야 6000m 산에 오를 수 있을까. 산악인 박정헌(46)씨가 이를 증명해 보이는 도전에 나선다. 그는 지난 2005년 네팔 촐라체(6440m) 북벽 원정에서 손가락 8개와 발가락 2개를 잃었다. 산악인으로선 사망 선고와 다름없는 부상이었다. 그런 그가 12년 만에 다시 산에 오르겠다고 선언했다. 장애인으로서 누군가의 손발에 의지해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히말라야에 도전하고 싶은 아마추어 산악인을 모집해 원정대장 자격으로 앞장서 오를 계획이다.

소설 『촐라체』 주인공 박정헌씨
12년 전 등반 중 후배 구하다 중상
4월 6119m 로부제 동봉 원정나서
“아마추어 산악인들과 함께 오를 것”

그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오는 4월 출발하는 네팔 히말라야 로부제 동봉(6119m) 원정대원을 모집한다”고 밝혔다. 그가 모집 공고를 내자마자 5명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중장년 남성 4명, 30대 여성 1명이다.

등산학교를 수료했으니 산에 대한 문외한은 아니지만 모두 히말라야 등반은 처음이다. 박씨는 “ 암벽 구간 400m만 고정 로프를 설치하면 초보자도 오를 수 있다”며 “네팔의 경험 많은 셰르파 친구들이 스태프로 합류해 안전을 책임질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히말라야에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다 손가락 8개와 발가락 2개를 잃었다. [중앙포토]

박씨는 히말라야에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다 손가락 8개와 발가락 2개를 잃었다. [중앙포토]

박씨는 2014년엔 패러글라이딩으로 히말라야 2400㎞를 횡단했다. 엄지손가락만 남은 뭉툭한 손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히말라야 탐험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산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이 점점 더 차올랐고, 결국 그는 지난해부터 엄지만 남은 손으로 암벽 등반을 다시 시작했다.

사고 전 박씨는 당대 최고의 클라이머였다. 고 박영석 대장의 마지막 등반지가 된 안나푸르나 남벽(8091m)을 1994년에 등정했다. 이듬해 에베레스트 남서벽(8848m)을 올랐고, 시샤팡마 남서벽(8027m)에 신 루트를 개척했다.

불의의 사고는 촐라체 등정 후 하산하다 줄을 묶은 후배 최강식(38)이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발생했다. 박씨는 2시간여 동안 후배가 매달린 끈을 놓지 않았다. 영하 20~30도 빙하에서 100㎏에 달하는 동료의 무게를 지탱하다가 손가락이 마비됐다. 후배는 크레바스에서 겨우 기어 올라왔지만, 진짜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갈비뼈가 부러진 박정헌과 양쪽 발목이 부러진 최강식은 1박2일 동안 산을 기어내려 와야만 했다. 두 사람은 목동에게 발견돼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 과정을 구술로 정리한 등반 리포트 『끈』을 읽은 작가 박범신이 2008년 박씨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촐라체』를 발표했다.

박씨는 다시 산에 도전하는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오랜 시간 돌이켜 생각해봐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등반입니다. 이왕이면 히말라야 등정을 갈망하는 사람들과 함께 오르고 싶어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히말라야 등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일 테니까요.”

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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