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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빚 내서 버틴다” 서민들도 “지갑 열기 무섭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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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3 면


지난 24일 전북 군산시 오식도동 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한 제이와이중공업. 영하권을 맴도는 날씨 속에 텅 비어 있는 축구장 14개(9만9000㎡) 규모의 공장엔 눈발만 날렸다. 공장 내부에 설치된 150~250t짜리 크레인은 멈춰 섰고 사무실 곳곳에도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제이와이중공업은 선박 조립용 블록을 만들어 납품하는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1차 협력업체다. 하지만 20일 현대중공업이 선박 발주 물량 감소로 올해 6월부터 군산조선소 운영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하면서 제이와이중공업은 공장 가동을 멈췄다. 이 회사의 임남원 전무는 “지난해 이맘때엔 협력업체 직원을 포함해 650여 명의 직원이 일했는데 일감이 점차 줄면서 지난해 말 최소 인력 30명만 남겨두고 구조조정을 했다”며 “마지막 납품 물량의 도장 작업도 다음달 중순이면 끝난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500억원을 대출받아 크레인 등 공장 설비에 투자했는데 올해 본격적인 빚 상환까지 겹쳐 눈앞이 캄캄하다”고 덧붙였다.


2008년 준공한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는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조선소에 들어서면 세계에서 가장 큰 주황색의 1650t급 골리앗 크레인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168만4000㎡(약 51만 평) 규모의 이 조선소엔 25만t급 선박 4척을 동시에 건조할 수 있는 도크(dock)가 있다. 하지만 철판을 자르고 조립하는 공장들은 모두 불이 꺼져 있다. 올해 액화석유가스(LPG) 운반선 2척을 만들 예정이었는데 지난해 7월 울산 공장으로 물량을 넘기면서 잔업만 남은 상태다. 전체 직원 760명 중 희망퇴직을 포함해 200여 명이 회사를 그만뒀다. 류해수 현대중공업 조선사업본부 군산가공소조립부 직원은 “남은 직원들은 순차적으로 울산 공장으로 재배치될 예정”이라며 “이번 설이 부모나 가족과 함께 고향에서 보내는 마지막 명절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군산조선소의 잠정 휴업으로 가장 타격이 큰 곳은 제이와이중공업 같은 협력업체들이다. 군산시청에 따르면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협력업체만 86곳(직원 5750명)에 이른다. 25일 기준으로 20여 곳이 문을 닫았고 약 2000명이 실업자가 됐다. 사내 협력업체로 100명이 넘는 직원을 데리고 있던 김모(45) 대표는 “지난해 말 대부분 직원을 집으로 돌려보냈다”며 “건강·고용보험 등 4대 보험금 낼 돈으로 직원들 퇴직금을 주고 있지만 얼마나 버틸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협력업체를 운영하는 임모(51) 대표는 “석 달 전만 해도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지냈는데 한순간에 빚쟁이로 몰린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현대중공업에 항의도 하고 싶지만 밉보였다간 혹여 공장을 다시 가동할 때 협력업체 등록에 빠질까봐 눈치만 보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룸마다 3~4개씩 빈방 늘어”]
이런 상황은 지역 경기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 오식동에서 가장 번화가인 상가단지가 한산했다. 상가 뒤편으로 공장 근로자들이 기숙사로 이용하는 원룸 빌딩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이호영 신현대공인중개사무소 부장은 “군산조선소가 문을 닫으면서 원룸마다 3~4개씩 빈방이 늘고 있다”며 “지난해 초만 해도 한 달 새 70~80건의 계약을 했는데 요즘엔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방을 뺄 수 있는지 문의하는 전화만 이어진다”고 말했다. 대로변 상가도 침울하긴 마찬가지다. 한 식당 주인은 “장사가 안 돼 지난해 가을에 가게를 내놨지만 팔리지가 않는다”며 “최근 조선소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가게를 보러 오는 발걸음조차 끊겼다”고 했다.


지역 경제가 흔들리자 협력업체들은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시위에 나섰다. 지난 25일 문동신 군산시장과 현대중공업 협력업체 대표 등 700여 명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 자택 근처에서 ‘군산조선소 폐쇄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달 1일부터는 정 이사장 자택 앞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할 예정이다.


대형 조선소가 몰려 있는 울산과 경남 거제의 지역 경제는 군산보다 피해가 더 컸다. 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대기업은 지난해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에 나섰고, 하청업체는 줄줄이 도산했다. 특히 울산은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정규직은 3000명 이상, 비정규직은 1만20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울산시의 실업률은 3.9%(11월 기준 통계청 자료)로 전국에서 상승 폭이 가장 크다. 조선업 불황의 그림자는 경남 김해·창원·양산 등 인근 지역으로 퍼져가고 있다. 양산에서 10년 넘게 STX·세진중공업 등에 조선업 기자재를 납품하던 중소기업 나우도 끝내 지난해 기업재무구조 개선작업(워크아웃)을 신청했다. 도외숙 나우 대표는 “매년 6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안정적으로 성장한 기업이었지만 일감이 줄어드니 도저히 손 쓸 방법이 없었다”며 “최소 인원만 남겨두고 구조조정을 한 뒤 빚을 내 몇 달을 버텼지만 이조차 힘들어 회사라도 살려볼 요량으로 워크아웃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찬 바람이 부는 것은 조선 분야만이 아니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기 침체로 ‘설 명절 특수’도 사라지고 있다. 25일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에는 명절이 낀 대목인데도 장바구니를 든 주부는 손에 꼽을 만큼 보기 힘들었다. 강선희(52)씨는 “19년간 운영하던 옷가게를 접고 지난해 중국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은 어묵 가게로 업종을 바꿨다”며 “외환위기 때인 1998년보다 지금이 더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녹두빈대떡·국수·김밥 등을 파는 먹거리 골목은 그나마 중국인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하루 종일 동태 두 마리 팔았다”]

반면 과거 명절 특수를 누리던 과일 가게와 한복 가게가 몰려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썰렁했다. 상당수 상인들은 난롯불을 쬐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2대째 과일 가게를 운영하는 이상훈(42) 동원청과 사장은 “김영란법 때문인지 지난해 추석과 비교하면 30~40% 이상 매출이 줄었다”며 “예전엔 손님들로 가게 안이 꽉 차서 난로를 둘 공간조차 없었다”고 들려줬다.


생선 가게도 한산하긴 마찬가지다. 50년 넘게 한 음식점 앞에서 생선 노점상을 해왔다는 최모(71)씨는 “오전 4시에 나왔는데 하루 종일 동태 두 마리 판 게 전부”라며 “손님들이 가격만 물어볼 뿐 도무지 지갑을 열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기도 안양시 평촌에서 장을 보러 온 강미경(65)씨는 “대형마트보다는 재래시장이 덤도 주고 깎아주는 것도 있어서 일부러 찾아왔는데 이곳도 비싸긴 마찬가지”라며 “가족들이 좋아하는 빈대떡 재료를 샀는데 지난해 추석 때보다 가격이 오르고 양도 줄어든 것 같아 속상하다”고 말했다.

[계란 한 판 1만원, 무 하나에 3000원]
경기 침체로 소득은 제자리인데 식품과 생필품, 각종 서비스 요금만 치솟고 있다. 서민들 살림살이가 갈수록 팍팍해지는 이유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전국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444만5435원으로 1년 전(441만6469원)보다 0.65% 늘어나는 데 그쳤다. 반면 서민들이 체감하는 장바구니 물가 상승 폭은 3.2%다. 1%대인 공식 물가 상승률보다 세 배나 높다.


한국물가협회가 지난 11일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4인 가족 기준 설 차례상 비용은 20만6020원으로 지난해보다 5.2%(1만100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총 29개 조사품목 중 17개 품목의 가격이 올랐다. 특히 계란(30개 특란)은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로 1년 전보다 109% 오른 9870원이다. 쇠고기 양지(400g)와 돼지고기 삼겹살(1㎏) 값 역시 8% 이상 올랐다. 주부 김정애(67·서울 서초동)씨는 “며칠 전에 차례상 준비를 위해 대형마트에 들렀는데 1000원이면 살 수 있었던 무 하나 값이 3000원을 넘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금융전문가들은 지금처럼 소비·투자·수출이라는 세 가지 성장 기둥이 무너지면 외환위기보다 더 혹독한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변양규 한국경제연구원 거시연구실장은 “요즘 20대 젊은이들마저 지갑을 닫기 시작했고, 대선을 앞둔 기업은 더욱 투자를 줄일 것”이라며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무역 마찰로 수출까지 타격을 받으면 한국도 일본처럼 장기 불황이라는 퍼펙트스톰(Perfect storm)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불황이 지속되면 근근이 버텨오던 자영업자나 서민들이 한순간에 쓰러질 수 있다”며 “정부는 하루빨리 국정 공백에서 벗어나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물가 관리에 나서는 등 민생을 챙겨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군산·서울=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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