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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들고 무릎 꿇리고, 김정은 실제로 키운 건 생모 아닌 김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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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생모 고용희(1953~2004)의 무덤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당초 고영희로 알려졌으나 미국 거주 중인 김정은의 이모부 이강의 인터뷰 통해 고용희로 밝혀짐)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 부근에 고용희 탄생 60주년인 2012년 6월 16일 초호화 묘로 조성해 놓고 노동당과 군부 간부 등만 단체참배를 허용할 뿐이다. 커티스 멜빈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구원은 무덤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고용희가 재일동포 출신이라는 점과 그 친척 중에 탈북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고용희의 여동생 고용숙과 오빠 고동훈은 탈북해 각각 미국과 유럽에 살고 있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북한 호위사령부(한국의 대통령 경호실) 출신의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을 실제로 키운 사람은 고용희가 아니라 김옥(김정일의 마지막 부인)”이라며 “김정은은 생모보다 자신을 키운 김옥에게 더 많은 정이 들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생모인 고용희는 무용수 출신이라 그런지 육아에 관심이 많지 않았고 김정은은 고용희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못 느꼈다”고 주장했다. 이는 고용희가 자신들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김옥을 발탁했다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용희는 김옥과 친했다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의 할아버지가 도쿄대를 졸업한 수재라 재일동포 출신인 고용희가 김옥에게 각별한 호감을 가졌다”고 밝혔다.


김정일이 생모인 김정숙(1917~49)을 우상화한 것에 비해 김정은은 고용희의 우상화에 다소 소극적이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영화문헌편집사가 2012년 만든 기록영화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님’(85분)을 제작하게 하고 노동신문 2012년 2월 13일 4면 서사시에 ‘평양어머님’ 정도를 깜짝 등장시킨 게 거의 전부다. 자식 된 기본 도리에 머무는 수준이다.


김정은의 육아교육은 김옥이 담당했다고 한다. 그것도 호되게 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다. 대북 소식통은 “아기들마다 차이가 있는데 김정은은 세 살 넘어서야 겨우 말이 트였다”고 말했다. 말이 늦게 트인 데다가 성격이 섬세하고 눈물이 많아 각별한 배려가 필요한 아이였다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은 김정은이 최고지도자의 자식이지만 때로는 매를 들기도 하고 말썽을 피우면 방구석에 무릎을 꿇리고 양손을 들게 했다”고 말했다.

[“김정일보다 22살 아래인 김옥 반말 사용”]
1964년생인 김옥은 북한의 예체능 고등종합 교육기관인 금성학원 출신으로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그리고 보천보전자악단과 함께 김정일 시대를 대표하는 왕재단 경음악단의 피아니스트가 됐다.


김정일과의 인연은 1980년대 후반 왕재산 경음악단에서 눈에 띄어 김정일의 기술서기로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기술서기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이상 간부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직책으로 주로 간호사들 중에 선발된다. 김정일에게는 여러 명의 기술서기가 있는데 이들은 일반 간부의 기술서기와 달리 우리의 비서에 해당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김옥이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김정은의 ‘가정교사’ 역할을 하게 됐다.


탈북민 인터넷 신문인 뉴포커스 장진성 대표는 김옥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얘기를 들려 주었다. 장 대표는 “김옥이 김정일보다 나이가 22살 아래지만 아무 거리낌없이 반말을 하는 사이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정일은 오히려 그런 모습을 즐겼고 감상하듯 웃으며 넘겨 버리곤 했다고 한다. 또 장 대표는 “정치국 위원, 당 비서들도 그런 지위를 누렸던 김옥에게 김정일을 숭배하듯 최고의 경어를 썼고 머리를 조아렸다”고 덧붙였다. 장 대표는 노동당 대남부서인 통일전선부 ‘101 연락소’에서 근무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은 그런 김옥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면서 어릴 때와 달리 대범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북한에 ‘담벽도 문으로 생각하고 밀고 나간다’는 말이 있는데 김정은은 한번 결심하면 완강하게 밀고 나가는 고집 있는 사람이 됐다”고 덧붙였다.


김옥은 김정일의 군부대 및 산업시설 시찰 등 현지지도 수행은 물론 외빈 접견에 참석할 정도로 그의 신임이 두터웠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이 그런 업무를 수행할 정도로 정치·군사·외교·경제 분야에서 ‘똑소리’가 났다”고 말했다. 김옥은 김정일의 방중·방러 때마다 동행하면서 그를 보좌했다. 아울러 조명록(1928~2010) 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2000년 미국을 방문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등과 면담할 때도 수행원 자격으로 배석했다. 대북 소식통은 “지금도 김정은이 김옥의 능력을 높게 평가해 자문을 구할 때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김옥은 2004년 고용희가 유선암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한 이후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김정일이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김정일과의 사이에 아들(13)을 1명 낳았다.

[고용희 사망 이후 퍼스트 레이디 역할]
김정일이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김옥의 역할은 더 커졌다. 김정일은 20여 년 동안 자신의 곁에서 ‘1급 참모’ 역할을 해 온 김옥을 더 믿고 의지했다. 김정일은 애당초 부자 세습에 다소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2004년 12월 베이징에서 만난 루중웨이(陸忠偉) 현대국제관계연구원장이 북한 고위 관료에게서 들은 내용이라며 “김정일이 ‘내 대(代)에서 부자세습이 가능하겠나’라고 털어놓았다”고 전했다. 대북 소식통도 “김정일은 자신이 후계자가 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 싸움을 자식들에게는 더 이상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갑산파 사건(1967년), 급진 군부세력(69~70년), 김동규 사건(76년) 등 세 번에 걸쳐 대대적인 숙청을 강행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김일성 지시에 따른 것이고, 김동규에 대한 숙청은 김정일이 직접 지시했다. 그래서인지 김정일은 김동규 사건을 가장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김동규는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동료로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는 데 적극 찬성했던 인물이다. 그 바람에 김일성-김일(1910~84?국가 부주석)에 이은 권력 서열 3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김일성은 건강에 문제가 있어 업무에 관심을 쏟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2인자였다. 그런 김동규가 76년 6월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정일을 비판한 것이다. 모든 것을 김정일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과 후계 작업을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을 문제로 지적했다. 아무리 김동규라도 김정일과 지도부는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김동규를 포함해 그에 동조했던 이용무 군 총정치국장, 지경수 당 검열위원장, 지병학 인민무력부 부부장 등을 숙청했다.


그런 과정을 거쳤던 김정일은 ‘세습을 하면 내부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일은 중국식 집단지도체제, 태국식 입헌군주제 등을 고려했지만 건강 문제가 생기면서 그런 생각을 접었다”고 말했다.

[김옥 평양 인근 거주, 친정 일부는 수용소행]
김정일은 건강 이상이 생긴 이후 대리통치를 장성택·김경희 부부에게 맡겼다. 그리고 동향보고는 김옥을 통해 받았다. 김옥의 능력과 판단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옥의 직책은 국방위원회 과장으로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은 “장성택 등 당·군 간부들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추천했지만 김정일은 김옥의 추천을 더 비중 있게 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은을 추천한 이들은 고용희의 장남인 김정철이 여성스럽고 유약한 반면 김정은은 승부욕이 강해 김정일을 닮았다고 본 것이다.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을 쓴 후지모토 겐지도 “김정일이 김정철에 대해서는 ‘여자 같다’며 못 미더워했다”고 말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철은 여성 관계가 복잡했고 일본을 자주 드나들면서 자본주의에 너무 빠져 후계자로서 부적절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사망하기 이전까지 김옥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때문에 최고 권력에 오른 김정은은 아버지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김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자신을 키워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은 있지만 반면에 자신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대북 소식통은 “이를 눈치챈 김옥은 김정은이 집권하자마자 과거 김정일이 자신에게 준 비자금을 그에게 바치면서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구명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에 김정은이 감동을 받아 김옥의 요청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반면 통치자금의 일부를 관리하고 있던 장성택은 달랐다. 장성택은 중국에 숨겨놓은 비자금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김정은에게 주지 않았다. 김옥과 장성택의 차이점이었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에게 ‘신의 한 수’를 가르쳐준 사람이 김정일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때 김옥의 숙청설이 나돌았다.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지난해 7월 “김옥과 그의 친정 식구들이 김정은이 집권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2013년 7월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보도했다. RFA는 “김옥의 남동생인 김균이 고용희가 사망한 이후 김옥이 김정일의 총애를 받자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고 설명했다. 김균은 2011년 45세에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에서 일약 총장 직무를 대리하는 제1부총장으로 발탁됐다.


하지만 김옥은 현재 평양 인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친정 식구 가운데에 일부가 RFA의 보도대로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한다.


고수석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ko.soosuk@joongang.co.kr

숙청설 돌던 김옥 알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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