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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유런 만난 장징장 “조국 가겠다니 가상”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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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28면


트리니다드에서 유진(尤金·우금)의 법률사무소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훗날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변호사 시절 얘기를 하던 중 이런 말을 했다. “성공의 재미는 한때였다. 남들은 나를 성공한 변호사라며 부러워했다. 그런 말 들을 때마다 환멸을 느꼈다. 천한 직업 택했다는 생각이 들자 허전함을 달랠 방법이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광활한 세계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고 싶었다.” 저우언라이가 “그게 바로 갈망(渴望)”이라고 하자 맞다고 했다.


유진은 독서에 열중했다. 일단 시작하자 게걸들린 사람 같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를 것 투성이였다. 하루걸러 한 번씩 책을 주문했다. 아들의 구술을 소개한다. “세계에 명성을 떨친 아버지의 글들은 엄청난 독서에서 비롯됐다. 영국과 프랑스 작가의 작품들을 많이 읽었다.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의 책들은 늙어서나 읽겠다며 가까이하지 않았다. 온화한 사회주의자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정도가 고작이었다. 서재에 아시아나 중국 관련 서적은 단 한 권도 없었다.”

[하루걸러 한 번씩 책 주문]


화교들은 자녀가 태어나면 모국어부터 가르치는 습관이 있었다. 유진은 영국의 지식인이나 다름없었다. 독서도 서구의 저작에 편중했다. 일반 화교들처럼 중국어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보니 읽고 쓸 줄을 모르고 중국 상황에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트리니다드는 작은 섬이었다. 중국에 관한 영문서적이 있을 리 없었다.


유진은 법률사무소를 걷어치웠다. 스페인항(Port of Spain)의 지식인들과 어울렸다. 공공도서관과 대학이 주관하는 토론회에 빠지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유진의 유창하고 세련된 영어와 해박한 역사지식에 주눅이 들었다.


스페인항의 지식인들은 유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한결같이 사람은 좋았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복창이 터질 지경이었다. 런던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런던에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화교 단체와 접촉했다.


국제도시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신문마다 중국 관련 기사가 빠지는 날이 없었다. 화교들 모임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혁명에 관한 얘기로 날 새는 줄 몰랐다. 유진은 1년에 한 번씩 런던을 방문했다. 신년 모임에서 한 청년이 귀국 결심을 토로했다. 그날 밤 유진은 잠을 설쳤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서점으로 달려갔다. 영문으로 된 중국역사 서적을 닥치는 대로 구입했다.


1911년 초 유진은 가족을 데리고 런던으로 이사했다. 상류층 주거지역에 집 한 채를 마련했다. 런던대학 철학과에 입학원서를 냈다. 법학을 전공하라는 면접관의 요청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부인 마리는 뭐 하는 짓이냐며 난리를 떨었다.

[런던 언론들 신해혁명 대서특필]
10월 10일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 정부군이 혁명군으로 돌변했다. 런던의 언론 매체들이 중국의 혁명을 대서특필했다. 10월 말 혁명의 상징인 쑨원(孫文·손문)이 런던을 방문했다. 화교모임에 참석해 “새로 성립된 공화국을 위해 봉사할 때가 왔다”며 귀국을 권했다.


유진은 안락한 런던생활을 접어버렸다. 시베리아를 경유해 베이징까지 가는 열차표를 구입했다. 부인은 귀국을 포기했다. “혼자 가라. 나는 혼혈아다. 자식들도 혼혈아다. 혼혈아는 어딜 가도 무시당한다. 중국은 더 심하다고 들었다. 우리 때문에 제약 받을 이유가 없다. 편안한 생활 버리고, 단 한 명의 친구도 없는 곳에 가려는 사람의 슬픈 용기를 막을 힘이 내게는 없다.”


귀국 도중 파리에 며칠 머물며 중국 정세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르몽드에서 중국의 혁명성인(革命聖人) 장징장(張靜江·장정강)이 파리에 와있다는 기사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괴상한 별명이 붙었는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만나 보니 나이도 두 살 어린 사람이 온갖 어른 흉내는 다 냈다. 불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했다.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니 가상하다. 쑨원 선생의 연설을 듣고 결심했다는 말을 들었다.” 유진은 반만 인정했다. “연설에 감동은 받았다. 결심은 스스로 했다.”


장징장은 말을 돌렸다. “변호사라고 들었다. 법관이라는 사람들이 상식적이지 못하다 보니 생겨난 직업이다. 그만두기 잘했다.”

[우롄더가 유진 이름을 천유런으로 지어줘]
유진은 공감했다. 장징장은 사람 욕심이 많았다. “중국에 가면 쑨원 선생을 만나봐라. 소개장 써주마.” 유진은 거절했다. “찾으면 가겠지만, 내 발로 갈 생각은 없다.” 혁명성인은 대담했다. “맞는 말이다. 제 발로 찾아와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치고 쓸 만한 사람 못 봤다. 혁명은 열정과 손발이 맞아야 한다. 귀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유진 36세, 장징장 34세, 두 사람 모두 20년 후 사위와 장인 사이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할 때였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유진은 귀국 중인 우롄더(伍連德·오련덕)와 조우했다. 우롄더가 건의했다. “유진은 중국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이름이 아니다. 원래 성이 뭐냐?” 천(陳)이라고 하자 이름까지 지어줬다. 천유런(陳友仁·진우인), 듣기도 좋고 쓰기도 쉬웠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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